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와 '시'가 바라보는 예술.
하등의 쓸모가 없는 예술이 인류의 역사와 함께 나란히 이어지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삶이 이토록 부단하고 척박할수록 더더욱. 패트릭 브링리의 자전적 에세이집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와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가 전하는, 예술이 삶에 머무르는 이유에 관하여.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지난 2023년 3월에 작고한 류이치 사카모토의 마지막 산문집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에서 그가 남긴 마지막 문장이다. 이는 고대 그리스 의학자 히포크라테스가 기원전 400년 전에 쓴 <잠언집>에 실린 문장을 인용한 것이다. 덕분에 기원전에 쓰인 말이 현대 음악가의 삶에 미친 영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예술가는 사라져도 그가 남긴 예술은 사라지지 않는다. 결국 위대한 예술가의 죽음이란 위대한 예술에 영생을 불어넣는 마지막 숨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예술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왜 창작하고 감상하는가. 사람들은 왜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고, 글을 쓰고,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을 작곡하며 노래를 하고 춤을 추는가. 먹고사는 문제 안에서 하등의 도움이 안 될 일에 왜 천착하는가. 죽음의 공포와 전쟁의 광기와 생존의 갈급 사이에서 예술은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예술의 효용이란 무엇일까.
“간단하면서도 영양가가 풍부한 일이 필요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이상이었다. 뭔가 특별한 바가 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사무실 생활은 바쁘다. 항상 어떤 프로젝트에 집중하고, 언제나 앞으로만 나아간다. 그런데 갑자기 그럴 의지가 사라졌다. 나는 갤러리에 있었고, 빈손이었고, 고개를 든 채, 바쁘지 않을 의무를 생겼다. 눈을 뜨고 있는 것 외에 해야 할 일이 없었다. 자유의 물결이 나를 덮쳤다. 고요함 속에서 마음이 방황할 수 있었다.”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이하, <메트로폴리탄 경비원>)의 저자 패트릭 브링리의 말이다. 구체적으로는 한 인터뷰에서 했던 발언이다. <메트로폴리탄 경비원>은 세계적인 명망을 자랑하는 뉴욕 기반의 유서 깊은 매거진 <뉴요커> 편집부로 출근하던 저자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하던 일을 그만두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경비원으로 취직하며 경험하고 느낀 자전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기술한 에세이집이다. 일찍이 꿈꿔왔던,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매체의 일원이 되는 기쁨을 박차고 나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깊은 우애를 나눴던 형의 암투병과 죽음 이후로 패트릭 브링리의 삶에는 구멍이 났다. 바쁘고 고단한 일상은 자신이 꿈꿨던 ‘뉴요커’의 삶과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그래도 이뤄진 꿈이니 버겁게 밀어낼 일은 아니었고, 어떻게든 버틸 여력이 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삶이란 때때로 감당하고 있다는 믿음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알게 모르게 기대고 있던 그 무엇이 무너지는 순간 와르르 쏟아지고 마는 법이다. 건강했던 형이 급작스럽게 쇠약해지고 죽음을 향해 끌려가는 상황을 지켜보는 과정 속에서 그의 삶도 무력하게 시들었다. 빠르게 흘러가던 일상의 리듬이 삽시간에 의미를 잃었다. 정지 버튼에 신호가 들어왔다.
세계 5대 박물관 중 하나로 꼽히는 뉴욕 메트로폴리탄은 200만 개 이상의 유물이 전시되는 공간이다. 패트릭 브링리는 그곳에서 10년간 일하며 보고 겪고 발견하고 생각한 바를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그러니까 <메트로폴리탄 경비원>은 그의 10년에 관한 소회다. 그리고 그는 10년이 지난 뒤 비로소 미술관을 떠났다. 경비원직을 그만뒀다. 그렇다고 그가 다시 <뉴요커> 편집부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 ‘형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나는 내가 아는 공간 중 가장 아름다운 장소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장 단순한 일을 하는 일자리에 지원했다.’ 그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머무르는 삶을 선택한 이유란 단순히 형의 죽음만으로 점철된 것이 아니었다. ‘운 좋게 얻은 전도유망한 직장이 있는 마천루의 사무실로는 더 이상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는 글처럼 애초에 그는 자신의 일터에서 삶의 의문을 품기 시작했고, 형의 부재는 그러한 의문을 보다 강력하게 밟고 멈추게 만드는 브레이크 페달이었다.
