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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 May 05. 2021

선생님도 어린이 시절이 있었잖아요?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더니

 봄은 생기를 감추지 못하는 계절. 5월이 뿜어내는 푸르름은 싱그러움을 툭툭 터뜨리며 정수리와 어깨를 물들인다. 짙어지기 시작한 초록 이파리 그늘 아래를 걷는 기분은 뛰고 재잘대는 아이들이 있는  작은 피아노 학원을 둘러보는 것과 닮았다. 미세먼지와 꽃가루가 흩날리는 봄바람에서 땀과 먼지가 뒤엉킨 아이들의 체취가 느껴진다. 어쩔  없이 자연스럽게, 작고 어린  학생들이 떠오르는 이른 아침 산책길.


 오늘은 5 5 어린이날. 소파 방정환은 '아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밀쳐지던 나약한 존재에게 '어린이'라는 존칭을 붙여주었다. '어린이'라는 단어에는 '늙은이', '젊은이'처럼 아이들도 오롯한 인격체로 존중받고 대접받아야 마땅하다는 소파의 염원이 담겨있다. 우리나라 국민이 나라 잃은 설움에 지쳐있던 일제 강점기 시절, 소파 방정환은 어린이들이 웃음과 희망을 잃지 않고  나은 미래를 꿈꿀  있기를 바랐다. 한 그는  하루라도 어린이들이 어른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뛰어놀  있고, 어린이 자신들이 얼마나 고귀하고 소중한 존재인지를 느낄  있는 날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린이 운동에 앞장섰던 그의 노력으로 1923 5 1일이 '어린이날' 제정된다.    '어린이날의 약속'이라는 전단을 12  배포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마시고 쳐다 보아주십시오.

어린이를 어른보다 더 높게 대하십시오.

어린이를 절대 윽박지르지 마십시오.

어린이의 생활을 항상 즐겁게 해 주십시오.

어린이는 항상 칭찬해가며 기르십시오.


 어린이는 어른보다  시대  새로운 사람이니 어린이의 뜻을 가볍게 여겨서는  된다고도 말했다. 어린이를 사랑한다는  어린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목청이 터지도록 소리치는 일과 같다. 어린이 시절을 지나오지 않은 어른은 없다. 하지만  삶에서 지나버린  부분인  '어린 시절' 겪고 있는 이들을 우리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나. 어린이를 내려다보지 말고 바라보라고 소파 방정환은 말했다. 그가 당부한 대로 우리는 어린이들을  높게 대하고 항상 즐겁게 해주고 있는 걸까. 나도 겪어봐서  안다고, 근거 없는 자만심과 우월감에 젖어 어린이의 목소리를 무시하진 않은가.


 가끔 어린이들에게 피아노를 조금만 더 연습하자거나 이론 문제집을 한 두 장만 더 풀어보면 어떨까 물어볼 때가 있다. 정해진 연습과 문제풀이를 다 끝냈는데 추가로 더 시키다니! 그럴 때 실망한 눈으로 한 어린이가 말한다.   


"선생님, 왜 이렇게 우리 마음을 몰라줘요?"

"뭐가?"

"선생님도 어린이 시절이 있었을 거 아니에요? 벌써 잊었어요?"


차라리 처음부터 연습을 더 하라고 정해주면 좋잖아요.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더, 조금 더 하면서 계속 더 시키잖아요. 어른들은 어떻게 하면 공부를 더 시킬까를 생각하겠지만 우리들은 더 많이 놀고 싶다고요. 어른들이 약속을 안 지키면 싫다고요. 어린이의 일침에 나는 웃을 수밖에 없다. 내 반응과 상관없이 어린이는 한숨을 푹 내 쉰 뒤 조그맣게 덧붙인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더니."


 단 한마디도 틀리지 않았다. 나도 어린이 일 때 그랬었는데 어른이 되며 생각이 바뀐걸까. 다 자란 개구리처럼 올챙이 시절을 잊어버린 걸까. 어릴 때는 지금처럼 자유로운 학습 분위기가 아니어서 선생님이나 어른들에게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어른들은 왜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에게 힘든 일, 즉 더 많은 과제를 시킬까. 해야할 일을 재빨리 끝내놓고 더 많이 뛰어놀고 싶은 어린이들 마음을 모를까. 이렇게 우리 마음을 읽어주길 바라고 있는데 왜 모른 척할까. 아이들의 몸은 부드럽고 유약하지만, 그 안에 깃든 생각은 한없이 냉철하고 날카롭다. 단 한 번도 진리가 아닌 내용이나 거짓을 말한 적이 없다. 그들은 관찰하고 느낀 것을 그대로 말하고, 그것은 언제나 옳다.


"미안해. 선생님은 개구리가 된 지 너무 오래되어서 잊어버렸어."


 나는 어쩔 도리가 없어서 사과한다. 그 속에 비굴함과 아첨을 약간 담아서. 어른이 돼서 어린이 마음을 깜빡했다는 듯이, 너의 마음을 읽지 못한 게 죽을 죄라도 되는 듯이. 속상한 어린이의 마음을 달래고 싶고, 어린이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은 눈물겨운 노력이다. 그런데 또 너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럼 우리가 올챙이예요? 저도 나름 올챙이 시절을 겪은 개구린데요."


아뿔싸. 그렇다. 너는 10년짜리 너만의 '생애 주기표'가 있지. 비록 나의 1/4이라 할지라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어엿한 10년의 삶이다. 부모님과 처음 놀이동산에 갔던 4살 때를 기억하고 제주도 여행을 갔던 5살 때를 기억하고,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이마가 찢어졌던 6살, 좋아하는 친구와 헤어져 펑펑 울었던 7살 졸업식을 기억한다. 선생님처럼 나도 다 큰 개구리이지만 올챙이 시절을 까맣게 다 잊은 파렴치한 개구리가 아니니 같은 취급하지 말라는 뜻이겠다. 역시 말로써는 이길 수가 없다. 아니, 말뿐 아니라 논리성으로도 창의성으로도 지는 싸움이다. 애초에 어른이 어린이와 말싸움을 해서 이기려는 마음을 품는 것조차 잘못된 일이지만 말이다. 이럴 때는 어른인체 하며 대화를 끝내는 것이 상책이다.


"5월은 전부 너희들 것이야. 마음껏 놀아."


내 목소리가 짐짓 선심 쓰는 것처럼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나의 위선적인 마음을 꼬집듯이 한 어린이가 대꾸한다.


"원래 1년 365일 다 제 건데요?"


 내 시간인데 선생님이 뭘 생색을 내느냐는 듯이 꾸짖는 어린이의 한마디. 그래. 너의 모든 시간은 다 너의 것이야. 부디 항상 몸 건강하고, 주위를 둘러보는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 사람으로 자라나길. 눈부신 어린이들이여.

 

 나는 내가 이미 몸살 겪으며 지나온 그 시절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는 이들이 좋아서 견딜 수 없다. 나는 지나왔지만 내 맘대로 추측할 수 없고, 나와는 완전히 다른 어린이들만의 새로운 시간이 궁금하다. 그들의 현재를 응원하고 싶고 구경하고 싶어서, 언제든 끼어들 타이밍을 노리며 어린이 마음 주변에서 기웃거리는 어른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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