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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irewhyire Dec 01. 2021

행복이 두렵지 않으려면

소극적 공리주의자 탈피하기

내가 사람들이랑 이야기를 하다가 지루해질 타이밍이면 하면 질문이 있다. 일종의 밸런스 게임 같은 질문이다.

 

 0 만큼의 고통과 40 만큼의 행복 vs 50 만큼의 고통과 100 만큼의 행복

 이 둘 중에 무엇을 선택하겠냐는 것이다.

선택지는 두 개이지만, 사람들마다 그 선택의 이유는 굉장히 다양했다.


 내가 질문을 해본 사람들 중에는 그래도 후자 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부분은 이유를 물으면 결론적으로 전자는 40만큼의 행복을 얻고 후자는 50만큼의 행복을 얻으니 후자가 더 많기 때문에 후자를 선택하겠다는 이유였다. 막연히 듣기에는 너무 산술적인 거 같아서 내가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요구하면 귀찮아하면서도 이렇게들 이야기했다. 고생을 좀 하더라도 그래도 그 끝에 오는 더 큰 행복을 선택하겠다고.


 나는 내 주변의 진취적인 사람들을 뒤로 한채 늘 전자를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나와 같은 대답을 한 소수의 사람들은 '무난한 행복이 좋아서' 전자를 선택했다고 했다. 나 역시 그랬다.

드라마틱한 모험 속에서 얻는 환희보다 일상에서 얻는 소소한 재미가 더 좋았다. 이쯤에서 나 자신에게 더 솔직해지자면, 어쩌면 좋아서 선택하기보다 안전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공리주의에서 최고의 선은 최대 다수의 최대 쾌락이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가장 큰 쾌락을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그 과정이나 수단이 무엇이든 허용된다. 그러나 그런 공리주의의 갈래 중에서도 '소극적 공리주의'라는 것이 있다. 소극적 공리주의는 최대 다수의 최대 쾌락이 목표가 아니라 최대 다수의 최소 고통이 목표이다. 행복을 정반대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는 두 공리주의 이론들에 따르면, 나는 소극적 공리주의에 적합한 사람인 것이다.


 할까 말까 할 때는 상상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고 안 했고, 말할까 말까 할 때는 말한 셈 치고 속으로 삭혔다. 3보다는 2가, 2보다는 1이, 1보다는 0이 가장 안전한 숫자 같았다.


 나의 이런 소극적인 태도는 겉으로는 안정을 추구하는 듯 보였지만, 어쩔 때는 사실상 그 모습은 체념이거나 포기일 때도 많았다. 나의 호기심 혹은 작은 쾌락 추구로 인해 혹시나 생기게 될 불행이 미리부터 걱정이 돼서 단념했던 것이다.


 공리주의 원리를 정당화하는 여러 논지 중에는 금욕주의와 관련된 부분이 있다. 모든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쾌락, 즉 행복이고 궁극적인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당장의 달콤한 유혹들을 참아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안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금욕주의를 이렇게 비판한다.

금욕주의 원리는 공리주의 원리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공리의 원리가 오용된 것뿐이다.

 금욕주의도 원래는 더 큰 행복을 목적으로 금욕하는 것이었지만, 주객전도가 되어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작은 행복들을 참고 죽이다 못해 결국은 고통을 사랑하는 지경에 까지 나아가게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제가 들떴다는 느낌이 스스로 들면 기분이 안 좋거든요. 통제력을 잃었다는 생각 때문에...


 언젠가부터 설레는 일이 있거나 기대가 되는 일이 있으면 마음 반대쪽에서 불안함이 세게 줄을 잡아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내 마음이 나에게 '너무 들뜨면 실망도 큰 법이니 너를 보호하라'는 애정 어린 걱정인 것을 나도 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애정 어린 걱정이 조금 지겨워지고 있다. 고맙지만 가끔은 사양하고 싶어 진다.


 그동안은 불행에 덤덤해지려는 연습을 많이 해왔던 것 같다. 그런데 어쩌면 나에게 필요한 진정한 평정심은 불행에도 덤덤한 것보다, 행복에 더 기뻐하는 연습을 통해 한쪽으로만 기울어졌던 저울을 평형으로 맞추는 작업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은 내 마음과 내가 분리되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닌 거 같다. 앞으로는 종종 마음이 자꾸 소심 해지라고 한다면 청개구리가 되어봐야겠다.

어쨌든 파이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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