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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aVidaCoreana Aug 12. 2020

'갭 이어' 그거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구나...

스페인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살아가기 #22 1차 갭 이어의 포기 

지난 글에 이어 이번 글에서는 부푼 기대를 안고 시작한 갭 이어를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고 왜 목표한 1년을 채우지도 못하고 1차적으로 그만뒀는지를 적어볼까 한다. 말 그대로 갭 "이어"니까... 1년은 했어야 하는데... 갭 이어 중도 포기자가 되어 직장인으로 다시 돌아온 데는 참으로 여러 사연이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그 과정과 사연들을 차례대로 적어서 1차 적으로 갭 이어를 접고 프리랜서를 시작하게 된 이야기를 풀어보았다.


몇 년 만에 만끽하는 완전한 자유인가!


긴 휴가가 있고, 재택을 자주 하는 직업 군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곧 출근해야 한다는 압박 없이 쉬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금요일 날 퇴사를 하고 주말은 아무 생각 없이 넘어갔지만 그다음 월요일이 되니 '아... 나 이제 정말 자유인이구나!' 싶었다. 


물론 몸에 밴 습관이 있어서 늦잠도 못 자고, 출근 준비를 해야 하는 시간에 일어나긴 했지만 헐레벌떡 일어나서 씻으러 가지 않고 침대에서 뎅굴뎅굴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의 갭 이어의 시작은 만족할만했다. 느긋하게 커피 한 잔 들고, 창밖으로 출근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내가 저기 있었지'라는 생각도 하고... '뭐니 뭐니 해도 놀고먹는 게 최고구나' 하는 생각도 하고... 일단 첫 주의 시작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리고 첫 한 달은 실업 급여 신청과 은행, 보험 등 각종 서류 정리를 하며 자유롭게 쉬기로 했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정말 말 그대로 빈둥 대면서 서류 상으로 정리해야 할 것들을 하나씩 해 나갔다. 


한 달에 한 번 이상의 여행


여행을 좋아하는 1인이기에 갭 이어의 목표 중 하나가 매달 짧게라도 여행을 가는 것이었다. 이건 갭 이어를 시작하기도  전인 2019년 1월부터 신나서 실천을 했다. 계획은 원래 연초부터 시작하는 거란 변명 아닌 변명을 대면서...ㅎㅎㅎ


1월은 남미 볼리비아와 칠레로 긴 휴가

2월은 마드리드 근교로 짧은 여행

3월은 회사도 그만뒀으니 본격적으로 여행 시작! 제2의 고향 바르셀로나 방문과 오랜 시간 스페인에 있으면서 가지 못했던 안도라 여행

4월은 한국 가족 방문과 더불어 고등학교 친구들과 타이완 여행

5월은 경상남북도의 다양한 도시 여행

6월은 매년 가는 이비자에서 휴양

7월은 못 갔다... (여기가 바로 내 갭 이어가 1차적으로 어그러지기 시작한 지점이다...)

8월은 신혼 여행지로 그렇게 좋다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대학 친구와 여행


이 계획은 상반기만 놓고 보면 참 알차게 실천을 잘했다. 그리고 역시 돈만 있다면 놀고먹는 백수의 인생이 이렇게 좋구나 하는 것을 또 한 번 느끼게 해 준 반년이었다. 심심할 때쯤 여행 가고, 친구 만나고, 한국에 있는 가족과 긴 시간도 보내고, 늦잠도 원 없이 자고... 


돈, 돈, 그리고 또 돈!


야심 차게 시작했던 나의 갭 이어의 첫 난관은 실업 급여였다. 스페인 실업 급여가 막 팍팍한 금액은 아니기에 아껴 쓴다면 한 달을 충분히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런데 실업 급여 수령에는 큰 난관이 있었으니... 스페인 외의 국가로 나갈 때는 그 지급이 중단이 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실업 급여에 대해서도 적어봐야겠다. 이번 기회를 통해 스페인 실업 급여 체계에 대해 꽤 세세하게 알게 되었다.)


