대체 역사물보단 '대안' 역사물이 더 어울리는 드라마 '돌풍'에 관하여.
“알고 싶어요. 우리나라에 시해를 당한 대통령이 한 명인지, 두 명인지.” 넷플릭스 미니시리즈 <돌풍>의 대사가 가리키는 시해를 당한 한 명의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의미하는 것 같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드라마 속 가상의 대통령 장일준(김홍파)이다. <돌풍>은 기본적으로 역사 위에 지어진 대체역사물이다. 하지만 실존했던 혹은 실존하는 인물을 조각난 모자이크 판본처럼 해체하고 재구성한 것처럼 현대정치사의 굵직한 정황들을 떠오르게 만드는 순간들이 적지 않다. 덕분에 ‘대체’가 아니라 ‘대안’ 역사물처럼 읽히는 인상이기도 하다.
“현실에서 불가능하니까, 드라마 속에서라도 초인을 만들고 싶었다. 그 초인이 숨 막히는 세상을 쓸어버리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토대를 만들면 어떨까 해서 시작한 작품이 <돌풍>이었다.” 지난 6월 22일에 열린 <돌풍> 제작보고회에서 <돌풍>의 각본을 쓴 박경수 작가가 한 말이다. <추적자>, <태양의 제국>, <펀치> 등의 드라마를 통해 재벌과 정치와 검찰이라는 거대 권력의 속내와 정경유착의 고리를 심도 있게 그려내고 파헤친 그는 한국의 현대정치사로 돌격해 모든 것을 뒤엎어버리듯 <돌풍>을 집필한 것 같다.
<돌풍>은 현직 국무총리 박동호(설경구)가 대통령을 시해하는 상황에서 시작된다. 국무총리는 대통령의 오른팔이었지만 그가 정경유착의 몸통이라는 사실을 참지 못하고 하야를 요구한다. 하지만 끝내 거짓비리를 뒤집어쓴 정치보복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그런 그가 대통령을 시해한 건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국무총리로서 대통령 권한대행 자격을 얻어 한 달 안에 ‘돌풍’을 일으키는 것. 숨 막히는 오늘의 세상을 다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것. 하지만 어제의 동지였으나 오늘의 정적이 된 경제부총리 정수진(김희애)은 번번이 그를 방해한다. 같은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지만 가는 길이 달라진 두 사람은 각자 바람을 일으키며 정치판을 흔든다.
“거짓을 이기는 건 진실이 아니야. 더 큰 거짓말이지.” 박동호가 뱉은 이 말과 비슷한 말을 정수진도 뱉는다. “강한 것이 옳은 것을 이기죠. 정치가 그래요.” 결국 더 큰 거짓말로 거짓을 이기거나, 강한 것으로 이기거나, 둘 다 방법을 안다. 정치를 이해한다. 세상을 깨끗하게 만들고 싶었던 건 강직한 검사 출신 정치인이나 강인한 운동권 출신 정치인이나 매한가지였지만 한쪽은 눈을 감을 수 없었고, 한쪽은 눈을 뜬 채로 받아들였다. 불의와 타협할 수 없는 자는 지면서 이기는 법을 배웠고, 불의를 수용할 수 있는 자는 제거할 수 없는 적을 지배하는 법을 배웠다. 그렇게 각자의 기술로 대결한다.
<돌풍>은 현실정치에 존재할 것 같은 얼굴과 언변으로 그리고 말하는 한계와 이상의 세계다. 더 큰 거짓을 말해야 거짓을 이길 수 있다는 논리는 필연적으로 자가당착이다. 그토록 청렴하고 정직했던 이들이 정치판에만 뛰어들면 변질되고 변절하며 때때로 몰락하는 건 그들을 그러한 자가당착으로 발목을 잡는 아귀 같은 정치꾼들의 정치질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타협하거나 동조하거나, 그렇게 발가벗고 함께 사우나나 하는 사이가 되듯 비밀을 공유하며 진짜 친구가 된다. 그래서 제거할 수 없는 적을 지배할 수 있는 더 큰 힘을 가져야 한다는 합리로 정치공학적 사고에 물든 또 하나의 정치꾼이 된다. 그렇게 자신이 만들고 싶었던 깨끗한 세상과 스스로 멀어진다.
