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날리(메킨리)
매킨리는 2015년 데날리(denali)로 개명된 북아메리카 대륙의 최고봉이다. 디날리는 알래스카 원주민들의 말로 '높고 위대함’이라는 의미이며, 알래스카가 미국에 팔리기 전까지 러시아에서는 볼샤야고라('큰 산'이라는 의미)로 불렸다.
맥킨리라는 이름은 1896년 윌리엄 A. 디키가 그해에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윌리엄 매킨리를 기념해 붙여 사용해 왔다. 그러나 2015년 8월 기후변화에 대한 '북극회의'차 알래스카를 방문한 오바마 대통령이 알래스카 원주민들의 오랜 청원을 받아들여 맥킨리를 ‘디날리’로 변경해 지금의 공식 명칭은 데날리 산이다.
데날리 산군 중 제2봉 포레이커. 구름에 휘감겨 신비롭다
원정 준비
내 마음 속에 항상 두 명의 산 선배가 있다.
한명은 우리나라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오른(1977) 고상돈 선배, 또 한명은 세계 5대륙 최고봉을 최초 등정한 일본 산악인 우에무라나오미, 우에무라나오미는 1984년 데날리 단독등정 중 명을 달리했다.
나는 우에무라나오미에 관한 책을 많이 봤고, 그 모험은 내 동기부여에 큰 영향을 줬다.
그리고 나는 그 두 사람의 시신이 모셔진 데날리를 가기로 했다.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테러가 있었다. 이 여파는 내가 데날리 등반에 나선 2004년에도 이어졌다.
당시 미국은 9.11테러 이후로 모든 사람의 미국입국 비자를 엄격하고 까다롭게 심사했기에 걱정이 많았다. 무엇보다 이번 원정에 동행할 최경호 대원의 조건이 굉장히 좋지 않았다. 데날리국립공원은 등반 최소 인원을 2명으로 규정해 입산을 허가한다. 만약 경호가 비자를 받지 못하면 그동안 추진했던 등반을 포기해야 했다. 다행히 인터뷰 결과 무사히 비자를 받게 됐다. 좋은 징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기간 열심히 훈련했다. 주로 겨울산 하중훈련, 설상노숙, 썰매 끌기 등을 했는데, 이 때 했던 타이어 끌기가 나중에 큰 도움이 됐다.
데날리 원정을 위해 설상에서 타이어 끌기를 겨우내 많이 했다.
5월 18일 흐림/비
인천공항→알래스카 앵커리지→와실라 산장
아직까지도 출정의 설레는 마음은 없다.
전날 밤 유치원에서 둘째 '은'이가 율동한 '올챙이 한마리' 노래를 캠코더에 담았다. 돌아오면 멋진 선물 사주기로 한 약속이 꼭 지켜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별의 밤을 보냈다
전주까지 남원 큰바위산악회 친구 봉섭이와 후배 인호의 동행으로 도착했다. 전주에 거주하던 후배 태엽이도 장도를 격려한다며 나온다. 공항리무진에 카고 백을 올리고 출발하니 이제야 가는구나! 하는 안도감과 그동안 준비의 어려움과 사람들과의 이별이 스쳐 지나가고 앞으로의 계획들이 물밀 듯이 머릿속으로 밀려들어온다.
오후 4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원정대 물품을 수화물처리한 후 격려차 공항에 나온 안양 푸른산악회의 인용 형, 기택이, 이하 다른 분들과 짧은 만남을 하고 오후 7시 50분 대한항공 앵커리지 행 085편에 실려졌다.
앵커리지에 도착하니 시차 때문에 여전히 아침이다. 시간은 오전 09시 20분.
아주 세밀한 공항 검문에 상당한 시간을 허비했다. 혹시나 뭔가 부족하여 입국통과가 되지 않을까 내심 걱정도 컷다. 9.11 테러 이후 미국내 유입의 모든 검사가 극도로 까다롭게 변했기 때문이다. 다행이 걱정했던 경호도 무사히 통과하고 홀에 나오니 오갑복(현재 알래스카에 거주하시며 한국의 원정대의 행정과 장비, 이동 등의 문제들을 전담) 선배가 마중을 나와 계신다. 무척 반가웠다. 바로 짐을 GMC봉고 형 트럭에 싣고 와실라 산장으로 향했다. 산장에 도착하여 짐을 풀고 생각하니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몇 시간 전에 내가 있던 곳이 한국이었는데 지금은 알래스카에 와 있다니...
앵커리지 도심 중앙에 비지터센터가 인상적이다
5월 19일 흐림/맑음
와실라산장 체류
오늘은 푹 쉬겠다는 생각으로 오전 11시까지 늦잠을 잤다. 첫 원정을 시작하는 경호가 어떨지 내심 신경 쓰고 있다. 그것도 힘들다는 디날리에 도전인지라 경호도 불안해 하고 있을수 있고 나 또한 디날리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터라 속으로 걱정을 하고 있지만 경호에게 불안감을 나타낼수 없다.
