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인간시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민용준 Oct 11. 2024

정은채, 와닿는 마음이라면

'정년이'에 출연한 배우 정은채를 만났다.

정은채는 지금 중간 어디쯤이다. 이전과 다른 새로운 자신과 마주하기 위해서 부수고, 자신감과 불안감 사이에서 살아가기 위해 마주하고, 확실하지 않지만 그래서 흥미로운 그 세계에서 가져야 할 믿음과 해내야 할 감당을 받아들이며, 와닿는 마음을 기꺼이.


<정년이>에서 맡은 문옥경 역할을 위해 처음으로 쇼트커트 스타일을 시도했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이렇게 짧게 자른 건 처음이었어요. 계기가 생기면 뭐든 시도할 준비는 돼있었고, 그럴 수 있길 바랐는데 적절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죠. <정년이>는 캐릭터 특유의 느낌이 비주얼로 확실히 보여야 하는 인물이라 무조건 짧게 커트를 해야 했는데 이왕 하는 거 확실하게 해 보자 마음먹었어요. 그런데 함께 오래 일한 분들 입장에서는 걱정되나 보더라고요. 하지만 감독님과 첫 미팅 자리에서 확신이 생겼어요. 너무 어울릴 거 같다고 하시니 믿어도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렇게 한 차례 마음을 내려놓는 과정이 있었죠.


<정년이>는 여성국극이라는 낯선 소재를 다룬 작품입니다. 1950년대에 여성 소리꾼으로만 이뤄진 무대 공연이 당대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놀라움이 이 작품의 첫인상이었을 거 같아요.

원작 웹툰을 보다가 실제 배경이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고 관련 자료를 찾아봤어요.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죠. 하지만 관련 자료가 흔하지 않고 접근하기도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가능한 자료를 찾고 받아서 미리 숙지하고 공부하는 시간을 보냈죠. 특히 <왕자가 된 소녀들>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정말 도움이 됐어요. 여전히 여성국극을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도 알았고, 여성국극 무대에서 TV나 영화로 넘어와 활동하신 분들도 계셨다는 걸 알았죠. 실제로 여성국극의 인기와 파급력이 상상 이상이었다고 해요. 지금으로 치면 K팝 아이돌 팬덤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 어쩌면 그런 문화의 시초라고 볼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고 하더라고요. 저 역시 여성국극 자체가 신선한 수준을 넘어 충격적으로 다가왔어요.


1950년대에 여성들이 주도한 여성국극이 그토록 대단한 열광을 얻었다는 점이 지금 더욱 놀랍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여성국극 배우들의 사상이나 신념을 알면 알수록 현대적이에요. 70여 년 전에 그런 여성들이 있었다는 사실 덕분에 새롭게 깨우친 바도 있어요. 오히려 그때보다 지금 뭔가 억압하고 제지하려는 틀이 더 강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가부장적인 틀에서 벗어나 누구보다 ‘젠더 프리’하게 자유롭고 신명 나는 삶을 꿈꾸는 ‘모던 여성’들의 문화이자 이야기였으니까요. 그래서 그 많은 여성 팬들이 보호막을 치듯 열광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 문화가 해방을 맞이한 시대에 대중적으로 환영받았다는 점에서 오는 감동도 있는 거 같고요.

출연 정보를 몰랐다면 <정년이> 티저예고편의 공연 장면에서 짧게 등장하는 문옥경이 정은채 씨라는 걸 알아보지 못했을 거 같습니다. 분장에 상당한 공을 들인 거 같더군요.

실제로 보면 훨씬 강렬해요. 처음 모니터로 볼 때에는 시청자들도 놀라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죠. 게다가 무대에서 연기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그걸 카메라로 촬영해서 보여주는 것이니 정말 많은 테스트 촬영과 회의를 거치며 접점을 찾아갔어요. 배우들의 개성이나 캐릭터의 정체성은 살리되 여성국극에 어울리는 분장을 제한하지 않는 방식 안에서 균형을 맞추는 게 어려웠지만 타협하거나 양보하지 않고 잘 찾아간 거 같아요. 그런 고심 덕분인지 생각보다 멋있더라고요. 여성국극을 최대한 담백하게 재현해야 한다는 고민과 숙제를 풀어내는데 집중했죠. 그리고 현장에 무대 감독님과 안무 감독님, 소리 선생님이 계셨는데 다들 자기 분야의 전문가이시잖아요. 그런 분들 입장에서도 카메라를 통해 무대 공연을 전달하는 건 처음이라 무대에서의 모습이 좋다고 한시름 놓지 못하고 촬영에 들어가면 완전히 새로운 고민이 쏟아져서 고생이었죠. 덕분에 공연신이 끝나면 다 같이 울고 그랬어요. 정말 이상했죠. 촬영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웃음) 뭔가 후련하면서도 서로가 대견한, 그런 동지애를 많이 느낀 거 같아요. 기존에 했던 작품들과는 다른 경험이었죠.

