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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김종관, 늘 영화를 찍는 사람으로서

심중하고 부단한, 김종관 감독의 영화와 창작을 응원하며.

by 민용준

2021년 5월 6일, 서촌에 있는 아담한 복합문화공간 ‘어피스어피스(@apiece_apeace)’에서 김종관 감독의 단편영화 <만들어진 이야기>를 보았다. 김종관 감독이 찍은 사진과 관련 소품을 전시하는 공간에서 영화 상영까지 한다고 했다. 기존에 만든 작품을 상영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촬영한 작품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일종의 프리미어 상영이었다.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그날 받은 티켓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정확히 110번째 방문객이었다.


전시가 열리는 어피스어피스는 필운대로에 위치한 건물 3층에 자리한 아담한 공간이지만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만큼은 장관이다. 물결처럼 이어지는 서촌의 한옥 기와 너머로 어깨를 펴고 일어나듯 좌우로 완만한 인왕산이 하늘과 맞닿은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이 풍경은 <만들어진 이야기>에서 고정된 카메라로 거듭 중계되는, 영화의 주요한 배경이기도 하다. <만들어진 이야기>는 어피스어피스에서 촬영한 단편영화다. 그런 정보를 미리 접한 입장에서는 그저 영화를 만든 공간에서 영화를 감상하는 특별한 이벤트 정도로 생각했다. 뒤늦게 알았다.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 영화 안에 자리하는 경험이 시작된다는 것을.


<만들어진 이야기>는 미니멀한 영화다. 한 공간에 마주 보고 앉은 두 여자 현경(문혜인)과 선아(이승비)의 대화를 듣는 게 전부다. 15분 남짓한 러닝타임 안에는 특별한 사건이 없다. 다섯 숏 정도로 구성된 부조리극 형식의 대화 양상이 전부인 단편이다. 하지만 지극히 사소할 법한 대화는 삽시간에 미궁 같은 경계로 스르르 관객을 끌어들인다. 실재와 허구, 진짜와 가짜, 경험과 창작, 마치 작가로부터 떨어져 나간 캐릭터처럼 육체와 영혼이 서로의 생사와 피아를 확인하고 식별하듯 나누는 대화는 대체로 오묘하고 곧잘 신묘하다. 참말과 거짓말로 구별할 뿐 대립하지 않아서 그 대화 끝에 맺히는 감정이란 끝내 슬프고 애석하기도 한데 그 슬픔과 애석함의 대상이 양쪽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길이 없어서 잔향이 짙은 여운을 안아야 한다. 그리고 컷.


영화의 끝에서 넘어오는 단말마 같은 외마디 소리가 킥처럼 날아든다. 촬영의 끝을 알리는 소리가 영화의 끝을 알리는 소리로 중첩될 때 극 안의 캐릭터를 연기하던 배우도, 극 밖에서 영화를 관람하던 관객도, 비로소 영화로부터 풀려난다. 그러니까 거짓말의 경계가 무너지는 사이 영화의 안팎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몰입하던 배우도 관객도 모두 다시 현실로 복귀한다. 모호했던 영화와 현실의 경계가 일순간 명확히 구획된다. ‘만들어진 이야기는 기억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억되는 이야기도 결국 꿈같다’고 말하는 영화 속 인물의 전언을 어떤 관객들은 끝내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가짜의 이야기를 받아들였던 경험’은 선연할 것이다. <만들어진 이야기>가 끝난 이후에도 남겨지는 건 방금 영화 속에 등장했던 공간에 앉아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진한 각성이다. 영화와 내가 마주 놓은 거울경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진짜 같은 가짜와 가짜 같은 진짜 사이에서 만들어진,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 없는 이야기가 영화 밖에서 되레 여전한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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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곳>

