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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희 Sep 03. 2023

대화의 기쁨


"왼쪽은 100분 오른쪽은 70분 대기래. 어느 쪽으로 갈까?"

워터 슬라이드 대기줄 앞에서 우리는 망설이고 있었다. 여름날 공휴일의 워터파크는 소장, 대장을 그린 내장기관도처럼 꼬불꼬불한 긴 줄을 어디서든 볼 수 있었다. 입장줄, 코인충전줄, 썬배드 대여줄, 구명조끼 대여줄까지 지나오니 혜령이를 제외한 어른 넷은 이미 조금 지쳐 있었다.

"이제 신나게 놀아보자고"

놀이에 있어선 멈추는 법을 모르는 혜령이의 말에 잠깐 쉬지도 못하고 물놀이 어트랙션을 타러 나선 참이었다.

"일단 짧은 쪽부터 먼저 타자."

기다리는 게 싫었던 우리는 만장일치로 짧은 쪽 대기줄에 동참했다.

행렬은 멈추어 섰다가 두세 걸음 나아갔다. 그들의 일부가 된 우리 역시 별말도 없이 멈추었다가 두세 걸음 나아가길 반복했다. 느린 박자의 가사 없는 음악이 BGM으로 깔린 듯했다.

"다들 뭐 할 때 기분이 제일 좋아져?"

뜬금없는 내 물음이 정적을 깼다.

"나는 항상 좋은데."

역시 복잡한 걸 모르는 혜령이가 일등으로 대답했고 셋은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거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특별히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 말이야. 무언가를 할 때, 아니면 무언가를 하지 않을 때 일수도 있고."

"집에서 샤워하고 에어컨 바람 쐬면서 두 팔 두 다리 벌리고 소파에 깊숙이 기대앉아있을 때가 제일 좋은데."

남편의 말에 나는 ‘좋아하는 거면 자주 해야 하는 거 아냐? 씻는 거 말이야.’ 하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제부 나랑 정말 비슷하네. 나도 일 마치고 편한 옷 갈아입고 좋아하는 드라마 틀어놓고 소파에 누워 있을 때가 제일 좋은데. 여기서 중요한 건 꼭 누워야 한다는 거야.”

소파에 누워 있는 상상이라도 하는 걸까, 언니의 얼굴이 밝아졌다. 현아가 '그럼 이모는 언제 기분이 좋아져' 나를 돌아보며 되물었다.

요즘에 일 마치고 이모부랑 혜령이랑 밤 산책 나 가거든. 집에 다 왔는데 다시 걸으려면 조금 귀찮아지잖아. 근데 혜령이가 과자 가게에 들러서 간식 하나 고르는 재미에 내손을 잡아끌거든. 걷기 목표량 채워야겠기도 하고. 그나마 밤엔 좀 덜 더우니까 ‘그럼 오늘도 걸어볼까’ 하면서 나서는 거지. 태풍 지나간 다음날이었을 거야. 배가 슬슬 고파와서 그날은 핫도그 하나 사 먹으며 돌아오자고 시장 쪽으로 걷기 시작했어. 바람이 진짜 시원하게 불더라. 건조기에서 막 꺼낸 이불처럼 따뜻하지만 습기 하나 없이 포송포송한 그런 바람이었어. 산책의 품격은 바람이 8할을 결정하잖아. 여름밤의 바람치곤 너무나 달콤하더라. 근데 8시 반 정도 되었는데 시장은 이미 파장에 이르렀더라. 핫도그 가게도 불이 꺼졌고 꽈배기나 호떡을 파는 노점들도 태풍의 여파로 장사를 쉰 듯 꽁꽁 싸매어져 한쪽으로 치워져 있었어. 그렇다고 빵집의 빵 같은 건 먹기 싫잖아. 시장에서 사 먹을 수 있는 걸 먹고 싶은 그 마음 알지? 아쉬워하며 발길을 돌리는데 불오뎅집 불이 켜져 있더라. 남아 있는 음식이 있나 보러 내가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어. 어묵이랑 떡볶이가 조금씩 남아 있는 거야. 반가운 마음에 ‘떡볶이 있어.’하고 얼른 오라고 손짓을 했는데 그 소리가 제법 컸나 돌아보는 사람이 있더라. 그렇게 어묵 한 두 개씩 그 자리에서 먹고 떡볶이 1인분 포장해서 살랑살랑 흔들면서 집으로 돌아왔어. 이모부도 일할 때는 항상 늦게 마쳐서 셋이서 평일 밤에 산책할 일이 거의 없었잖아. 마침 혜령이도 방학이라 일찍 재워야 한다는 부담도 없고. '올여름에는 이렇게 셋이서 산책을 할 시간이 생기니까 너무 좋다 너무 좋다' 하면서 남은 오뎅 국물 서로 마시겠다고 장난치면서 올라오는데 이 장면을 동영상 찍은 듯 생생하게 글로 남겨두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 '너무 좋다'는 감탄에서 그치지 않고 이걸 꼭 글로 남겨두고 싶다는 욕심이 들 때가 아, 내가 이 순간을 정말 사랑하고 있구나 확인하게 되고 기분이 좋아져.

바통을 이어받은 듯 현아가 말했다.

"나도 그런 것 같아. 한 번씩 학원에 남아서 엄마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현준이 오면 셋이서 맛있는 걸 시켜 먹거든. 마음이 편하고 기분이 좋아져."

현아의 말을 들은 언니가 ‘그랬나? 나도 나도 그렇다. 맛있는 거 더 많이 사줄게.’ 하며 애교 듬뿍 담긴 목소리로 격하게 현아를 끌어안고 호들갑을 떨었다. 엄마의 과한 표현이 싫지만은 않은 듯 현아도 어색하게 따라 웃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줄은 어느새 많이 줄어 우리는 성실하게 착착 위쪽으로 올라왔고 아래쪽으로는 더 긴 줄이 생겼다. 높은 곳으로 올라 갈수록 더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대화란 흑백 무성영화의 한 장면을 울트라 HD로 변환하는 고성능 잭 같은 것일까. 우리의 목소리는 또렷해지고 얼굴은 선명해졌으며 마음은 밝아졌다. 60여분 만에 정상에 오른 우리는 '아, 아' 외침 몇 번으로 순식간에 땅으로 떨어졌다.

"짧지만 재밌었어. 그렇게 오래 기다린 것 같지도 않아."

"그래? 그럼 다음엔 100분짜리로 가볼까?"

농담 같은 제안에 대답 없이 서로 마주 볼뿐이었다.

“배고프다. 밥부터 먹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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