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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리다 Dec 22. 2020

밥은 펜보다 강하다

JTBC2 드라마 허쉬에 대한 소고(小考)

공중파 채널 JTBC가 최근 방영하고 있는 드라마 ‘허쉬’에는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역설적으로 기자라는 직업을 선택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겼다. 제작진은 기자 각자의 현실적인 삶과, 기자에 대한 사회의 요구사항 등 양측이 대치되는 점을 그려냄으로써 시청자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기자들의 애환을 그린 JTBC 드라마 허쉬에 등장하는 신입기자들. 출처= JTBC 공식 홈페이지 캡처


기자가 먹고살기 위한 직업으로서 역설적인 이유는, 사인(私人) 신분 이면서도 지역사회로부터 공인(公人)과 같은 직업윤리를 요구받기 때문이다. 기자는 글, 사진, 영상 등 소재를 활용해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들추거나 밝은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써 대중에게 시대상을 알리고 세상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기자는 이 같은 사명을 다하는 동시에 먹고살아야 하는 직장인으로서 비애도 느끼고 있다. 기자가 생계와 사명이라는 두 가치관을 두고 고뇌하는 경우 결국 현실과 타협할 일이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언론인으로서 사회를 감시·비판하는 등 제 역할을 다 못할 수 있다.


기자가 제 기능을 다할 수 없는 주요 사례로 기사를 애초 계획했던 내용대로 송출하지 못하거나 송출된 기사를 삭제하는 경우가 있다. 4년 가까이 기자로 활동하는 동안 가장 많이 경험한 상황이다.

그간 거쳐온 두 경제 전문 매체의 주요 수익원은 민간 기업이었다. 지면, 온라인 홈페이지 배너, 협찬 기사 등을 통해 기업을 홍보해주는 대신 광고 수익을 거둬들이거나 기업을 발행물 구독자로 유치함으로써 매출을 낸다. 다른 일부 유력 매체들은 브랜드 대상, 포럼 등 행사를 열고 기업으로부터 후원금을 받기도 한다. 기업들은 후원사나 수상 기업으로서 이름을 알리는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자의와 타의를 모두 담아 언론사 행사에 돈을 쓴다. 다만 모든 언론사의 행사가 기업 후원을 요구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매체가 기업과 거래관계에 놓일 경우 각 기업을 출입처로 맡은 기자들의 취재 활동은 제한받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매체와 큰 규모의 광고 거래를 매년 이어가고 있는 기업의 내부 부조리에 대한 제보를 받아도 이를 기사화하는 게 어려울 수 있다. 기사를 송출했다가 기업으로부터 “기자님 우리 사이에 왜 그러세요” “이러시면 저희는 별 수 없습니다” 따위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데스크가 기사를 쓰기도 전에 가로막는 경우도 허다하다.


어느 날은 기자의 취재 소재나 방향에 관여할 권한이 마땅히 없는 광고 담당 부서에서 “왜 이런 내용의 기사를 올렸냐”며 특정 기사를 내리라고 촉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결국 그 기사는 포털 사이트나 회사 홈페이지에서 삭제됐고, 제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편집국장은 내게 “미안하다”는 말밖에 남겨주지 못했다.


또 어느 하루는 회사 대표가 특정 기업을 비판하는 기조의 기사를 쓴 채 기사 내리기를 거부한 선배를 두고 “지가 언제부터 그런 기자 정신이 있었다는 거냐”며 분개했다는 전언을 듣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사명감, 직업정신 등 기자가 추구해야 할 가치들은 시시하고 시대 착오적인 개념으로 전락한다. 


이런 언론계 관행은 우후죽순 쏟아져 나온 온라인 매체들 가운데 일부 영세한 언론사들의 수익창출 전략 때문에 더욱 고착됐다. 다만 지난해 말 창궐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는 광고 바꿔먹기용 기사를 양산하는데 혈안이 된 일부 매체들을 솎아낼 명분을 기업들에게 제공하는 모양새다. 일부 기업들은 코로나19로 재무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관계 깊이가 비교적 얕은 언론사들을 대상으로 광고 규모를 축소하거나 배제하고 있다.