 

문옥경은 여성국극계의 ‘왕자님’이라 불리는 슈퍼스타입니다. 그만큼 매력적인 인물이자 대단한 실력파일 텐데, 그런 면모를 설득해야 하는 배우 입장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을까 궁금하더군요.

촬영 들어가기 몇 달 전부터 소리부터 시작해서 안무와 연기까지 걸음마하듯 준비했어요. 처음 시도해 보는 것들이었죠. 여성국극에서 소리를 낸다는 게 노래하는 것과는 또 다르고, 일반적인 연기와도 다른 느낌이라 하나하나 허들 넘듯 연습했어요. 적응하기 전까진 너무 막막했죠.(웃음) 그런데 모든 배우들이 다 같은 숙제를 안고 몇 개월간 개인 연습도 하고, 일주일에 몇 번씩 모여 무대 연습도 하고, 같이 세미나도, 워크숍도 가면서 진짜 극단처럼 준비했거든요. 무대에 올라가기 전까진 다들 긴장하면서도 서로 격려하면서 작품으로 서서히 스며들었던 거 같아요.


남성을 연기하는 여성국극 배우를 연기해야 한다는 것도 큰 허들이었을 거 같습니다.

맞아요. 시작할 때는 대본도 재미있고, 언제 이런 걸 해볼까 싶어서 기쁜 마음으로 선택했지만 난관이 많았어요. 일단 평소 제 목소리보다 낮은 톤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무대 위에서는 무게감 있는 카리스마를 보여줘야 하니 더욱 낮고 힘 있는 음성을 확장해서 소리내야 했어요. 쉽지 않았죠. 무대에서 소리 내는 법은 또 다르잖아요. 무대 경험이 없어서 배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죠. 그만큼 궁금한 세계였지만 어쩔 수 없이 두려웠고요. 그런데 연습하다 보니까 점점 변하는 게 있더라고요. 무대와 친밀해지면서 이런 변화를 경험하는 게 신선했고, 그래서 문옥경이라는 무대 장악력이 있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재미가 있었어요.

‘당대 최고의 여성국극단의 왕자님이라 불리는 국극 스타’라는 설명만 봐도 결코 단순할 수 없는 문옥경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였을까 궁금합니다.

문옥경은 무대 위와 아래에서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진 사람 같아요. 그런 대비가 문옥경을 신비롭게 만들기도 하고,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재미있었어요. 여성국극 배우로서 연기하는 남성 캐릭터도 다양해요. 가부장적이거나 남성미가 드러나는 인물도 있지만 처연한 인물도 있고, 정말 결이 다양해요. 실제로 남자 역할을 하는 여성국극 배우에게 환호하는 여성 팬들이 상당했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여자가 남자를 연기했다는 점이 영향을 미치는 바도 있었을 거 같아요.


문옥경은 정년이(김태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멘토일 것 같고, ‘공주님’이라 불리는 서혜랑(김윤혜)의 라이벌처럼 보입니다. 이런 관계를 여배우들끼리 연기하고 소화하는 과정에서 느낀 특별함도 있지 않았을까요? 단순히 여배우끼리 함께하는 작품이라는 의미를 넘어 1950년대에 유행한 여성국극이라는 낯선 세계를 함께 재현한다는 모종의 연대감 같은 걸 느끼지 않았을까요?