“어차피 만들어진 이야기인데 왜 믿어?” <아무도 없는 곳>의 창석(연우진)은 카페 맞은편에 앉은 미영(아이유)에게 볼멘소리를 듣는다.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던 창석은 잠시 골똘히 고민하더니 다시 말을 꺼낸다. “그래도 잘 만든 이야기는 사람들이 믿게 돼 있어요.” 창석은 작가다. 그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에게 이야기란 기본적으로 생존의 기술이다. 그러니 만들어진 이야기를 믿지 못하겠다는 이를 설득해 보는 건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시험하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 만들어진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자신을 향해 묻는 질문이 선행돼야 한다. 스스로 믿는 자가 돼야 한다. 그렇다면 창석에게는 믿음이 있을까? 그에게 믿음이 있다면 잘 만든 이야기에 대한 믿음일까, 잘 만든 이야기는 사람들이 믿게 돼 있다는 믿음일까?


창석은 늦은 밤에도, 이른 새벽에도, 한낮에도 길을 걷는다. 그 길에서 때로는 누군가와 함께 걷고, 때로는 누군가를 마주치고, 때로는 어느 곳에 다다르곤 한다. 그들 중 누구는 만나기로 예정된 이이기도 하고, 누구는 만날 것이라는 예감이 없었던 이이기도 하며, 누구는 일면식이 없는 낯선 이이기도 하다. 창석은 그렇게 만난 각기 다른 누군가의 사연을 듣는다. 창석은 대체로 듣는 사람이다. 그렇게 각자의 마음속에 웅크린 그림자를 마주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그림자는 꺼내 보이지 않는다. 창석의 그림자는 영화 속에서 목소리로만 등장하는 아내와 단 한 번의 통화를 통해 뒤늦게 실체를 드러낸다. 오직 관객을 향해서만 드리운다.


모든 이야기는 태초에 아무도 없는 곳이다. <아무도 없는 곳>이라는 제목이 가리키는 곳은 일찍이 창석이 아는 곳이다. 그의 이야기는 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시작됐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다라 만들어진 이야기도 실상 아무도 없는 곳이다. 무언가 가득 채웠다 해도 그곳은 실재하지 않기에 끝내 아무도 없는 곳. 창작이란 이처럼 무에서 출발해 무로 도달하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작가는 늘 아무도 없는 곳에 머물거나 서성일 수밖에 없다. 그곳에서 무엇을 찾거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존재여야 한다. 그래서 창석은 늘 기다리거나 듣는 사람이다. 찾아오거나 말해줄 이가 필요하다.


어둠 속에서 창석이 응시하는 쇼윈도 너머 범선은 환하게 빛을 발한다. 그 이후 동이 터 오르는 어느 새벽녘 창석이 또 한 번 지나치는 그 쇼윈도 너머에 범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골목 너머로 사라지는 창석의 뒤로 엄마의 손을 잡고 걷는 어느 소년의 손에 범선이 들려 있다. 그와 함께 밀물이 밀려오듯 자연스럽게 변환된 흑백 화면 안에서 창석은 이야기를 쓴다. 일찍이 공원에서 기이한 언행으로 눈길을 끌던 여자를 보았던 창석은 그녀를 아무도 없는 곳으로 초대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일찍이 창석이 봤던 것처럼 같은 행동을 하고, 같은 말을 하지만 전혀 다른 사람이 돼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만들어진 이야기가 시작된다. 덕분에 창석은 비로소 떠돌지 않고 머무르며 다시 한번 살아가는 존재가 된다. 자신의 그림자를 묻어둘 안식처 같은 문장을 찾고 써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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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on (4).jpg <최악의 하루>

“일단 저는 창작 자체를 만족스럽게 여기기보단 부정적으로 느끼는 쪽에 가까운 거 같아요. 끊임없이 뭔가를 찾고, 소진하며 만들어낸 뒤에는 그걸 두고 다시 어디론가 가야 하고 계속해서 고된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는 거라 고독감과 우울감을 거듭 느끼거든요. 전력질주하듯 만든 다음에는 뒤돌아보지 않고 다음을 향해 가는 거죠.” 김종관 감독의 말을 듣고 보면 창석의 고독과 우울은 그가 빚어낸 작가이기에 받아들여야 하는 필연적인 통과의례처럼 보인다. 어차피 김종관 감독의 아무도 없는 곳에서 만들어진 이야기와 함께 태어난 작가이기에 고독감과 우울감을 거듭 느낀 뒤 다음으로 나아가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라는 말이다. 그리고 김종관 감독의 영화에서 창작하는 사람은 또 있다. <최악의 하루>의 료헤이(이와세 료)는 다른 방식으로 고독과 우울을 투영하는 작가처럼 보인다.


