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제이 바인스 Oct 15. 2020

1973, 고잉 홈

싱글라이딩

가을.
조금 늦은 가을.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적절하게 흐드러진 가로수 사이를 빠져나온다.
지하주차장 램프를 돌아 1층 입구.
아직 쓸어내지 않은 단풍과 은행잎들이 곱게 보도블럭을 덮고 있다.

얼마 전 새로 오픈한 브런치 카페가 있고,
그 옆.
늦가을 장거리 운전에 필수인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사야할 곳, 헬싱키 카페.

핀란드를 한 번 가본적이 있다.
난 이 카페의 어느 구석이 핀란드의 헬싱키를 떠오르게 하는지는 모르고 있다.
차를 보도블럭 옆에 세운다.
유리창으로 보이는 매니저의 손 인사.

'아.메.리.카.노?'

내가 무얼 주문할지 그는 이미 알고 있다.
나 역시 그와 같이 입모양을 둥글게 말아 묵음으로,
오케이...

잠시 담배를 꺼내물고,
카페거리에 난분분하게 내려앉은 낙엽을 본다.
벌써 15년째 같은 계절에 만나는 은행과 단풍의 장관은 질리는 법이 없다.
붉고 샛노란 아크릴 물감으로 그려진 추상화.
진부하지만 바로 그것이다.

커피 한잔을 손에 든 매니저가 밖으로 나온다.
뒷좌석에 실려있는 짐 몇 가지를 본 매니저가 묻는다.

- 어딜 가요?
- 네, 집에 내려가요?
- 아주?
- 아니, 잠시.

글쎄, 잠시라는 표현이 주는 막연함을 매니저도 알아차렸을까.
잠시 다녀오는 길이 아니길.
조수석에서 반갑게 웃고 있는 산이와 매니저가 인사를 나누는 걸 잠시 기다렸다가,
출발.

백궁교를 넘을 때 탄천 반려견 놀이터에 나와있는 산의 단짝, 진도견 보은이가 보인다.
보은인 지금도 탄천 징검다리 방향으로 눈을 돌린 채 앉아있다.
아마 산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
하루 중, 이 시간은 산과 보은이가 함께 뛰어노는 시간이다.

늦었다.
그냥 가기로 한다.

수내를 통과해 현대백화점 앞을 지나면 판교 IC로 바로 진입할 수 있는 고가도로.
한창 어둠이 농익은 경부고속도로이다.

- 출발했냐?
- 네, 조금 전에.
- 밤길 조심하고 천천히 와라.
- 아버진요?
- 방에서 테레비.

당분간 경주집에서 있기로 했다.
퇴원하고 몸이 쇠약해진 탓도 있겠지만 어머니의 반대가 심하셨다. 제이야 넌, 그 집에 다시 못간다. 가면 안된다. 하시며 완강하게 반대하신다.
나도 사실 그곳에 혼자 있기 싫다.
적어도 당분간은...

기흥과 동탄 IC를 지나 오산.
유경이의 본가가 있는 곳이다. 괜한 마음에 반대편 도로를 바라보게 된다. 크루즈 컨트롤의 속도를 조금 더 붙여 빠르게 지난다. 다행히 자동차가 많지 않은 시간이다.

산이는 벌써 조수석에서 곤하게 잠이 들었다.
식어버린 커피도 나쁘지 않다.
그런 김에 한 모금.

아차.
중요한 걸 빠뜨렸다.
천안까지 내려왔으면서도 다시 돌아가야 하는지를 고민될 만큼 중요한 것.

아버지 등산화.

낡아서 뒤축이 허물어진 등산화가 신경쓰여 일부러 죽전까지 내려가서 꽤 오랜 고심 끝에 골랐던 등산화.

다시 살 순 없고.
매주 수요일에 오시는 도우미 아주머니께 전화를 해 택배로 보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드라이브.
그것도 어둡고 늦은 밤에 익숙한 도로를 달리는 건 나쁘지 않다.
누군가의 입버릇처럼
'Not bad'

담배와 커피
그리고 산이도 좋아하는 '샤데이(Sade)'가
작절한 속도감으로 나를 따라 흐른다.


낫 배드


사표를 냈더니, 휴가를 받아준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나는 직장으로 복귀할 마음이 없고,
이전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집으로 돌아가,
'울 엄마가 해주는 김치찌개와 갈비찜'을 먹으면서
좀 더 널브러지고 싶은 시간.
이 길의 끝에 그 시간들이 있다.
그걸 회복의 시간이라 해두자.

난 이제 그거면 되는 인간이 되었다.

가끔 고등학교 친구인 재만이와 종훈이 그리고 용욱이를 보기도 할테지.

그리고 묻겠지.
제수씬 잘있냐고.
난 대답하겠지.
얼마 전 이혼했다고.

재만이 셩격엔 분명 이혼이 대수냐고 할테고,
종훈이 성격엔 이혼이 대수라고 할거다.
용욱인... 그냥 가만히 듣고만 있으려나?

난 그런 녀석들과
감포 앞바다에 낚시나 가고싶다.

어느덧 동대구를 지나,
건천.

곧 경주IC.

오른손을 뻗어
산의 머리를 괜히 쓰다듬는다.
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가늘게 눈을 뜨고는 나를 바라본다.

아빠 괜찮아?

매거진의 이전글 Hey Michelle,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