누구보다 예술과 가장 가깝게 접근할 수 있고, 그에 대해 논할 수 있는 지위와 자격이 있는 삶이라 여겼던 꿈의 직장 <뉴요커>에서 그는 되레 예술에 제대로 감화될 여유를 누리지 못하고 지쳐버렸다. 덕분에 잡지사에서 에디터로 근무하며 지냈던 나날을 떠올렸다. 매월마다 새로운 과제를 해결하듯 사람을 만나고, 쓸만한 것을 찾거나 쓸만한 척을 하며 기획하고, 그렇게 매월마다 과업을 해치우듯 세상의 멋짐과 아름다움을 논하는 사무실에 앉아 마감에 찌들어 있던 나와 동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세상이 이토록 아름답고 멋지고, 이리도 즐길 것이 많다는 것을 피력하는 이들의 몰골은 그것을 전하기 직전까지 말이 아니었다. <메트로폴리탄 경비원>을 보며 문득 그렇게 지난날을 떠올렸다.
비단 유명한 잡지사 에디터의 사정만은 아닐 것이다. SNS상에서 난무하는 행복의 상찬은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만들까? ‘인스타그래머블’한 행복의 십자포화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까? SNS에 행복을 쏟아붓는 그들의 삶은 정말 그만큼 행복하기만 할까? 매번 끊임없이 전시해야 하는 행복을 염원해야만 하는 것이 삶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누군가 잘못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뭔가 잘못되고 있는 건 아닐까. 매일매일이 이토록 멋지고 특별하기에는 평범한 나날이 너무 많고 때때로 견뎌야 할 불행도 있지 않은가.
<메트로폴리탄 경비원>에서 패트릭 브링리는 자신이 살아가는 곳으로부터 아주 멀리서 온 역사적 유물과 미술품을 마주하며 그 기원을 살피고 예술적 성취를 논하기도 하며 끝내 삶을 돌아보고 반추한다. 가만히 응시하고 그것의 연유를 살피는 사이 서서히 고개를 드는 지난 삶의 그림자들과 마주한다. 그렇게 지난 삶에 드리운 그림자와 비로소 나란히 서있는 법을 익힌다. 죽은 형을 떠올리고, 지난 삶을 돌아보고, 흘러간 시간을 비로소 받아들인다. 지난 역사가 남긴 유구한 표정 앞에서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찾고 비로소 다시 떠난다. 그렇게 다시 미술관을 벗어난 삶을 살았다. 그것이 <메트로폴리탄 경비원>이라는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온 전말이다.
최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문학은 폭력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라 말했다. 폭력의 반대편에 선다는 건 결국 폭력에 뒤돌아선다는 의미가 아닐 것이다. 폭력의 반대편에서 그것을 끝까지 응시하고 바라보며 저항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지 않으면서도 그 폭력을 좌시하지 않겠다는, 그것이 문학가가 그리고 예술가가 가질 수 있는, 지닐 수 있는 일말의 집념이며 위력일 것이다.
“불필요한 의무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후에도 언젠가는 그 이야기를 다뤄야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그 사건이 저를 계속 찔렀다고 할까요.”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밀양에서 촬영할 당시 지금의 제목 대신 <시크릿 선샤인>이라 불렸다. 이 제목은 영문 제목으로 선택됐지만 <밀양>이라는 제목을 가린 것은 이창동 감독이 밀양에서 촬영하는 영화가 <밀양>이라는 제목을 걸고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밀양에서 벌어진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겨냥하는 것처럼 보일 것 같아 일부로 가린 것이었다. 실제로 <밀양>의 시나리오는 해당 사건을 염두에 두고 집필한 것이 아니었다. 해당 사건은 <밀양>의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세간에 드러났다. 애초에 알지 못했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밀양에서 찍는 영화를 구상하고 있는 상황에서 밀양에서 발생했다는 끔찍한 사건이 이창동 감독의 마음을 찔렀다.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어떻게 사후 처리를 하는지는 거대 담론에 비하면 무척이나 사적인 것처럼 느껴지고 이례적인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건 사회 전체의 도덕성과 관련이 있어요. 제겐 그런 본능적인 느낌이 있었던 듯합니다.” <밀양>을 만든 이상, <시>는 쓸 수밖에 없는 무엇이었다.
“사람은 죽음을 앞두고서 자기 자신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되어 있잖아요. 자신의 인생이 도대체 몇 그램이나 나가는지 질문할 수도 있고요. 어찌 보면 그게 바로 시를 쓰는 행위일지도 몰라요.” 이창동 감독의 말처럼 <시>의 미자(윤정희)는 묻는다. “시상은 언제 찾아와요?” 강을 끼고 있는 소도시에서 홀로 손자를 키우며 살아가는 미자는 거동이 불편한 노인의 수발을 들며 삶을 건사한다. 대단할 것도 업지만 부족한 것도 없는 듯 나름의 일상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미자는 시를 배운다. 시가 궁금해졌다. 시는 어떻게 쓰는 걸까?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 세상에서 미자는 홀로 시가 궁금하다. 원래 궁금했던 것인지, 갑자기 호기심이 생긴 것인지 몰라도 시를 써보고 싶다.