늦여름 서촌과 남산을 주요 배경에 둔 <최악의 하루>는 배우 지망생 은희(한예리)와 료헤이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하는 로드무비이자 한편으로는 코미디이다. 평소 카페에서 차 마시기를 좋아하고 틈나는 대로 걷기를 즐기는 김종관 감독의 취향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최악의 하루>에서 료헤이는 ‘최악의 하루’를 보낸 은희와 남산에서 재회해 자신이 새롭게 떠올린 이야기의 엔딩을 여기서 찍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은희는 자신에게 ‘최악의 하루’에 방점을 찍어준 장소라 그런지 이곳이 별로라 말한다. 하지만 료헤이는 되레 해피엔딩을 떠올렸다고 한다. 그는 해피엔딩을 써본 적이 없는 작가다. 그는 눈이 내리는 계절에 그 길에서 걸어오는 무표정한 여자로부터 시작되는 해피엔딩을 은희가 알아들을 길이 없는 일본어로 읊는다.


관객은 이미 다 잊었을 것이다. <최악의 하루>의 오프닝 시퀀스는 어느 일본인 남성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홋카이도의 인적 드문 황폐한 도시 루모이에서 태어났다는 그는 여행지에서 꿈을 많이 꾸는 탓에 고향에 관한 꿈을 꿨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꿈 덕분인지 이야기를 하나 생각했다고 한다. 바로 곤경에 처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최악의 하루>는 시작부터 만들어진 이야기를 하는 작가의 아무도 없는 곳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대부분의 관객은 암전 된 화면이 밝혀지는 순간부터 그 독백을 잊고 상황에 몰입할 것이다. 그러니까 관객은 어느 순간 독백을 잊고 창석의 말처럼 은희에 관한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믿어버렸을 것이다. “잘 만든 이야기는 사람들이 믿게 돼 있어요.”


<최악의 하루>는 서촌과 남산이라는 공간을 너른 무대처럼 활용한다. 단순히 풍경의 차이로 두드러지는 공간으로 자리하는 것을 넘어 각기 다른 두 공간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이를테면 서촌에서는 비좁은 골목을 줄지어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반복해서 동일한 앵글로 보여줌으로써 연출과 편집의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반면 상대적으로 너른 남산은 예기치 못한 만남과 함께 갈등이 점화하고 폭발하고 끝내 신비를 고조시키는 자연적인 무대로 기능한다. 저예산 규모의 독립영화를 제작할 때 공간은 늘 해결해야 하는 주요 과제다. 예산 때문에 세트를 지을 수 없는 여건 안에서 최대한 적합한 공간을 찾아내는 예민한 눈과 기민한 발이 필요하다. 하지만 어떤 가능성은 허들을 넘을수록 가까워지는 결승선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현실적 제약을 통해 오히려 새로운 형식의 이야기를 모색하고 시도하는 창작자가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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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테이블>

<더 테이블>은 각기 다른 네 쌍의 커플이 만 하루 사이 한 테이블에 앉았다 일어나는 사이에 나눈, 네 번의 대화를 나열한 작품이다. 딱히 특별한 서사가 존재하지 않을 평범한 카페의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은 두 사람의 대화는 지극히 사적이기 때문에 때때로 비밀스럽고 은밀해서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 앉은 사람이 달라지면 언어와 표정도 달라지고 각기 머문 시간대가 다르듯 화면 속 공기도 달라지는 것 같다. 덕분에 영화를 보고 나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옆 테이블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싶은 충동이 느껴진다. 일면식 없는 이들의 내밀한 사연만큼 새로운 이야기도 없을 것만 같다.


