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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지 Oct 23. 2024

냉장고를 연다는 것

일기의 조각들

오래된 친구의 집에서 한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창밖에 내리던 눈이 비가 되었다.

비가 그치면 집으로 가야지 마음먹었지만 그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친구 Y는 내가 집에 온다고 미리 투뿔 한우를 사두었다고 했다. 나는 술을 좋아하는 친구를 위해 술꾼들에게 추천받은 괜찮은 위스키 한 병을 사 갔다. 내가 먼저 집에 도착했다고 하니 퇴근이 늦어진 Y에게서 카톡이 왔다.


<우리 집에 도착하면 할 일>

1. 냉장고에 마늘, 고추, 버섯 씻어서 잘라둘 것(마늘은 편 썰기)

2. 불판 택배 온 거 씻어두기  

3. 보일러 온돌 모드로 켜두기 (온도 건들지 말 것)


그리고 비밀번호.


나는 서울에 막 상경했던 시절 살았던 높은 언덕 위 낡은 집을 떠올렸다. 무거운 철문이 움직일 때 나는 마찰음과 짤랑 거리는 열쇠 소리가 기억나는 그 집. 한 번은 집에 놀러 온 Y가 볼 것도 없는 좁은 집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살피다가 갑자기 냉장고를 불쑥 열어 봤던 날이 있었다.

나는 정색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남의 집 냉장고 막 여는 거 아니야”


아무리 친한 친구여도 들키고 싶지 않은 무언가가

냉장고 안에, 집 안 어느 곳에,

그리고 내 안에도 숨어 있었겠지.


그때 Y는 대답했다.

“남이지만, 우린 가족 같은 친구잖아”


나는 주인 없는 Y의 집에서 익숙하게 주어진 미션을 해내고 퇴근한 친구를 맞이했다. 우리는 ‘요즘 TV에 볼 게 없다’ 같은 시시콜콜한 얘기들을 하고 ‘역시 소가 맛있네’ ‘투뿔이라 다르네’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열심히 먹고 마셨다. 이 날 만큼은 세상에 대가 없는 소고기 없다는 말이 불판 위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내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다. 내가 (술을 좋아하는) 알쓰라는 사실이다. 50도가 넘는 위스키의 위력은 달달한 진저에일로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나는 기분 좋은 목 넘김에 속아 내 위장이 뒤집어지기 직전까지 술을 마셨던 것이다.


-꿀렁꿀렁


나는 곧바로 화장실로 향했다. 나는 허망하게 투뿔 한우가 위에서 환승도 못하고 입구로 다시 나오는 광경을 봐야만 했다. 술 때문에 속을 비워낸 것은 30대가 된 이후로 처음이라 놀라웠고, 무엇보다도 음식도 술도 같이 먹는 것을 좋아하는 Y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TV 소리를 크게 틀어둔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나는 최대한 조용히 이것들을 처리했다. 그리고 태연히 밖으로 나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마주 앉아 또 시시콜콜한 얘기를 하며 새벽을 보냈다.


배고파서 잠이 깬 건지, 먼저 일어난 나는 싱크대에 쌓인 어제의 흔적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장식장에 반 정도 남아있는 위스키가 보였다.


사실 어제 술은 너 혼자 마신 거야.


(2024.1.3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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