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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이 바인스 Oct 22. 2020

Prologue

글쓰기, 그 깊고 긴 호흡의 여정

쭈뼛거리며 서가를 들어다.
다들 나이가 어려 보인다. 저 찬구는 30대 초중반? 저 친구는 아직 20대겠구나. 갓 마흔이 된 장년답게 모임의 사람들의 나이부터 가늠해본다.

- 박 XX입니다. 어서 와 앉으세요.

한눈에 봐도 경륜과 내공으로 똘똘 뭉친 분이 나를 반긴다. 전화로 상담을 해주신 박 작가님라는 걸 대뜸 알아챌 수 있다.


,

평소 생각만 해오던 소설 쓰기를 이제 시작하려 한다. 늘 기술논문과 보고서, 그리고 현란한 그림과 도표로 이루어진 PPT 슬라이드와는 다른 순수 텍스트로 이루어진 감성과 감각의 세계 한 발을 내딛는 순간이다.

자, 그럼 나도 드디어 작가가 될 수 있는 건가?




막연한 용기와 구체적인 두려움이 뒤섞인 시간들이 지났다. 나의 소설 쓰기는 순탄치도, 그렇다고 좌절의 연속도 아닌 무념무상의 시간들이었다. 그저 시키는대로 할 뿐. 나의 감성이 개입하기엔 너무도 초라한 필력의 한계를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6개월 간의 퇴근 후 소설 쓰기 과정을 끝냈다.

같이 듣던 동료들 중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거나 국문학과를 졸업한 친구들이 먼저 등단을 했다. 신춘문예와 어느 문예자의 신인문학상 등등 박수를 치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와중에도 한편으로는 부러움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처음으로 공대를 졸업한 내가 미워질 지경이다.

그때가 벌써 8년 전.
함께 소설을 쓰던 동료 10인 중 총 5명의 동료가 중도에 소설 쓰기를 포기했다.
아니, 포기하기보단 잠정적인 중단이라고 하는 편이 낫겠다.
육아, 직장 혹은 결혼을 이유로 잠시 글 쓰는 걸 미루겠다고 했었다. 아직 한 번도 육아를 해본 적은 없지만 그 노고를 들어 알고 있던 나는 그들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섣불리 말리지 않았다. 꼭 다시 글을 쓰고 작가에 도전할 것이라고 다짐을 하며 떠나는 그들의 등 뒤가 새삼 무거워 보였기 때문었다.

나머지 다섯.
나를 제외하고 모두 공모전 등단에 성공하고 이제는 소설집과 제법 탄탄한 문예지에 기고를 하는 작가들이 되어있다.

며칠 전 출판사와의 출간 소식이 있기 전까지 나는 우리 붕 가장 마지막까지 작가라는 타이틀을 가지지 못한 셈이다.

그렇다면, 바빴?

아니다. 아마 그 사간 동안 다섯 명 중에 가장 여유롭고도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것이 나라고 감히 장담할 수 있다.
글을 쓰는 것을 멈춘 적도, 그렇다고 심리적인 부담으로 글을 쓰는 것을 멈춰 본 적도 없다.

그렇다면, 왜?

사실 현대문학 신인추천을 받아 공모전에 도전한 적이 있다. 최종심에서 탈락. 이유는 하필 최종심에 나와 람께 오른 작가가 그 해 내내 화제를 몰고 다니며 괴물 순수문학 신인이라고 평을 받는 막강한 필력을 가진 작가라니...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게 실력이란 말이지.

그 후 공모전보단 글 자체에 더욱 신경을 쓰고있다.  선생님의 서가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기도 하면서 산만한 소설과 에세이를 쓰고 또 썼다.

- 공모전에 다시 도전 안 하세요?

선생님의 질문에 그다지 솔직하지 못한 답을 야했다.
다음에 낼 땐 꼭 수상을 하고 싶어서요, 라는 말씀을 건넸더니 그냥 웃고 마시는 분이셨다.




글은 저절로, 그냥 써지는 것이다.
좋은 글은 조금 노력로도 가능하다.
하지만,
훌륭한 글은 터질 듯이 가쁘고 숨찬 노력과 단련된 폐활량(글활량)이 함께 있어야 한다.
...라고 나는 지금도 글쓰기를 배우는 이들에게 전한다.

처음 소설을 쓰고자 하는 이들은
맞춤법을 걱정하고 띄어쓰기를 걱정한다. 마쳐지지 않고 늘어지는 문장의 길이를 걱정하고 꼬일대로 꼬인 문단의 의미를 걱정한다. 즉, 문법에 대한 자신이 없는 것이다.(이때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한다)

그다음이 표현의 한계를 걱정한다. 머릿속에서 넘쳐나는 수많은 감성적이고 감각적인 생각들을 모두 담아낼 수 있는 적당하고 아름다운 단어와 문장이 생각나지 않는다. 다른 작가들은 어쩜 이리도 맛깔난 표현과 딱딱 맞아떨어지는 감성적인 문장을 썼을까,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조금씩 과호흡 현상이 생겨난다)

그리고 자신있게 펜을 든다.(혹은 노트북을 연다)
나도 이런 멋진 미사여구와 음률이 느껴지는 텍스트의 향연에 빠져들고 싶어 진다. 노력하면 가능할 것 같다, 라고 강사가 힌을 북돋아줬었다.
한 줄, 두 줄.
그다음은... 그다음은...
호흡이 끊기고 생각이 막힌다.
'할많하않'이 아니라 '할많쓰못'의 카오스에 빠지면서 몇 줄 쓰지도 못한 노트를 덮어야한다. 냉장고 문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멋지게 커피 한잔을 곁에 두고 있었지만 식은 커피가 아닌 냉수가 필요한 상황.(당장 글쓰기를 중단하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갈증이 밀려온다.