서촌의 한 공간을 빌려 카페처럼 꾸민 후 단 7회 차 촬영만으로 완성했다는 <더 테이블>은 그야말로 초저예산 영화라는 것이 실감 나지 않을 정도로 면면이 대단한 배우들의 향연이다. 임수정, 정유미, 한예리, 정은채 등 각 에피소드를 책임지는 배우들의 이름만으로도 이채롭고 풍족하다. 그중에서도 <최악의 하루>에 이어 또 한 번 은희라는 이름의 인물을 연기하는 한예리와 김혜옥이 함께한 에피소드는 ‘거짓말’이라는 창작적 관점과 ‘연기’라는 배우의 기술을 은유하듯 반영한 작품으로 읽힌다는 점에서 보다 흥미롭다. 뜻대로 이뤄지지 않는 결과이지만 넘어진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참말이 된 거짓말을 믿고 가려는 인물과 그를 응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거짓이 되려는 인물이 각각 유사 모녀 관계처럼 느껴지는 순간, <최악의 하루>에서 빵 터지는 웃음을 선사했던 대사를 뒤늦게 잠언처럼 곱씹게 된다. “진실이 어떻게 진심을 이겨요.”


서촌에 살며 서촌을 배경에 둔 영화를 주로 만들어온 김종관 감독에게 <조제>는 가장 멀리 가본 영화였다. 단순히 서촌에서 벗어나 스코틀랜드까지 날아가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타인의 창작물을 자기 방식으로 재해석하는 첫 번째 경험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다나베 세이코의 단편소설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영화화한 이누도 잇신 감독의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을 리메이크한 <조제>는 원작과는 조금 다른 곳을 응시하는 영화처럼 보인다. 일단 시대와 국적이 바뀐 만큼 원작과 다른 현실을 그리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에 앞서 독자적인 감정적 결과 시야의 폭을 지닌 독자적인 방향성을 그린 작품처럼 보인다. 조제(한지민)와 영석(남주혁)의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된 멜로가 정서적으로 주요한 영화이지만 그들을 둘러싼 풍경을 찬찬히 돌아보고 응시하는데 주력하는 풍경의 영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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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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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울소리>

원작에 비해 다소 낡고 허름한 집안의 풍경으로 차이를 벌리는 듯한 <조제>에서 조제는 원작처럼 독서를 좋아하지만 원작과 달리 위스키병 수집에 애착이 많다. 보다 어른스러운 인물이다. 원작의 조제(이케와키 치즈루)와 다른 고독이 풍겨지는 건 그런 이유일 것이다. 가난과 노쇠의 풍경이 집 안팎 곳곳에 자리하고 손쉽게 눈에 띈다. 폐지와 빈병을 주워 얻은 천 원짜리 지폐와 동전을 모아 조제를 돌보는 할머니(허진)의 거친 손만으로도 처지가 선명하다. 취업난을 걱정하며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일상처럼 받아들이는 영석의 담담한 표정 역시 마찬가지다. 가난한 이들의 사랑이 철 지난 유행가처럼 버거운 현실에서 <조제>는 현실에 없는 낭만을 되뇌는 설화 같기도 하고, 환영 같기도 하다.