결국 기자들은 소속된 언론사의 입지나 출입처와의 이해관계에 따라 저널리즘을 제한적으로 실현할 수밖에 없다. 기자들은 얼마나 충실한 취재를 바탕으로 풍부한 내용의 기사를 쓸 수 있느냐보단, 자극적인 제목과 관점으로 조회수를 얼마나 높일 수 있고 출입처의 광고를 얼마나 끌어낼 수 있는지 여부로 평가받고 있다. 영혼을 끌어 모아 열심히 팔아넘길 줄 아는 ‘소양’이 필요한 셈이다.


드라마 허쉬에 나오는 매일한국 신입 기자인 이지수(윤아 粉)가 자기소개서에 ‘밥은 펜보다 강하다’라고 써 일부 선배들을 개탄하게 만들었음에도 인턴기자에서 수습기자로 임명됐다. 학벌, 필력 등 실력 외에도 언론인으로서 현실감각을 인정받았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구부러지지 않는 펜을 쥐고 있는 기자는 언론사의 컨텐츠 편집 방향 때문에 강제로 펜을 꺾일 뿐 아니라 고용불안까지 경험할 수 있다.


다만 지수가 한참 선배인 한준혁 매일한국 기자(황정민 粉)에게 바득바득 대드는 모습에선 현실의 기자들에게 필요한 일종의 교훈이 엿보인다. 지수는 나성원 매일한국 편집국장(손병호 粉)에겐 별 말없이 고개 숙이면서도, 의지할 만한 선배인 준혁에게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진실에 대해 침묵하지 말라고 호소한다.


기자들은 머리로는 이상적인 저널리즘을 추구하되 눈으로는 지상의 현실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태도로 자기 자리를 지키고 펜촉을 잉크로 적셔놓을 수 있어야만 언젠가 세상을 선에 가까운 모습으로 바꾸는데 기여할 만한 기사를 제때 원하는 내용으로 쓸 수 있다. 이 말은 물론 내가 저널리즘보다 생계가 최우선인 기자이기 때문에 쉽게 할 수 있는 말이다.


* 드라마 허쉬의 허와 실

드라마 허쉬의 본방송을 챙겨보진 않았고 재방송할 때 회차별 중간쯤부터 이어지는 영상을 봤다. 지난 19일 방영된 4회까지 봤기 때문에 이야기의 전체적인 흐름은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다. 현직 기자가 쓴 소설을 원작으로 제작된 드라마이다 보니 공감되는 부분이 있는 반면 현실에선 더 다양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장면이 눈에 띄었다.


- 디지털 뉴스부는 유배지 또는 회사 출구 : 디지털 뉴스부는 현실에서 온라인뉴스팀, 이슈대응팀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해당 부서에 소속된 기자들은 특별히 맡은 출입처(기업, 부처 등)나 분야 없이 가십거리나 포털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상위 순위에 오른 키워드를 소재로 기사를 쓴다. 누리꾼들이 해당 기사 페이지에 접속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언론사 공식 사이트 접속 건수를 높여 회사 주목도를 높이려는 취지다.

기자가 해당 팀에 배정되는 것은 출입처나 언론사들에게 실력없는 기자로 낙인찍히는 일이기 때문에 개인 경력에 특별히 이로울 게 없다. 또 드라마에선 디지털 뉴스부에서 다시 특정 출입처의 기자로 ‘되돌아 갈’ 여지가 존재하지만, 내가 목격한 현실의 디지털 뉴스부는 사실상 기자들을 제 발로 회사에서 나가게 만드는 수단이다.

다만 다니던 회사에서 비슷한 조직에 배정받은 채 끝까지 버티는 선배를 봤다. 경영진의 총애를 받던 그는 급여 문제, 인간관계 등 문제로 사측과 멀어진 뒤 몰락했다. 이미 업계에 그의 악명이 퍼진 뒤라, 그 회사 말곤 그를 받아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주위 동료들로부터 존경심을 잃은 그를 지지하는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


- 기자는 출입처들로부터 각종 선물을 받기도 한다 : 디지털뉴스부 이재은 기자(백주희 粉)는 과거 출입했던 기업의 홍보실 직원으로 추정되는 인물을 수시로 만나 밥을 얻어먹거나 해당 기업의 제품들을 선물로 제공받는다. 생필품, 식음료, 주류, 화장품, 약품 등 주로 경박단소 품목을 취급하는 기업에 출입하는 기자들이 다양한 선물을 받을 수 있다. 해당 분야 출입기자들이 출입처를 옮기고 싶어 하지 않는 이유 가운데 하나로 지목된다.