아니... 공짜도 아니고 내가 그동안 직장 다니면서 꼬박꼬박 낸 돈을 돌려받는 건데 무슨 제약이 이렇게 많은 건지..!


그냥 중단만 되는 것이 아니라 나가기 전에 중단 신청을 하고 돌아와서 다시 신청을 해야 하는... 그리고 그 기간만큼은 실업 급여 지급이 안되고 1년에 90일 이상은 해외로 나갈 수 없다는 조항도 같이 붙어 있었다. 그 말인즉슨.. 한국을 가 있는 기간 동안은 실업 급여를 못 받는다는 것이었고, 실업 급여를 받으려면 자유롭게 긴 여행은 갈 수 없다는 것과 동일한 말이었다.


한국을 가면 왕복 비행기 값에, 가서 쓰는 돈도 있고, 그동안 스페인의 집 월세와 고정 비는 그대로 나가는데... 그동안 실업 급여라는 수입이 없다면 나는 저축을 꺼내 써야 했다... 물론 그걸 쓴다고 당장 빈털터리가 되는 건 아니지만 그대로 인간의 마음이라는 게 계획한 데로 흘러가지 않으면 불안한 것이 인지 상정이다. 그리고 내 주머니에서 수입 없이 나가는 것은 한 없이 아깝기 마련이고...


역시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고 노는 것도 놀아 본 놈이 노는 거다...


그렇게 1차 재정적인 시련을 겨우 겨우 넘기나 했는데... 2차 정신적인 난관이 닥쳤다. 갭 이어는 분명 재 충전의 시간이고 재 도약의 발판을 만드는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 저 멀리서 올라오는 불안감은 어떻게 컨트롤할 수가 없었다. 매일 드는 생각은 아니지만 순간순간 불쑥불쑥 떠오르는 불안감은 멘탈이 강하지 않은 내게 닥친 갭 이어의 부작용 중 하나였다. 


지인들과 공유하는 소셜 미디어에는 매번 노는 사진, 여행 가는 사진 등 즐거운 사진만 올리니까 내 속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네 팔자가 상팔자다', '인생 멋지게 산다'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치열하게 불안감과 싸우면서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었다. 변명 같지만 이게 브런치와 블로그를 못한 또 하나의 이유다. 브런치와 블로그는 나를 포장하기보다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사실을 전달해야 읽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텐데 저런 상태에서 글을 쓴다면 진정성이 없는 포장하는 글만을 쓸 것만 같았다. (그리고... 루틴이 없는 삶을 살다 보니 객관적으로는 시간이 없는 것은 아닌데 주관적으로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말이 좀 이상한가.. ㅎㅎㅎ)


분명 첫 직장을 그만두고 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왠지 모르게 더 불안했다. 그때보다 나이가 더 들어서일까? 아님 지난 시간 성격이 바뀌어서 일까? 여하튼 한 번 생기기 시작한 불안 감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고, 같이 회사를 나온 친구들이 하나 둘 다시 일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괜히 나왔나...' '이렇게 있다가 1년짜리 갭 이어가 2년이 되고 3년이 되면 어떡하지...' '차라리 홍콩 갈 걸 그랬나...' 하는 후회 비슷한 불안한 마음이 불쑥불쑥 올라왔다.(지금 돌이켜보면 홍콩은 안 가길 정말 잘했고 하늘이 도운 거지만...^^;)


자기 컨트롤이 안 되는 사람에게는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 갭  이어는 자기 계발 없이 휴식만 있는 갭 이어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는데, 나는 일단 계획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여행할 때만 그런 줄 알았는데 일정하게 출근하는 직장이라는 제약과 압박이 사라지자 그 모습이 훨씬 더 확연히 드러났다. 아무리 갭 이어 시작 전에 큰 계획들은 세워두었다지만(그 계획들은 이전 글에서 참고를...) 계획은 계획일 뿐 실천력이 따라주지 않으면 그냥 종이에 적어 둔 글자에 불과했다. 그리고 큰 계획들은 작은 계획들과 실천으로 완성되는데 나는 그게 잘 안 되는 사람이었다.