이쯤 되면, 슬슬 글 잘 쓰는 사람은 왠지 타고난 특권층이나 유전적 감각을 물려받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스스로를 '범인(평범한 인간)'의 범주에 가두어 두기 시작한다. 자책과 위로를 가한다. 난  작가 체질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렀다.(슬슬 원래 호흡으로 돌아온다. 세상 편하다)

- 뭐... 그냥 알아듣고 알아들었으면 됐지. 내가 작가로 살 것도 아닌데.

라는 다소 김 빠지는 반성과 함께 잠시 동안 꿈꾸었던 '예비작가 전지적 시점'의 창작활동을 접는다.




2017년 영국 맨부커상을 수상한 조지 손더스.
그는 처음 남성 패션잡지나 연예 가십거리를 다루는 타블로이드 잡지에 기사 거리나 제공하는 프리랜서 작가로 경력을 시작하였다.

그의 자극적이고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기사들은 점점 독자층을 넓혀갔고 급기야 논픽션(사실 그의 기사 대부분이 잡지 판매부수를 높이기 위한 픽션들이었음을 나중에 밝혔다)이 아닌 소설을 집필하기에 다다른다.

조지 손더스는 '바르도의 링컨'이라는 장편소설을 집필하기 전까지 


영미문학 단편소설의 대가.
짧고 자극적이고 환상적인 문체로의 초대.
...라는 극찬을 누리며 영광을 누려왔다.

나는 2017년 겨울,
우연한 기회에 맨해튼에 위치한 뉴욕대학 작은 홀에서 열렸던 조지 손더스 맨부커 수상 기념 독자와의 만남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때 그에게 질문했었다.

기쁘냐? 진정으로 기쁘냐고...

사실 딱히 질문하고 싶은 것이 없었던 탓에 튀어나온 저돌적 헛소리에 가까웠다.
갈색 눈의 동양인을 뚫어지게 보던 그가 나에게, 아니 수많은 청중을 향해한 말이 내가 그동안 추구하고 있던 작가적 방향과 지향을 뒤틀고 바꾸어 버렸다.

"솔직히 고백합니다.
나는 단편소설의 대가가 아닙니다. 나는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은 채 내내 첨예한 문장으로 길고 긴 서사를 이끌어갈 만큼의 폐활량(호흡)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당장 장편소설을 저에게 원하신다면 당신은 아마 제가 익사하는 걸 보고야 말겠죠.
당신은 살인범이 될 겁니다."

모두들 웃었고,
나도 일단 라 웃었다. 진심으로 충격을 받은 채였다.

긴 호흡으로 쓰는 긴장감 있고 첨예한 글....이라.

우리는
냉장고에 짧은 포스트잇 메모를 쓸 때,
짧은 문자메시지 한 통을 쓸 때,
온라인 카페에 글을 쓰고 또 댓글을 달 때,
혹은 정중한 부탁이나 격식 있는 말투로 메일을 쓸 때.

사실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글을 쓰고 작문을 하면서도 자신의 쓰는 글의 호흡딱히 느끼지 못한다.
숨이 차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전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 한 사발을 들이켜던 그 사람의 호흡은 어땠을까?

보고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미디어(유튜브,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혹은 TV나 스크린 등)가 너무나 손쉽게 닿을 수 있는 매체가 근거리에 있다. 이제 정보를 획득하거나 정보를 직접 전달함에 있어 텍스트는 2차, 3차적 선택사항일 뿐이다.

"동영상이 있는데, 음성이 있는데 혹은 그림이 있는데 뭐하러 글로 전달해..."

"난 문자메시지나 카톡에서 얘기하는 거 별로야,
사람의 감정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어서 자칫 오해가 생기거든. 그래서 이모티콘(그림) 하나 정도는 함께 보내야 왠지 안심이 된다니까."

"님, 글이 너무 길어요. 그래서 읽다가 말았어요. 좀 더 요약해서 짧게 써주세요."

라고 말하는데 익숙하다.

그 익숙함은 날이 갈수록 더해져 간다.

내 아이가
논리적 서술(이걸 논술이라고 한다)에 약하고,
과 글을 줄여 는 바람에 급기야 번역을 동반해야 할 지경의 '급식체'를 사용하고,
글 대신 동영상이나 그림으로 정보를 습득하는데 익숙해하고,
글로 표현하고 전달하는 걸 어려워하는 것은 두 눈 뜨고 지켜보기 힘들어하면서도 나 스스로에게는 이렇게 가쁜 호흡의 글쓰기에 대해 관대해져야만 한다.

- 얘야... 괜찮다. 글 잘 써서 뭐하게 그냥 알아듣고 알아들었으면 됐지. 네가 작가로 살 것도 아니잖니?

...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는 장담컨대 백만 년이 지나도 오지 않을 것텐데도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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