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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Jul 21. 2023

'죽음'과 함께 산책을

비가 내리다 그치길 며칠 째다. 비 그친 여름날의 오전은 닦아 놓은 유리창에 밝은 회색 필터를 끼워놓은 듯하다. 출근, 등교로 차량과 인파로 붐비던 거리는 몇 분 사이 볼륨을 줄인 음악 같았다. 혜령이의 여권을 갱신하러 구청에 가는 길이다. 햇살이 도보를 점령하지 않았기에 7차선 도로 옆길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걸을 때 '몸'에 시선을 두면 '생활 체육인', '몸이 아닌 것에' 시선을 두면 '산책자'라 했던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오늘은 '생활 체육인'이 아닌 '산책자'가 되어보기로 한다. 아니다. 사색과 운동,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욕심이니 '생활 산책자' 정도가 맞겠다.





걸어가며 일요일 받은 글쓰기 숙제에 대해 고심 중이다. '준비, 시작!' 하고 달리기 하듯 한 주가 시작되고 나면 금요일 저녁이나 되어야 여유가 생긴다. 주말에 갑자기 여행을 가게 되어 그전까지 숙제를 마쳐야 한다는 생각에 조급증이 일었다. 무엇을 쓸지, 어떻게 쓸지, 내 머릿속 엉킨 실타래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풀어나가는 것이 글쓰기의 재미지만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 머릿속을 골똘히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이럴 때는 한정된 시간과 목적지가 정해진 산책이 유용하다. 방탈출게임처럼 몰입과 집중을 선사하는 놀이가 된다. 규칙적으로 발을 움직이면 머리가 흔들려서인지, 가슴이 두근거려서인지 알 수 없지만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근사한 아이디어들이 불쑥 나타날 때가 종종 있다. 그 기회를 잡으려는 거다.