오후에는 산에서 필요한 약간의 식량과 장비를 최종적으로 보충했다. 이곳의 요즘 날씨가 시시각각으로 변하여 에어 택시(4인승 경비행기)가 이륙하는 데 감 잡기가 힘들다고 한다. 어찌되었든 내일은 탈키티나(Talkitina)에 있는 에어 택시 회사로 이동하기로 하고, 저녁에 오 갑복 선배님 내외분과 경호와 같이 인근의 아직도 녹지 않은 작은 공원에 드라이브를 나갔다.
5월 20일 맑음
와실라산장→탈키티나(디날리 국립공원사무소, 비행장)→LP(랜딩 포인트, 2,300m)
오전 10시 오갑복 선배님 집에서 출발하여 2시간 가량의 차량운행으로 탈키티나에 도착했다.
우선은 국립공원사무소에 들러 입산신고를 하고 한국에서 가져온 국립공원소개 자료집(영문판) 1권과 한국전통 하회탈을 선물하니 무척 좋아한다.
한국의 국립공원에 대해 오 갑복 선배의 통역으로 대략 설명하고 하산할 때 들러 좀 더 시간을 내서 이야기하기로 약속하였다.
대략 1 시간 정도 등반시의 의무사항, 준수사항, 규칙 등을 시청각자료로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후, 쓰레기봉투(의무적으로 하산 시 반납해야 한다)와 분뇨봉투(녹말비닐로 용변 후 필히 크레바스에 투척해야 한다)를 지급받았다.
디날리 레인저 사무일에 입산신고 후 우리나리 국립공원 소개책자와 기념품을 전해주니 반갑게 받아 주셨다.
고상돈 선배의 비석이 있는 비행장에 도착해 비행기에 오르니 이젠 속세와도 완전히 단절이다.
40여 분 동안 하늘길로 달리고 나서 만년설의 맥킨리 랜딩 포인트에 도착했다.
이곳 랜팅포인트에서도 국립공원 레인저에 등반 신고를 하고 세라믹변기통(CMC), 눈썰매, 휘발유 3갤런을 지급받아 오늘은 이곳에서 1박을 한다.
만년설의 첫 텐트에 경호는 약간의 호기심과 불안감을 보인다. 내일을 위해 일찍 잠을 청한다. 여기의 현재 시기는 백야의 기간이다.
출발지인 이곳에 콜라2캔, 캔맥주2캔, 양주소형1병을 눈속에 깊이 묻고 우리 팀의 표식기를 설치했다. 이것은 최종 등반을 마치고 이곳으로 되돌아 오는날 얼음 창고에서 이것들을 꺼내 우리는 만취할 것이다!
4인승 경비행기에 짐을 싫고 등반의 시작지점인 만년설의 랜딩포인트로 이동 중이다. 메킨리등반의 접근은 오직 트윈오터를 통해서만 가능하고 기상의 수시 변화로 선택된 시간대만 운항한다. 예비일 허비 없이 무사히 도착했다
5월 21일 맑음/흐림.눈
랜딩 포인트(2,300m)→캠프1(2,600m)→짐 데포(2,900m)→캠프1(2,600m)
오늘 운행의 시작점인 랜딩포인트에서는 긴 설사면을 2시간 가량 내려가는 운행 후 그곳에서부터 캠프1 방향으로 오름의 등반이 시작된다.
하행 비탈면 설사면에 앞에 두고 조정해 가는 썰매의 진로는 제 멋대로이고 인내심을 시험한다.
여러 차례 반복된 썰매와의 신경전에 순간 화가 치밀어 혼자 욕을 내밷고 고함을 지른다.
나 스스로 컨트롤을 못한 것 같다.
다 이겨내야 할 과정인데 내가 부족했나 보다.
오전 8시 30분에 출발한 설상운행은 오후 1시가 되어서야 캠프 1에 도착했다.
첫날 운행치곤 여유롭다기 보다 힘들었다는 생각밖에 없다.
우리보다 앞서 운행한 어느 팀의 정리된 막영지 터에 오늘밤을 보낼 텐트를 구축한다.
점심을 해결하고 썰매짐의 반절을 진행방향의 높다란 경사지 상단에 운반해 놓은 운행을 하였다.
썰매짐의 무게도 생각보다 많이 나가기에 가능하면 반반씩 나누어 먼져 데포(depot, 미리 어느 지점에 짐을 옮겨 놓는 것)해 놓고 내려오니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오전에 오면서 만난 첫 크레파스가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넓이는 얼마 되진 않지만 깊이는 가름할수 없는 깊은 속내를 들여다 봤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검은 깊이 저 속에서 누군가의 실수를 기다리는 악마를.
오늘 운행에서 나도 힘들었지만 경호도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다.
하루 종일 우리 이외에 사람 구경을 못했다. 이미 앞선 팀과 아직 뒤따르는 팀도 있겠지만 이 넓은 설상에 둘만 걷고 있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가져온 카셋트 노래가 있어 그나마 무료함을 많이 달랬다.
봄 시즌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약 150명의 산악인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베이스캠프로 진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