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근한 힘

2025년을 회고하며.

by 이융

요즘 들어 부쩍 한라산에 다시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섯 해 전, 우리는 한라산 등반을 목표로 매달 서울 근교의 산을 오르며 나름의 ‘특훈’을 했었다.

그때 함께했던 C는 어느새 둘째를 품어 육아에 전념하고 있고,

카페 개업 1주년을 맞은 Y는 매일이 노동의 연속이다.

얼마 전 오랜만에 연차를 내고 Y의 카페를 찾았다.

연말에 남은 연차를 몰아 써야 하는데 가고 싶은 곳도, 하고 싶은 일도 없다는 나의 말에

Y는 유럽 가, 베트남 가, 일본 가, 가, 가, 가.

그냥 어디든 좀 가라고 말하는데 그게 꼭 말 앞에 '너라도', '나 대신'을 생략하고 하는 말 같아서

나는 오히려 윤정에게 "또 어디에 가고 싶은건데?"라고 웃으며 되물었다.


올해 나는 농도 짙은 여름과 가을을 보냈다.

작년 9월부터 이어온 디자인 워크숍을 마무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매듭짓기 위해 나는 책 한 권을 만들어 전시해야 했다.

기획부터, 콘텐츠 구성, 원고, 디자인, 인쇄, 전시까지 두 달의 시간이 주어졌다.

먹고사는 일이 아닌데도, 작업이 안 풀리면 괴로워했고, 글을 한 줄도 못 쓰는 날이면

당장 인생이 망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울기도 참 많이 울었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렇게까지 힘들어했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 시기 나는 나의 세계에 완벽하게 몰입해 있었던 것 같다.

특히 9월엔 가용 범위에 있는 모든 시간을 영끌해서 책을 보고 조판하는 일에 매진했다.

평일엔 점심시간마다 회사 근처 남산 도서관에 갔는데, 후암동 언덕을 오를 때마다 더워서

숨이 금방 차오르는 건지, 모든 상황이 벅차서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약속된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불안감은 극도로 상승해 전시 오픈 당일에 도망가거나,

등 뒤에서 누군가 쫓아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매일 서너 시간만 자기 일쑤이니 하루의 질은 늘 엉망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의 어떤 뜨거운 것이 꺼지지 않고 계속 나를 움직이게 했다.


결국 책은 '책처럼' 나왔고, 열흘간의 전시도 무사히 마쳤다.

이 과정을 먼저 겪은 친구가 자신의 책을 두고 '자식같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에게 내 책은 그냥 '나' 같았다.

전시 기간 동안 지금의 내가 테이블 위에 올라가 있다는 생각을 하며,

누군가 내 책을 보고 있을 땐 나를 들춰 보는 것 같아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어느 북 페어에서 볼 법한 멋들어진 책은 아니지만,

어딘가 좀 서툴고 어색하지만, 이게 지금 나의 최선이라고.


지난 주말 L과 인왕산에 갔다. 그간 작업하느라 떨어진 체력이 여실히 느껴졌다.

한라산에 다시 가려면 예전보다 몇 배로 더 연습을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정상에서 L의 어머니가 싸주신 김밥을 나눠먹고, 바위 위에서 한참을 늘어져 있다가

서촌의 한 카페로 내려왔다.


"너는 내년에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어?"

항상 목표 지향적인 친구 L이 물었다.


"글쎄... 그런 거 없는데. 그냥 때마다 내가 하고 싶은 거, 해야 하는 거 하는 거지."


지금 내가 서있는 곳이 오르막이라면 오르는 데 힘이 들 것이고,

평탄한 길에선 당연히 숨을 고를 것이다.

눈 앞에 펼쳐진 길이 무엇이든 주저 앉지 않고 기꺼이 걸어가야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올해 나는 그런 뭉근한 힘을 얻었다.


<책을 처음 만들며 배운 것들>
1. 밤새 못 찾았던 오탈자는 제본을 해야 보인다. 그러니까 괜히 밤새우지 말 것.
2. 종이 한 장의 중량이 책의 인상을 좌우한다. 작은 것들의 힘이다.
3. 원고는 최소 150% 이상 작성해야 한다. 모자라는 것보다 남는 게 낫다. '배부르면 남겨요' 마인드.
4. 이런 것도 책이 될 수 있나요? 된다. 질문하지 말고 써라.
5. 책은 종합 예술이다. 세상의 모든 책들, 그 뒤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존경한다.
작가의 이전글눈앞에 초콜릿 상자가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