같은 여성끼리 느낄 수 있는 정서적인 유대감이 컸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 바가 좀 달랐던 거 같아요. 무대 위에서는 각각 남자와 여자를 연기하는 문옥경과 서혜랑도 무대 아래에서는 같은 여자이니까 그렇게 교차되는 관계성이 묘하게 다가왔어요. 정년이 입장에서 문옥경은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일 수도 있지만 그와 또 다른 면면이 있는 거 같아요. 감독님과 처음 미팅할 때 문옥경을 이야기하면서 ‘요정’ 같다고 말했거든요. 정년이라는 원석을 알아보고 그 능력을 키워준 역할을 넘어 언제 있었는지도 모르게 인생에 큰 한 수를 두고 간 사람 같은 느낌? 삶에 새로운 막을 열어주고 새로운 세계에 발을 디디게 해 준 존재라는 걸 살아보니 알게 되는, 누구라도 굉장히 고마운 기적처럼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 있잖아요.


문옥경은 정년이라는 ‘성장캐’에게 영향을 미치는 ‘완성캐’ 같기도 한데요. 문옥경을 연기하는 입장에서 정년이를 보면서 처음 연기를 시작하던 시절이 떠오르진 않았을까 궁금합니다.

나의 알 수 없는, 어쩌면 나도 제대로 알 수 없던 욕망과 재능을 누군가 알아주길 바랄 때가 있잖아요. 모든 것이 두렵고 무섭기도 한 동시에 그저 신나고 즐겁고 재미있기만 했던 순간들도 있고요. 정년이를 보며, 그 반짝이는 순간들을 보면서 처음 연기를 시작할 때의 나는 어땠는지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런 정년이를 마주하는 것 자체가 좋더라고요. 살아있는, 계속해서 움직이는 캐릭터라서. 사람들이 성장캐를 좋아하는 것도 그런 이유겠죠. 무언가 성취했다가 한순간에 다 잃어버리기도 하고, 그렇게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그런 캐릭터를 계속 마주하는 과정 자체가 실제로 전해주는 게 있었던 거 같아요.

데뷔 이후 기복 없이 꾸준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배우로서 살아가는 과정에 대한 자신감을 느낄 때도 있고, 반대로 불안감을 느낄 때도 있을 거 같아요.

자신감과 불안감의 중간 어디쯤 있는 것 같아요.(웃음) 다행히 작품을 계속할 수 있어서 다양한 시도와 선택을 해보려 노력하는데 그런 기회가 온다는 게 늘 기적 같죠. 부업을 생각할 필요 없이 배우로서 생활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도 문옥경 같은 이가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 그리고 하루하루 다른 거 같아요. 어떤 날은 지금까지 해온 만큼 앞으로도 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생기는 반면 어떤 날은 앞이 캄캄하죠. 그런 걸 보면 아직 성장캐인가 봐요.(웃음)


그게 무엇이든 대체로 처음에는 그게 불안인지도 모르고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계속할 수 있게 되고, 경력이 쌓이고 익숙해지면 되레 불안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만약 불안을 느낄 수 있다면 역설적이지만 계속해올 수 있었던 덕분일 겁니다.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불안감이 자신감이 될 수도 있는 것 같고, 뭔가를 느끼며 계속한다는 것 자체가 시도하거나 선택하지 않았다면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니까 계속 그렇게 가는 게 맞겠죠. <정년이>도 미지의 세계나 다름없는 작품이었어요. 배우고, 공부할 것도 너무 많았죠. 이런 기회가 흔하진 않거든요. 그래서 마음에 와닿으면 선택하고 싶어요. 그 뒤로 밀려오는 것들은 오롯이 제 몫이니까 감사한 마음으로 저와의 싸움을 시작하며 기꺼이 감당해야죠. 그 과정에서 느끼는 바가 너무 많았거든요. 저에게는 굉장히 큰 자양분이 되는 과정이었어요.


현재 <파친코> 시즌2의 2화까지만 공개된 상황입니다. <파친코>에서 연기하는 경희는 아직 수동적인 인물로 보이지만 점차 능동적인 변화를 맞을 거 같더군요.