오늘날 만연한 ‘정치 혐오’란 변질과 변절과 몰락으로 점철된 정치판에 대한 불신과 절망에서 비롯된 증상이다. 박동호가 원하는 ‘돌풍’은 사실 이상이다. 숨 막히는 오늘의 세상을 다 쓸어버리고 다시 시작하려면 자신까지도 쓸어버릴 일원이 돼야 한다는 것을 알고 실행하는 정치인이 있을까?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히고 모두를 구원할 예수 같은 그런 정치인? 박경수 작가 역시 그런 정치인이 현실에 존재하리라 믿을 정도로 순수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바라는 것 같다. 그 결과로 태어난 것이 <돌풍>의 박동호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꿋꿋이 버티는 강직한 승리를 그리는 거짓말보다 더 큰 거짓말을 그린다. 숨 막히는 오늘의 세상을 다 쓸어버리고 다 시작하려면 자신까지도 쓸어버릴 대상이 돼야 한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뇌관이 돼서 더러운 것들과 함께 폭발해 사라지는 정치인을 그린다. 누가 봐도 거짓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거짓말을 좋아한다. 그리고 어쩌면 바랄지도 모른다.
지난해 천만관객을 동원한 <서울의 봄>은 뜻밖의 흥행작이었다. 김성수 감독 스스로도 그런 성적을 거둘 것이라 기대하지도, 예상하지도 못했다. ‘실패하면 반역이고, 성공하면 혁명’이라 일갈하며 군사반란을 일으킨 군부 세력의 진압 실패 과정은 이미 역사에 기록된 사실임에도 많은 이들이 영화를 보며 치를 떨었던 모양이다. 의외이지만 그런 치가 떨림이 <서울의 봄>을 보게 만드는 힘이었다. 그러니까 그런 실패가 있었음에도 우리가 민주주의로 나아가 오늘로 다다른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그리도 하 수상하던 시절 몸을 던지며 희생한 젊은 혈기를 빨아들인 결과이기도 하지만 그만한 갈망이 이 사회에 잠재된 덕분일 것이다. 그리하여 그 시절 강철대오를 이끌었다며 운동권 명예를 앞세우며 협잡한 정치꾼이 된 86세대의 세태 앞에서 누군가는 새로운 승리를 상상한다. 왼쪽의 어둠을 걷어내고, 오른쪽의 어둠을 부수고, 새로운 빛을 만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목놓아 부를 광야 같은 세상을.
그런 의미에서 <돌풍>은 ‘대체’가 아닌 ‘대안’ 역사물 같다. 항간에는 이 작품이 기존의 정치 드라마에 비해 사건 전개의 속도감이 빠르고 그만큼 회당 밀도가 상당하다고 하는데 이를 두고 정치 드라마의 새로운 경향을 제시했다고 평하기는 애매하다. 그보단 물고 물어지는 사건의 인과를 빠르게 밀어내며 감상의 몰입도를 더하는 요즘 드라마 문법의 트렌드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 전에 추적자>나 <황금의 제국>, <펀치> 등 <돌풍>의 각본을 쓴 박경수 작가 특유의 장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평가나 감상의 호불호를 떠나 이 작품이 많은 이들의 마음속에 심어둔 뇌관 같은 것이 됐다면 그건 결국 현실 정치의 비열함과 졸렬함 탓일 것이다. 그만큼 정치 혐오를 느끼는 이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 밖의 보이지 않는 바람이 <돌풍>이라는 더 큰 거짓말을 끌어낸 셈이랄까. 그만큼 한국 정치 드라마나 영화의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무궁무진해 보인다. 이것은 희극인가, 비극인가.
('Noblesse MEN' 매거진 2024년 9월호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