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 바인스 Oct 02. 2020

Prologue

부동자세로 깨닫다.

아내의 부재에 익숙해져야 한다


얼마 전지는 상상치도 못했던 일이지만,

이젠 아니다.

각오를 단단히 한다.

아내 없으니,
너무도 당연하게 모든 집안일을 내가 직접 해야만 한다.


쓰으으압....

헛기합을 넣는 소리.


음...
어떤 게 있을까?

그래,  우선 세탁물을 잘 분리해서 세탁소에 맡보기로...

쉽다.

세탁소 총각은 부르면 온다.


세탁업체의 앱을 깔고는 지정한 시간에 부르기만 하면 된다.

첫 가입 축하 쿠폰을 사용했으니 삼천 원 할인 혜택까지...

물론 아내 같으면 속옷 정도야 직접 세탁기에 넣고 빨았겠지만,  그건 아내의 스타일일 뿐.
나는 양말을 빼곤 모두 맡기기로 한다.

이거야말로 내 스타일.


세탁물 수거하러 와서 속옷까지 맡기려는 나를 보곤 당황해탁소 총각의 표정 변화가 무척 다채롭다.

그냥 가도 될 것을 결국 한 마디 놓고 간다.


- 이 댁 사모님은 어디 가셨나 봐요?

부르면 오기에, 가랄 때 갈 줄 알았는데

눈치가 없다.


다음은 저녁 준비.
잘 정돈된 냉장고의 맨 아래칸을 연다.

아내는 이런 것까지 굳이 깔끔 떨면서 정리를 놓는 성격이다.

채소들이 서로 닿아 뭉개지지 않도록 가지런히 도 놓여있다.


감자와 파 그리고 또... 양파.
메뉴는 된장찌개다.

당연히 두부도 한 모.

먼저 멸치 몇 개를 꺼내 뚝배기에 넣고 가스불을 다.

순조롭다.
제법 그럴싸한 모양으로 채소를 썰어 넣고는 된장 두 스푼,
아니.... 음....
세 스푼을 푸짐하게  퍼넣고 풀어준다.
나는 진하고 걸쭉한 국물의 된장찌개를 좋아한다.

아...

근데 짜다.
물이 더 필요하다.
그래도 짜다.
그리고 비리다.

결국 깜짝하고 멸치를 건져내지 않아 본의 아니게 '통멸치 강된장찌개'가 되어버린 찌개를 몇 술 떠서 밥을 비벼먹고서야 식사를 마친다.

짠맛에 얼얼해진 혀를 다독이느라
정수기 물을 거푸 마셨더니 밥을 몇 술 뜨지 않았는데도 배가 부르다.

아내와 함께 하는
저녁 식사 후였다면 훗~
나는 애써 숙면에 좋다는 카모마일 허브티를 마셔야 했겠지.
사실 난 허브티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러므로 오늘 밤 나의 선택은
에스프레소, 하고도 투샷.

곁에 있다면
"자야 할 밤에 무슨 커피예요?"
하면서 눈꼬리가 올라가는 아내의 잔소리와 정면승부를 해야 했겠지.

당당하게 커피머신에 캡슐 두 개를 차례로 끼워 넣고는 에스프레소 메뉴 버튼을 누른다.
정말 좋다.
이거야 말로 만주의를 추구하던 빅토르 위고가 원하던 삶이다.

내내 콧노래를 해대며
집안을 서성거리는 나를 돌미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쳐다본다.

아이를 갖지 못한 우리 부부가
적적한 마음에 입양한 대형견 이름이
돌미.


- 어이, 이재는 너랑 나랑 둘만 사는 거야. 알았지?


돌미의 고개가 왼쪽으로 살짝,

갸우뚱한다.

딱히 눈에 들어오는 TV 프로그램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늦은 퇴근 탓에 저녁 먹고 나니 벌써 11시가 훌쩍.

자야 한다.
누웠다.
자야만, 한다.
...
그런데.
잠이 오지 않는다.

꽤 오랜 시간을 뒤척이던 끝에 불면의 원인을 알아낸다.

스탠드 조명.

너무 밝다.

- 그러게... 내가 조도가 조절되는 조명으로 사자고 분명히 말했는데 말이야... 아이씨.... 정말 짜증 나네.


누가 듣지 않아 답도 들을 수 없는 짜증을 혼자 바닥으로 내동댕이 치고는, 냉큼 일어나 조명을 끈다.


나의 불면의 이유가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곧 죽어도,
에스프레소 커피 탓은 아니야 한다.

네가 한 결정에 후회하기 싫다.

그건 내 스타일이 아니므로..

여전한 불면.

결국 한 번도 침대 위를 허락한 적 없었던  돌미를 안방으로 부른다.

- 돌미야~ 돌미야~ 같이 자아~자~~~

부르는 소리에 문 앞까지 얼굴을 내밀던 돌미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돌미의 자리는 아내가 거실에 마련해 준 커다란 쿠션 위다.


내 스타일대로...


큰일이다.
창 밖이 환해지도록 자버린 늦잠 탓.

잠시, 잠깐.
나를 깨우지 않은 아내가 원망스러웠지만, 곧 쓸데없는 짓이라는 걸 깨닫는다.
아내는 없다.

허둥지둥 씻고,
허둥지둥 어제 벗어 둔 옷을 다시 주워 입고,
엘리베이터를 탄다.

나의 한 손에는 평소처럼  따뜻한 우유가 담긴 텀블러 대신 걸치다만 코트가 들려있다.


아차, 자동차 키.

다시 집으로 간다.

콧잔등에 땀이 맺힌다.

뭘 했다고 숨까지 차다.
34층에서 지하 2층까지 내려가는 엘리제이터 안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건 나 혼자다.

도대체 뭘 했다고 말이지.

- 어서, 빨리 좀 가자.

애꿎은 엘리베이터에게 복장을 뜯고 있는 소릴 해봤자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부동자세가 된다.


- 차렷! 움직이지 말 것!


아내의 지정주차구역이 보인다.
바꿀 때도 되지 않았냐며, 수리비가 더 들겠다고, 매번 장모님께 한소리를 듣고야 마는... 그러면서도 아직은 탈만 하다고 아내가 우겨대던...
구닥다리 소나타가 보이지 않는다.


그 옆에 이젠 우리 집의 두 개 주차공간을 마음껏 써도 된다면서 어제 아무렇게나 주차시켜 놓은 나의 반들반들한 외제차가 차선을 물고 서 있다.


아내만 없는 게 아니고,

아내의 차도 없다.

부동자세로 차렷! 을 한 채.

한참을 허공을 향해 요동치는 시선을 던진다.

부동자세로 차렷!

눈알은 허둥지둥,

허리는 구부정,

그리고는 목구멍에서 희한한 소리가 기어 나온다.


- 으어어어, 아아아 으어억

물기 때문에 시야가 흐려고 나서야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목구멍에 짠 물기가 차오른다.


- 어어엉, 어어엉.


아끼는 스트라이프 셔츠 소매 눈물을 닦아야 한다.

아내의 구닥다리 소나타가 없는데 손수건이 있을 리 있나.
눈물, 콧물을 훔치고

비린 목구멍으로 침을 삼키면서
더욱 크게 눈을 끔뻑이며 찾아보아도,

없는 건 없다.

속옷은 맡기지 말 걸 그랬나?
찌개가 너무 짰나? 왜 이렇게 목이 마르지?
조명을 끄는 바람에 늦잠을 잔 걸까?
오늘은 토요일이라 출근 안 해도 그만인데.
이 놈의 휴대폰은 또 어딜 간 거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