조제는 흩날리는 벚꽃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꽃들이 죽는다. 예쁘게, 조용하게 죽는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비극을 본다. 언젠가부터 김종관 감독의 영화는 생사와 명암의 경계 위에 서있는 것만 같다. 무주산골영화제의 장편영화 제작 지원 사업 ‘무주시네마프로젝트’의 첫 영화로 기획된 앤솔로지 영화 <달이 지는 밤>은 무주를 배경에 둔 두 편의 단편영화를 묶은 기획이다. 이중 파트 1에 해당하는 단편 <방울소리>는 한기처럼 스며드는 환상성으로 죽음을 호명하는 듯한 영화다. 김금순의 압도적인 열연과 안소희의 괴이한 신비가 고요한 박력을 선사하는 연출과 신묘하게 어울리며 형형하면서도 허허한 여운으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방울소리>를 비롯해 최근 김종관 감독의 영화에서는 죽음에 관한 시선이 다분하다. <방울소리> 이전에 망자가 등장하는 첫 번째 작품이었던 <밤을 걷다>나 죽음에 강한 인력을 느끼는 인물의 내면을 그린 <아무도 없는 곳>에서 죽음이란 존재와 부재 혹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보다 선명하게 가늠하도록 만드는 기준선처럼 제시된다. 슬픔이나 통증으로 정의되는 대신 죽음으로 인한 부재나 죽음 이후에도 가능한 꿈이 존재와 현실을 보다 생생하게 각성하는 감각처럼 전이되는 것만 같다. 마치 어두운 구멍처럼 방치된 면면을 심중하게 들여다보고 끝내 길어 올린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감독의 의식이 반영되고 발전된 결과처럼 그렇다.


“저에게 모티브가 되는 건 대부분 어두운 영역에 있는 것이에요. 때때로 즐거웠던 추억과 관련된 것들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제 기억 속에는 아름답거나 좋았던 기억보다는 슬프거나 외로웠던 기억이 대부분 각인돼 있더라고요. 그런 것들을 활용해서 만들어진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제 자신 안에 있는 그림자를 계속 보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면서도 창작에 대한 허기를 느끼니까 계속 그런 부분들을 길어내서 표현하게 되는 거죠.” 김종관 감독의 말은 그의 영화가 가리키는 방향에 관한 해설과도 같다. 빛이 없는 곳에서는 그림자도 없다. 그림자를 본다는 건 끝내 빛이 있는 방향 또한 알게 된다는 의미다. 김종관 감독의 영화에 드리운 상실과 결핍과 죽음과 통증과 슬픔의 기미란 비관으로 저물어버린 것이 아니라 어쩌다 기울었으나 다시 일어서려는 역력함을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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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common (16).jpg 김종관 감독

그런 의미에서 네 감독의 단편을 엮은 앤솔로지 영화 <더 킬러스>의 포문을 여는 김종관 감독의 최근작 <변신>은 여러모로 흥미진진한 발견이다. 김종관 감독식 오컬트가 <방울소리>라면 <변신>은 김종관 감독식 뱀파이어 호러이며 가장 장르적인 작품이다. 보기 드물게 액션 시퀀스를 연출한 작품이기도 하고 여러모로 이색적인 기획이라 할 수 있는 <변신>이 흥미로운 건 괴랄한 박력이 넘치는 호러 캐릭터가 등장하는 동시에 죽음의 기로에서 살아남아 본능적인 욕구를 마음껏 발산하는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이기도 하다. 여전히 새롭게 보여줄 것이 남았다는 듯 제목처럼 선언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김종관 감독은 이미 두 편의 영화를 촬영했고 후반작업에 매진 중이다. 어떤 식으로든 창작자로서 자기 길을 걸어왔고, 걸어갈 채비를 하고 있으며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자신을 품은 것 같다.


김종관 감독은 늘 영화를 찍는 사람으로서 감독의 정체성을 견지하고 견인했다는 점에서 분명한 덕목이 있는 감독이다. 일찍이 전설적인 단편영화로 회자되는 <폴라로이드 작동법>에서 시작된 그의 수많은 단편들과 장편을 목도한다는 건 직업감독으로서 살아가는 고뇌로 다다른 징검다리를 함께 건너는 체험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김종관 감독이 거듭 찍을 용기와 만들 의지를 북돋을 계기를 잘 찾아가길 바란다. 언제나 김종관 감독의 영화를 기다리는, 친애하고 경애하는 한 사람의 관객으로서, 진심이다.


(성북문화재단에서 운영하는 '아리랑 시네센터'에서 열린 '김종관 감독전' 팸플릿에 쓴 원고를 재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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