하지만 이재은 기자처럼 거의 모든 살림살이를 선물로 채우는 것은 옛날 일이 된 것으로 안다. 지난 2016년 시행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이 분위기를 바꾸는데 일조했다. 드라마 속 시점은 지난 2019년이다.

기자들은 현재 김영란법에 따라 직무 관련자인 출입처로부터 음식물(식사 약속 포함) 3만원 이하, 선물 5만원 이하 등 품목별 금품을 받을 경우 벌금, 과태료 등 처벌을 받을 수 있다. 다만 원활한 직무수행, 사교·의례·부조 등 목적으로 받는 경우에 한해 허용 된다. 이 같은 목적들은 부정청탁, 대가성 금품 제공 등 김영란법 제재 대상과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언론계, 정계 등 관련 업계에 여전히 논란의 불씨를 남기고 있다.


- 오수연 인턴 기자의 학벌 고충은 현실에도 존재한다 : 조·중·동 등으로 불리는 유력 종합 일간지를 비롯해 영향력 있는 국내 언론사들에 입사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우 어렵다. 입사하기 어려운 이유 가운데 하나로 주요 대학 출신을 선호하는 풍조가 꼽힌다. 언론을 감시하는 언론을 표방하는 미디어오늘의 2018년 보도에 따르면 2000~2017년 기간 선발된 서울대·고려대·연세대(SKY) 등 3개 대학 출신 지원자가 187명(81%)에 달했다. 조선일보는 서울대 학생을 선호해 특정 학과에 직접 연락해 우수한 학생을 기자로 데려가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서울 시내 대학을 나온 지원자들이 우수한 역량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지방 대학 출신 지원자보다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있음을 방증하는 현상이다. 

초고속 인터넷망을 바탕으로 일어난 정보기술(IT) 붐을 계기로 온라인 매체가 우후죽순 생겨났기 때문에 최근엔 기자 명함을 얻는 게 쉬워진 게 사실이다. 나도 지방 거점 국립대 출신이다. 오수연 매일한국 인턴기자도 마음만 먹으면 아무 언론사에 입사해 기자 명함을 들고 다닐 수 있었다. 드라마 설정이긴 하지만 정규직 기자가 될 수 없을 것이란 절망감에 극단적 선택을 한 건 너무나 애석한 일이다. 그가 무조건 유력 언론사에서 기자 활동을 하려는 목표를 세웠다면 다른 얘기겠지만 말이다.  

다만 중소규모 언론사에 입사한 뒤 실력을 인정받아 더욱 인지도 높은 매체로 이직(점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출입처인 민간 기업들도 신생 매체를 ‘뉴미디어’ 등 이름으로 분류해 관리하고 언론사 입지에 따라 소속 기자들을 차별 대우하기 때문에 덜 알려진 매체에 입사한 기자일수록 자괴감을 느낄 수 있다.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삼환빌딩. 드라마 허쉬에 나오는 매일한국의 사옥으로 등장한다.

- 매일한국은 현실의 어느 언론사를 모티브로 삼았을까 : 드라마 속 매일한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대부분 현실의 국내 언론사에서도 벌어지는 일이다. 제작진이 드라마 설정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특정 언론사를 분석했다고 밝힐 리도 없다. 다만 드라마에 관련된 요소들에서 현실 언론사와 관련된 실마리를 찾는 재미 정도는 느낄 수 있다.

허쉬의 원작소설인 ‘침묵주의보’는 정진영 문화일보 기자의 작품이다. 준혁이 매일한국 홍보영상에 등장해 보여주는 제스처나 들려주는 대사 등은 과거 경향신문 홍보 영상을 모방한 것으로 알려졌다. 드라마 속 매일한국 사옥으로 나오는 건물은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위치한 삼환빌딩이다. 특정 언론사가 해당 건물에 입주하진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근처에 위치한 언론사로는 바로 옆 가든타워에 경제주간지 이코노믹리뷰가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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