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만 한가?
글쎄요, 라고 해야겠지. 아직은 말이야.
잠이 어렴풋이 들었었나 보다.
아직 한낮인데.
경주에 도착해서는 이렇게 게을러지기만 하는 시간들이 온전히 가득하다. 싫진 않다.
개으른 모습으로 침대에 누운 채 창문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가리느라 이마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 생각, 또 잡념.
일 그리고 직장, 이제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며칠 전부턴 업무 관련 연락도 없는 걸 보니 후임인 박 책임이 잘하고 있나 보다 싶다.
운동, 지금은 체력과 건강의 회복이라는 핑계로 검도니 승마니, 모두 잊기로 한다.
그리고 또...
크흑, 갑자기 웃음이 터진다.
내가 떠나온 그곳에서의 삶이 이렇게 쉽고도 단순하게 정리가 되었다는 생각. 삶의 전부라고 라고 생각했던, 아니 착각했던 그것들은 모두 전화 몇 통과 건강하라 또 만나자, 따위의 안부인사 몇 번으로 모두 잊을 만한 것들이 되었다.
잠은 이래서 좋다.
효과적인 망각을 돕는다.
- 야 이놈의 지지배!
어딘가에서 들리는 어머니 목소리.
그런 소리는 온 집안을 따스하게 하는 채움이 있다. 분명 산이와 입씨름하시는 중일 게다.
창가로 가 마당을 내려다본다. 어머니가 아끼시는 텃밭 한가운데서 산이 구덩이를 파고 있다.
부지깽이라도 들어야 할 일인데 어머닌 그저 허릴 펴고 산에게 삿대질만 연신. 사실 어머니도 싫지 않으신 거다. 어머니에게 산은 막내딸 같은 존재다. 그저 깨알 맞고 즐겁다.
창문을 열자 , 어머니가 올려다보신다. 산도 마찬가지... 챙이 있는 모자 사이에 쾡하게 움푹한 어머니의 눈과 마주친다.
- 왜? 더 안 자고?
딱히 할 얘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어머니와 나, 그리고 산의 사이에 있는 창문을 걷어내고 싶었을 뿐.
- 아버진요?
적당한 마음으로 적당한 질문을 한다.
- 읍내 나가셨다. 저녁 전엔 오시겠지. 밥 줄까?
크흑, 다시 웃음이 터진다.
집 나가 사는 세상 모든 아들은 굶고 다니는 줄 아시는 듯하다. 적어도 나의 어머닌 그렇다.
이제 3시, 때 맞춰 점심을 먹었었다.
산이 겁도 없이 텃밭을 가로지른다.
아주심기를 해놓은 양파 가마니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르밟는다. 역시나 어머니의 대거리가 날아든다.
- 저, 가시나 저거 저거.
산과 산책을 나온 뒤 돌아본 시골집이 많이 낡아있다. 비올 때마다 질퍽거리는 마당 때문에 콘크리트를 멋없이 발라놓은 마당 하며, 엉성하게 푸른색으로 덧칠해놓은 대문에서도 기름칠하지 않아 거 덕대는 쇳소리가 거슬린다.
그나마 붉은 벽돌로 지어져 튼튼하긴 하겠다만, 영 예전만 못한 모습이다.
퇴직금을 받아서 어머니가 소원하시는 잔디 깔린 아담한 전원주택을 짓기로 했다.
그 덕에 난 요즘 효자라는 소문을 동네 어르신께 종종 듣는다.
시골의 늦가을 한낮 오후는 고요하다.
아니 적막할 지경이다.
조금은 쌀쌀해진 공기가 움직임 하나 없이 그 자리에서 멈춰있고 귀가 가려울 정도의 풀잎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어찬다. 다른 귀찮은 소리가 사라지는 순간이다.
작은 개울을 따라 신작로를 거의 십 여분을 걸어야 비로소 이웃집이 나온다.
꽤 그럴싸한 파란색 대문이 서 있고 마당이 깊은 집.
이장님 댁이다.
산과 어느새 친구가 된 봉구가 대문 건너편에서 짓기 시작한다. 그래도 산은 관심이 없다. 아니 관심 없는 척하는 거지. 봉구는 수컷이니까.
얕은 경사를 따라 좀 더 걸어내려 간다.
구부정하고 널찍한 어깨가 보인다. 이장님이 신작로와 도로가 만나는 동네 어귀에서 막힌 농수로를 뚫고 계셨나 보다.
- 도와드려요?
봉구가 짓는 소리에 이쪽을 보고 계시던 이장님이 웃는 낯으로 한소리 하신다.
- 그랬다가 곽 여사한테 무슨 소릴 들으려고? 됐다 고마.
곽 여사가 우리 어머니다.
내가 쭈그리고 길 섶에 앉으니, 산도 내 옆에 앉는다.
- 어째, 살 만 하제?
글쎄요, 라는 말을 속으로만 삼킨다. 이장님도 알고 계시는 눈치. 머쓱해진 기분에 기어이 농로에 다리를 걸치고 삽을 찾아들었다.
- 우리 집엔 가시나들만 셋이라... 니 같은 허우대 하나 있었으면 좋았을 긴데.
이장님의 단골 멘트다. 은경, 은주, 은희...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다만 왠지 친근하다. 술 한잔 하러 집에 오시면 이장님은 그저 딸 자랑, 사위 자랑 그리고 손주 자랑이시다. 그 가시나(?)들에게 절대 이런 삽자루를 들게 하실 분이 아니다.
농수로에 박힌 커다란 돌덩이 몇 개를 들어내고, 흉하게 자란 때를 얼마큼 뽑아내고 나서야 수로가 정돈이 된다. 물꼬가 트였다.
이장님과 만족스러운 눈빛을 주고받는다.
허우대가 어떤진 모르겠지만 나름 제 몫으로 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긴다.
한편으론 말 못 하게 편안하다가도,
또 말 못 하는 거리감으로 충만한 이곳.
멀리서 봉구가 산을 부르는 소리가 다시 들린다.
산도 이제는 답을 한다.
멍멍, 멍멍
땀이 조금 나면서,
생각이 솟는다.
나는 조금 전에,
살만 하다는 느낌이 든 것 같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