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의 조각들
__에게
저는 시작이 어려운 사람이에요.
이런 말을 하면 다들 놀라시더라고요.
저번에도 윤지 씨는 도대체 취미가 몇 개냐고 손으로 세어보셨잖아요.
그런데 제가 말하는 시작은 그런 게 아니에요.
눈앞에 초콜릿 상자가 있다고 해봐요.
저한테 시작은 이 상자를 열어보는 것부터가 아니라
그 안에 든 초콜릿을 먹을 때부터에요.
그래서 포장지를 살펴보지도 않고
바로 입에 넣어 맛부터 보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면서 한편으론 부러웠어요.
그들의 빠른 판단과 실행력 위에 나를 얹어보면
한참 부족한 내가 보였어요.
나는 왜 이렇게 생각이 많을까.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하고 두려워할까.
저는 뭐든지 느려서 진짜 맛있는 초콜릿을 많이 먹진 못했거든요.
언제 한 번은 눈 딱 감고 손에 잡히는 대로 먹어봤는데 웬걸…
너무 달아서 뱉어버렸어요.
그리고 다신 그 상자 근처에는 얼씬도 안 했었죠.
저는 최근에서야
나의 100%가 저 사람의 100%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어요.
항상 타인의 다름을 존중한다고 입으로는 떠들면서
그 존중이 저를 향하고 있진 않았나 봐요.
그냥 저 사람은 빠르구나, 난 조금 느린데
그렇지만 나에게도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는
초콜릿 상자가 있지! 생각하려고요.
그리고 가끔 찍먹도 하면서 가볍게 살고 싶어요.
당신도 몇 달 전에 뭔가를 배우고 싶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걸 완벽하게 해 낼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시작할 수 없었다고.
저는 그 마음이 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어요.
고르고 고른 한 번을 위해 얼마나 애를 쓰는지,
잘 해내지 못했을 때 되돌려 받는 실망감은 또 얼마나 큰지
그리고 뒤따라 오는 자책까지.
일단 초콜릿을 집어보고 아닌 것 같으면 내려놔도 돼요.
그러니까 우리, 상자 정도는 열어두기로 해요.
(2023.11.5.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