<파친코>의 경희는 문옥경과 정반대인 사람이죠. 이제야 조금씩 세상을 알아가고, 사람도, 자신의 정체성도 알아가는 캐릭터라 주변 상황이나 인물에 많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시즌1은 그런 경희를 소개하는 수순이었지만 시즌2에서는 다른 면모를 보여줄 기회라 개인적으로 해소되는 바가 있었어요. 시즌1의 경희는 다른 캐릭터를 위한 배경이 되는 캐릭터 같잖아요. 제삼자 같은 인물이죠. 낯선 인물이 들어올 때 경계하는 건 그 시대의 여성상이 반영된 인물이기 때문이고요. 그렇게 시대적 공기를 만들어주는 역할인 거죠. 그런데 시즌2에서는 경희의 내면으로 좀 더 깊이 들어가고 드러내는 지점이 생겨서 전보다 공감할 수 있는 인물로 보이더라고요. 다양한 관계 속에서 스스로 찾아가고, 알아가고, 본인의 목소리도 내고, 한편으로는 내려놓는 법도 배우고, 그렇게 세상을 알아가는 모습으로 좀 더 다양하고 복합적인 감정선을 보여줄 수 있었어요. 개인적으로는 아픈 손가락 같기도 한, 좀 짠하게 느껴지는 사람이에요.

<더 킹: 영원의 군주>의 구서령이나 <안나>의 이현주처럼 자기 욕망을 뚜렷하게 드러내는 인물을 연기할 때와 비교하면 어떨까요? 비록 악역으로 분류되고 정의되지만 그만큼 선명하게 다가오는 인물들이니까요.

욕망을 드러내고 분출하는 캐릭터를 연기할 때는 오히려 그런 욕망 외에 뭐가 있을까 생각해 봐요. 그러면 연기하는 게 좀 더 재미있더라고요. 욕망이라는 정해진 색깔 외에 무엇이 있을까? 이 사람이 집중하거나 무관심한 게 무엇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 인물이 좀 더 다채롭게 보이는 거 같아요. 그래서 구서령이나 이현주를 빌런이라고 하면 ‘그런 캐릭터였나?’ 생각하게 돼요. 제 입장에서는 그렇게 접근하지 않았으니까요. 가능하면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보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을 때도 있으니 그때마다 어떻게 하면 다른 걸 해볼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거죠. 제 안에는 그런 기질이 있는 거 같아요. 계속 부숴 나가고 싶고, 그렇게 새로운 자신을 마주하고 싶은? 그래서 고통스러운 면도 있지만 그래야 새로운 걸 발견할 수 있으니까.


<파친코>는 애플TV플러스를 통해 전 세계에 공개된 작품입니다. 처음으로 해외에서 제작하는 작품에 참여한 만큼 여러모로 새로운 경험이 아니었을까 싶은데요.

다양한 문화권에 있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 현장 자체가 <파친코>의 정체성 같았어요. 언어, 문화, 역사가 다 다른 사람들끼리 소통이 가능할까 의심스러웠고, 실제로도 쉽지 않았지만 결국 그런 차이를 뛰어넘어 정서적으로 통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죠. 현장에서도, 작품을 보면서도 느꼈어요. 신선한 경험이었죠. 배우 입장에서 보자면 유연함과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이었던 거 같아요. 한시라도 깨어 있지 않으면 흘러가듯 사라질 것 같은 순간들이 많았거든요. 가족 간의 이야기가 주를 이룬 만큼 각자 위치에서 세밀하게 협력하며 유대감을 놓치지 않으려는 느낌이 있었고, 그래서 좋은 하모니를 가진 작품이 된 거 같아요. 낯선 이민자들끼리 작은 에너지를 모아 이뤄내는 큰 희망을 볼 수 있는 이야기가 현장의 분위기와도 연결된 거 같아서 특별했어요.


혹시 <파친코> 이후로 해외 진출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은 없나요? 영어도 능통하니 언어적으로는 준비됐다고 볼 수도 있고요.

애초에 <파친코> 같은 작품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도 못했기 때문에 이런 작품이 만들어진다는 것도 신기했고, 오디션 과정부터 촬영까지 모든 면면이 새로웠죠. 미국 자본의 드라마이지만 기존의 작품들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제작됐다는데 이렇게 좋은 작품이 나왔으니 더 다양한 기획도 가능해지지 않을까 기대해요. 그렇다면 기회의 문이 또 열릴 수 있겠죠. 그렇다면 열린 마음으로 기꺼이 도전해보고 싶어요. <파친코>를 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런 일이 생기면 좋겠네요.


('W KOREA' 10월호에 쓴 인터뷰 기사를 재편집한 글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주명, 운명적인 불안과 욕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