‘시를 쓴다는 것은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라고,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라고 문학 강좌를 진행하는 시인은 말한다. 그래서 미자는 시인의 말처럼 세상의 아름다움에 주목하고 그 안에 담긴 진정한 아름다움을 떠올려보려고 노력한다. 나무를 보고, 느끼고, 나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무슨 말을 거는지, 잘 들어보려고 애써본다. 그런 미자를 이상하게 보는 시선과 물음이 뒤따른다 해도 미자는 지긋이 지켜본다. 설거지가 쌓인 싱크대도, 식탁 위 사과도 자세히, 천천히 바라본다. 하지만 좀처럼 시상은 떠오르지 않는다. 시상보다 먼저 찾아오는 건 날벼락같은 현실이다. 입에 밥 들어가는 것만 봐도 제일 좋은 손자가 저질렀다는 끔찍한 만행이 난데없이 떠밀려온다. 아름다움을 찾으며 시상을 찾는 것도 버거운데 믿고 싶지 않은 참혹한 진실이 덮쳐온다. 그럼에도 일상은 흘러가고, 떠밀려가지 않는 삶은 부지해야 한다. 그러니 시를 쓰기 전에 남몰래 흐느껴 울 수밖에 없다.
어떤 일상은 파문처럼 번지듯 조용히 떠밀려와 삶을 출렁이게 만들고 흘러넘쳐 채울 수 없도록 흔들어대지만 실상 삶은 그렇듯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 다시 제 삶을 이룬다. <시>는 사건의 단면을 끌어내며 감정을 흔들기 보단 사건을 품은 채 흐르는 일상을 고스란히 응시하며 되레 감정을 억누르길 권한다. <밀양>이 묵직하게 얻어맞아버리듯 비틀거리는 일상의 평온을 파헤치고 삶을 도려내어 그 생의 심층을 관찰하는 영화였다면 <시>는 평범으로 가혹한 진실을 뒤덮으려는 세계의 관성 속에서 뾰족하게 그 실체를 드러낸 고통에 유일하게 반응하는 이의 표정과 심연을 읊는 영화 같다. 삶이란 아름답게 찬미하고 우습게 해소할 수도 있지만 때때로 가혹하게 진동하는 운율로서 대구해야 하는 법이다.
알고 보면 <시>는 처음부터 떠내려오는 시를 보여주며 시작하는 영화다.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던 강가의 소년 중 하나가 강에서 떠내려오는 무엇을 발견하고 그것이 서서히 다가와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 영화는 화면에 <시>라는 제목을 띄워 올린다. 시라는 것이 아름다운 세상에 대한 노래에 불과했다면 지금까지 존재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를 쓰고 싶었던 미자는 유일하게 그곳에서 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었다. 강에서 떠밀려온 소녀의 시체에 관해 혼자 궁금해하고 홀로 애석하게 여기며 그에 대해 말하는 유일한 입이었다. 그런 미자가 맨드라미를 보고 ‘피처럼 붉은 꽃’을 떠올릴 때 그 속내를 알 길이 없는 이들은 그저 한심한 말을 뱉을 뿐이다. 그런 세상에서 미자는 시를 되묻는다. 그렇게 결국 한 편의 시를 완성한다. 떨어진 살구가 으깨지는 것이 다음을 기약하는 길이라는 것을 아는 자만이 끝내 아름다움을 길어 올린다.
세상은 메마르고, 삶은 시리다. 그럼에도 인간은 살아야 한다. 그 와중에 영화는 되묻는다. 당신은 시를 쓸 수 있는가. 당신은 시를 찾을 수 있는가. 그것을 유일하게 쓰고 싶어 하고 찾으려 안간힘을 쓰는 미자의 삶을 당신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러니까 저마다의 삶은 모두가 그렇듯 스스로 돋아나고, 자라나는데 세상은 이처럼 채워지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아름다운 시상을 어렵게 떠올리고 쓰는 사람이 적어지는 것처럼 삶을 아름답게 떠올리고 써내려 가는 사람들이 사라지는 탓이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시가 살아남기에는 척박하기만 한 세상에서 여전히 시를 쓰고 읽고 읊는 이들이 존재할 이유란 무엇일까? 어쩌면 이런 질문이 살아남을 수 있다면 그것이 시가 존재해야 할 이유 아닐까? 아름다움이란 결국 정말 아름다워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이토록 고통스러운 삶을 이겨내기 위해 애써서 찾아내야 하는 것 아닐까?
어쩌면 우리는 어느 때보다 시가 간절한 시대를 지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창동 감독의 <시>는 바로 그런 시대를 향해 어느 반대편에 서있는 예술가가 밀어 보내는 안간힘일지도. 부박하고 야박하게 삶을 흔드는 세상 복판에서도 끝내 아름다운 언어를 쥐고 추락하는 것이라고. ‘나는 꿈꾸기 시작합니다’. ‘어느 햇빛 맑은 아침 깨어나 부신 눈으로 머리맡에 선 당신을 만날 수 있기를.’
(예스24에서 운영하는 '채널예스'에 쓴 칼럼을 재편집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