'하루만 더 놀고 공부라도 시작하자'

'10분만 더 자고 일어나야지 어차피 바쁜 일도 없는데.'

'내일 일도 없고 약속도 없으니까 오늘 밤새 미드 봐야지.'


저런 생각들로 인해 일상은 무계획하게 흘러갔고 무계획한 일상 안에서는 시간도 빨리 흘렀다. (회사 다닐 때는 그렇게 흐르지 않던 시간이... ㅎ) 결론적으로 제약과 압박이 없고, 목표와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일상에서의 나는 컨트롤이 힘든 사람이었다. 한마디로 나는 무한 자유 안에서는 자기 컨트롤이 안 되는 사람,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서 건강하고 모법적인 갭 이어를 통해 자기 계발이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ㅎㅎㅎ


계획보다 이른 디지털 노마드의 시작


사실 갭 이어 첫 6개월은 아무 신경 쓰지 않고 놀다가 선선해지는 가을 경부터 디지털 노마드를 위한 일자리를 알아보고 갭 이어를 끝내는 2020년에는 일의 양이 많지 않더라도 프리랜서로 일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랬는데...


회사를 미처 나가기도 전부터 회사에서 같이 일하던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다. 회사 나간다는 소리 들었다고... 자기들과 같이 일할 생각 없냐고... 물론 좋았다. 일단 어디든지 나를 찾아 주는 곳이 있고 내 능력을 인정해 주는 곳이 있다는 것은 좋은 거니까! 고맙게도 나에게 먼저 연락해 준 에이전시와 간단히 미팅을 하면서 일단은 여름까지는 쉴 예정이고 그 후에 일이 있다면 조금씩 같이 해보자고 이야기했고 에이전시도 흔쾌히 좋다고 했었기에 왠지 나의 갭 이어와 디지털 노마드는 술술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하. 지. 만. 역시 변수는 어디에나 존재했다. 분명 나는 여름까지 쉰다고 말했는데... 여름 초입에 들어서는 6월 에이전시에서 연락이 왔다. 진행하던 프로젝트에 사람이 빠지게 돼서 급하다고, 이제 그만 쉬고 같이 일하는 게 어떻겠냐고... 내 나름의 계획이 있었지만 이제 에이전시는 내게 일을 줄 갑이고 난 그들의 을이었기에 그리고 순간순간 떠오르는 불안감에 못 이겨 생각해 보자고 했다. 


갭 이어를 처음 시작하던 그 마음과 그 기대 그대로였다면 일은 가을부터 천천히 시작하는 게 내 계획이니 가을에 다시 보자라고 했을 텐데... 일단 1차 실업 급여의 제한 지원이라는 난관에 부딪혔고, 왠지 이번에 '노'라고 하면 다시 일을 주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부정적인 생각도 들고,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매일 일정한 루틴이 없는 백수 생활을 하다 보니 내가 점점 퇴화되어 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런 쫓기는 느낌 때문에 결국 7월부터 프리랜서로 에이전시와 일을 하는 것에 동의해버렸다...




이렇게 나의 갭이어는 1차적으로 끝이 났다. 일단 한 달에 한 곳 이상 여행을 해 봤고 제약 없는 자유를 잠시나마 맛보았고, 가족과 오랜 친구 같은 내 주변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도 가졌기에 계획한 데로 1년을 다 채우지는 못했지만 내 갭 이어는 반쪽짜리 성공이었고 반쪽짜리 실패였다. 그리고 익히 알고 있었지만 내 멘탈이 강하지 않음을 다시 한번 더 깨닫게 해 주었고, 일정 강도의 압박과 제한이 없으면 내가 내 일상을 자기 주도적으로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1차 갭 이어를 통해 얻은 소중한 자산이다. 자꾸 1차 갭이어라고 하는 것은 프리랜서 생활이 그리 길지 않았고 2차 갭 이어(?)를 곧 시작하기 때문이다.(2차 갭이어는 다음 글에) 글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은데 지난 1년을 요약하는 것이기에 너그러이 이해하고 읽어주시길...



By. 라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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