이번 참에 유서 쓰기를 해 볼까. 하지만 너무 뻔할 텐데. 뻔하지 않게 쓰면 괜찮을까. 코치님 말대로 유머러스하게 써보는 건 어떨까. 하지만 죽기 전날 내가 갑자기 유머러스해질 리가 없다. 의미 찾기 놀이를 진지하게 하는 게 내 스타일이다. 그래도 죽기 전까지 쓸데없이 진지하면 더 슬플 것 같기도 한데. 일단 그건 잘 모르겠으니 넘어가자. 그런데 무슨 내용을 담지? 죽기 전 하루를 나는 어떻게 보내고 싶지? 머릿속 메모지에 사각형을 그리고 하루를 삼등분했다. 그리고 아침, 점심, 저녁 세 개의 타이틀이 휘리릭 달았다. 정말 나란 사람 죽기 전날마저도 투두리스트를 작성할 셈인가 싶어 쓴웃음이 나온다. '진짜 죽는다.' 느낌부터 상상해 보기로 했다. 내게 단 하루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면 나는 진짜 무엇이 하고 싶을까. 맛있는 걸 먹을까. 세 번의 식사만이 남았는데 도대체 무얼 먹고 죽어야 아쉽지 않을까. 아니 내일 죽는다는데 내 입맛은 눈치도 없이 살아있을까. 가보지 못한 곳에 가보는 건 어떨까. 한 달이면 평생소원이었던 세계일주 맛보기나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남은 시간은 하루다. 비행기에서 내리면 바로 죽을 판이다. 패스. 나를 인터뷰해 보는 건 어떨까. 그런데 무엇을 물어야 하지? 제일 행복했던 순간? 제일 슬펐던 순간? 내가 다 알고 있는 그런 걸 정리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 그럼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 그런 거? 아무래도 그건 좀 오글거리기도 하고 같은 말의 반복일 것 같다. 패스. 그래도 마지막 인사는 준비하고 싶다. 편지는 너무 길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거다. 제법 괜찮은 생각이다. 가족들, 친구들, 지인들, 내게 영향을 준 사람들... 지금은 전화번호도 모르지만 꼭 한 마디 하고 싶은 사람들도 제법 많다. 하지만 뜬금없다 여길 것 같다. 한두 달 정도 연락이 없으면 나를 궁금해해 연락을 취해올 지인들로 범위를 좁혀야겠다. 하지만 '승희가 갑자기 죽었어.' 하고 친구한테 소식을 전하며 하루 이틀 안타까워할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는 게 좋으려나. 남에게서 내 소식을 듣게 하는 것이 미안한 생각이 드는 이름들을 속으로 하나씩 적어볼까. 우리 언니 나 없으면 혼자서 어쩌지. 너무 염려스럽다. 스스로 그런 걸 걱정하고 있으니 멋쩍다. 남편에게 나 빨리 마음 한 곳에 묻고 좋은 사람 만나라고 한 마디 하는 게 좋을까. 너무 빨리 새 출발 하면 하늘나라에서 내가 좀 섭섭할 것도 같은데. 엄마와 혜령이를 생각하면 본능적으로 고개가 좌우로 흔들린다. 무섭지만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나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죽음이 덜 무서울 거야. 진심인 이 말을 전해도 부끄럽지 않을 사람들을 떠올리니 괜히 뭉클해진다. 이번 에세이 과제로는 도무지 한 편의 글을 써낼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죽음 하루 전날을 연기하는 어설픈 배우 같다. 아무리 실감 나게 연기해보려 해도 죽음의 문 앞에 가지 않고선 절대로 알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더 있을 것 같다. 사실 죽기 전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떠오른 것은 단 하나였다. 답정너 같아 피하고 싶었지만 머리 싸매고 고민해도 이게 정답 같다.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적인 저녁 시간. 아빠가 좋아하는 회, 엄마가 좋아하는 꼬리곰탕, 아이들이 좋아하는 치킨과 피자, 언니와 내가 좋아하는 칼국수, 오빠를 위한 코젤 다크 맥주를 준비한다. 승우는(남동생) 뭐든 잘 먹으니 꼭 준비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상을 몇 개 나란히 붙여 음식을 차리고 가족들과 둘러앉아 아주 느린 식사 시간을 즐기는 거다. 그리고 다 같이 거실에 가로로 누워서 수다를 떨고 싶다. '무인도에 간다면 가지고 가고 싶은 것 세 가지는 뭐야?" '제일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야?' 같은 물음을 던지고 나이 순서로 대답하기 같은 걸 하고 싶다. 이 행복한 순간이 이제 마지막이라니 아쉬워하면서, 이렇게 행복한 순간이 내 마지막이라는 것에 감사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눈가로 주르륵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잠들고 싶다. 그런 상상에 오히려 흐뭇해지려는데 도로 위로 햇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5000보 밖에 걷지 않았는데 씻고 나온 목 뒤로 땀이 흥건하다. 여름 청바지가 다리에 달라붙을 기세다. 갑자기 한 시간 동안 발걸음을 옮기며 떠올랐던 정돈되지 않은 단상들을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써보는 게 좋겠다란 생각이 어디선가 튀어나온다. 튕겨 달아나기 전에 얼른 핸드폰 메모장에 그 아이디어를 가두려고 고개를 숙이고 양손을 모두 사용해 기록해 둔다. 오래 살려면 길에서 이렇게 핸드폰 하며 걸으면 안 되는데... 앞 똑바로 보고 다녀야 되는데... 이런 생각이 무드 없이 끼어드니 아무리 애써도 실감 나지 않던 죽음이 갑자기 실전처럼 와닿는다. 혜령이를 두고 죽을 순 없지.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건 햇살 속에서 걷는 것처럼 서서히 진이 빠지는 일이지만 그 뜨거움에 딱딱한 마음도 말랑해지는 일인 듯하다. 덥다. 한 코스 남았는데 그냥 버스 탈까. 조금만 더 걸어가 볼까. 산책이 극기훈련이 되기 전에 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겠다.




 건물 안은 시원하다. 서류를 작성하고 번호표를 뽑는다. 내 순서가 금방 돌아온다. 자료를 받아 들고 넘겨보던 구청직원이 남편의 주민번호도 적어 넣어야 한다기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는 동안 직원이 걸려온 전화를 받는다. "네, 재작년에 만든 여권을 취소하고 싶다니요. 자세히 좀 말씀해 보세요." 빈칸을 채워 넣고 서류를 건넸며 전화의 내용을 엿듣는다. 이혼한 아내가 딸을 데리고 외국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고 싶다는 내용이다. 제법 길게 이야기가 오간다. 여권을 아예 만들지 못하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는 민원이에게 몇 가지 준비물을 챙겨 구청으로 방문하라는 안내로 전화가 마무리된다. 직원이 예기치 않게 나를 앞에 두고 기다리게 해서 미안했던가 '요즘엔 복잡한 일들이 많네요.'라는 말을 붙이며 사과를 한다. 죽다 살아난 기분으로 앉아 있던 터라 '류'가 아닌 '유가을'이란 예쁜 이름의 소녀네 집에 닥친 불화에 동정심이 인다. 게일 콜드웰은 '죽음은 이야기를 바꾸어 놓는다. 일방적인 대화체의 오류와 통찰을 수정하고 고쳐 쓴다'라고 했다. 내일 죽는다면 서로에게 조금 더 다정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음 주 금요일에 찾으러 오세요." 안내표와 구여권을 건네받는다. 한정된 시간과 목적지가 분명한 산책처럼 죽음에 대한 상념들도 끝이 난다. 생각의 잔해들을 주섬주섬 주워 담고 햇살이 찬란한 삶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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