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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코색담요 Aug 02. 2021

사적인 시간을 공유하는 너그러움

배우 유아인

그를 실물로 대면한 건 15년 전 쯤으로 기억한다. 

노동석 감독의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언론시사회 날이었는데, 상영 전 극장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다. 전작 드라마 <반올림>에서 대중에게 처음 얼굴을 알리긴 했어도 난 그 드라마의 시청자가 아니었던 터라 눈 뜬 장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보인 곱상한 청년이 배우인 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유난히 뽀얀 피부와 깊은 눈빛에 자꾸 눈길이 갈 뿐이었다. 

영화를 관람하며 느낀 점과 줄거리는 기억 저편에 안개처럼 뿌옇게 흩어져 있다. 한 가지 또렷한 기억은 스크린 속 '종대'를 만나고 나서야 조금 전 마주친 남자의 정체를 알아차렸던 순간이다. '귀공자처럼 생긴 그 남자가 이번 영화의 주인공이였구나. 신인인데 연기가 굉장히 안정적이네.' 이 배우에겐 마음과 얼굴을 연결하는 혈관이 따로 있기라도 한 듯 감정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섬세한 표정을 보면서 내멋대로 이 배우의 미래를 점쳤었다.

'유행이나 인기에 편승하지 않고 꾸준히 사랑받을 연기파 배우!'


엘리베이터에서의 첫 만남 후 12년 정도 지난 어느 날, 그러니까 3년 전쯤 그와 두번째로 마주쳤다. 

신기하게 첫 만남과 패턴이 똑같았다. 생각지 못한 순간의 우연한 마주침. 서울 한남동에 위치한 갤러리 겸 카페 #스튜디오콘트리트 에서였다. 그곳이 배우 유아인이 친구들과 운영하는 문화공간이라는 건 알았지만 10년새 톱스타 반열에 오른 그가 손님 많을 오후 시간대에 무방비 상태로 카페에 있을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하겠는가. 

그를 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은 일절 없었다. 근처에서 취재를 끝낸 후 그저 한숨 돌릴 겸 들른 참이었다. 3층 옥상에서 커피를 한잔 마시고 돌아가려고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중이었다. 2층으로 이어진 계단을 거의 다 내려왔을 즈음, 앞으로 휙 지나가는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찰나였지만 배우 유아인이라는 걸 이번엔 단숨에 알아챘다. 


10년 전과는 여러 조건이 달라진 상황이었다. 다소 상기된 얼굴로 데뷔작과 자신이 맡은 역할을 소개하던 신인배우는 출연작마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스타가 되어 있었고, 긴장감에 머릿속이 하얘져 질문요지를 날려먹곤 하던 초짜배기 기자는 인터뷰이와 농담 따먹기를  할 정도로 능글맞아진 10년차 기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가 두번째로 마주친 곳이 언론시사회 같은 공적인 자리가 아닌,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라는 점이 내 용기를 북돋았다. 한 마디로, 눈앞으로 걸어들어온 스타를 오래 전그날처럼 허무하게 스쳐보내기엔 내 붙임성이 한껏 업그레이드된 상태였다.


눈앞으로 지나쳐간 배우 유아인은 2층 한편에 마련된 벤치에 혼자 앉았다. 이윽고 담배 한 개비에 막 불을 붙인 타이밍에 그의 시야 속으로 걸어들어갔다.

"배우 님, 팬이에요. 같이 사진 한 번 찍어주실 수 있을까요?"

촬영스케줄을 마치고 한 숨 돌리려던 참일 수도 있었고, 카페 스태프들과 업무를 보다가 잠시 혼자만의 여유를 가지려던 순간일지도 몰랐다. 그것도 아니면 본격적으로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갖는 워밍업 단계였을지도... 어찌 됐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잠깐 쉬고 싶은 시간이라는 게 그의 수수한 옷차림과 편히 담배를 쥐고 있는 손이 말해주고 있었다. 아무리 '팬'이라 포장했어도 난 안온한 시간에 불쑥 나타난 불청객일 뿐일테니 거절당할 것을 각오하고 던진 인사였다.


하지만 그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허락을 넘어 친절, 아니 친절을 넘어 친근함까지 느껴졌다. 담배를 서둘러 끄면서 공중에서 손을 휘휘 저어 연기를 물리친 다음, '파' 음 정도의 경쾌한 톤으로 대답했다. 

"네, 그럼요. 물론이죠!"

마음놓고 그의 옆에 앉은 나는 밝은 목소리 톤에 한번 더 용기 내어 스마트폰 카메라를 실행시키며 '안물안궁'한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제가 잡지 기자거든요. 평소에 배우님 연기 잘 보고 있었어요."

"아, 그래요? 어느 잡지요?"

"패션지는 아니고 작은 잡지사라 아마 모르실 거예요. 인터뷰 섭외도 한 번 드렸었는데.."

"아~ 그러셨어요? 기회 되면 인터뷰 자리도 가지면 좋겠네요."

내 기억속에서 한껏 미화된 대화내용일지 모르나, 낯선 불청객의 수다에 일일이 대꾸하며 흥미를 표했던 것만은 확실하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셀카를 찍기 위해 약 45도가 되게끔 스마트폰을 번쩍 들자, 그는 웃으며 "제가 찍을게요" 하더니 스마트폰을 받아들고는 버튼을 눌렀다. 찰칵. 그러고는 뒤돌아 앉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이쪽 벽돌 배경으로 해야 더 잘 나와요. 이렇게도 찍어요."

그렇게 순둥순둥한 인기배우와 짧은 대화와 사진촬영을 마치고 나는 친구라도 되는 양 사람 좋은 표정으로 그와 손흔들며 헤어졌다.


요즘 같은 비대면 시대에 사람들은 점점 개인의 공간과 시간 속으로 파묻혀 들어간다. 자신의 영역을 조금이라도 침범하려는 이가 생기면 태도가 날카로워지고 신경이 예민해진다. 나만 해도 혼자 독서하거나 영화 보며 쉬는 시간에 울리는 전화가 반갑지 않아진 지 오래 되었고, 언제 어디서든 타인과의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신경도 바짝바짝 곤두선다. 공공장소에서 조금이라도 큰소리로 전화통화를 하거나 재채기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소심하게 눈 한번 흘기는 것이 몹쓸 버릇이 되었다.

물론 그를 만난 3년 전은 사람을 기피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바이러스 따위는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지만 바이러스 만큼 영향력 강한 피곤, 스트레스, 고민거리가 그에게 있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수 년이 지난 일화이지만, 온전한 개인 시간을 흔쾌히 컨택트해준 톱배우의 너그러움을 언컨택트 시대에 종종 회상하곤 한다. 언컨택트 시대가 끝나는 훗날, 사람답게 사는 세상으로 만들어줄 미덕은 넓은 아량일 것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속 신인 유아인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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