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한 새신부의 화상 자국
'박스 훼손 상품’이라는 게 있다. 내용을 포장한 박스는 망가졌지만 내용물은 멀쩡한 물건을 말한다. 이런 상품들은 새 상품과 다름없음에도 불구하고 정가보다 할인해서 판매한다. 신상품을 조금이라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기 위해서 일부러 박스 훼손 상품을 찾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쇼핑몰에서도 ‘박스 훼손 상품’이나 ‘새 상품 재포장’처럼 안내문을 붙여두고 할인한 가격을 제시해 놓은 것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금세 물건이 팔려 나가고 없다. 포장 상자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나 같은 사람들은 신상품을 저렴하게 살 수 있는 메리트가 있는 박스 훼손 상품을 나쁘지 않게 생각하지만, 포장 상자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들은 박스가 망가졌거나 재포장된 상품을 꺼림칙하게 여긴다.
“포장에 크게 찍힌 자국이 있다네. 내용물까지 손상됐을지도 몰라.”
“에어캡으로 이중 포장되어 있다는데? 그리고 박스째 되팔거나 할 일도 없는데 포장쯤이야.”
“아니야, 그래도 찝찝해. 제 값 주고 새 것 사는 게 낫지.”
나는 매대 진열 상품으로 나온 ‘잔기스'가 있는 최신형 노트북을 말도 안 되는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한 적이 있다. 박스 포장도 없고, 언박싱하는 즐거움도 누릴 수 없는 개봉 제품이라 상품 가치가 떨어진 전자제품. 하지만 저렴한 가격으로 더 다양한 옵션을 제공받으며 새 제품과 완전히 동일한 것을 빠르게 가질 수 있었기에 만족감이 컸다. ‘싸게 내놓으면 누군가는 사겠지’라는 마음으로 내놓았을 그런 물건들을 큰 고민 없이 사고 기뻐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애초에 내용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겉을 감싸고 있는 포장용기는 '되팔 때 가치를 높여야지'라는 생각으로 고이 간직해 두었다가도 몇 개월 뒤에는 분리수거함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몇 번 경험한 뒤로 박스 포장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박스 훼손 상품’이라는 말을 들으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대학교 교양 시간이었다.
나는 가톨릭 재단 대학교를 다녔는데 1학년 필수 교양 과목으로 ‘사랑과 삶’이라는 과목을 수강했다. 기독교 교리를 배우는 건 아니었지만, 이웃 사랑과 자비를 제일로 하는 기독교 덕목과 닿아있는 '바른생활 길잡이'같은 내용들을 배웠다.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사랑하는 법, 삶과 죽음, 인생의 본질적 가치 등 상투적이지만 가슴 깊이 새겨두면 나쁘지 않은 일종의 잠언 같은 내용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수업은 40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남자 신부님이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의욕 충만한 스무 살 새내기였고 16주 수업 동안 단 한 번도 지각이나 결석을 한 적 없는 성실한 학생이었다. 17년 전인데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어떤 내용이 있다. 교양 과목 교재에 실린 내용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학생들이 머리를 찧으며 심각하게 졸고 있으니 신부님이 주의를 끌기 위해 이야기를 꺼내는 것 같았다. 내용은 이랬다.
친한 남자 후배가 결혼을 했다. 그런데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에 새신랑이 한숨을 푹 쉬면서 고민을 털어놓더란다. 새신랑과 새신부는 혼전 순결을 지킨 가톨릭 신자였고, 신혼여행을 간 첫날밤 처음 사랑을 나누게 되었다. 둘 다 처음이라 무척 두렵고 설렜는데, 먼저 씻고 나온 새신부를 보고 남자는 깜짝 놀랐다. 신부의 몸, 정확히는 배에서부터 왼쪽 다리까지 끔찍한 화상 자국이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로 심한 상처라면 남자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텐데 1년 이상 만나고 결혼까지 하는 동안 여자가 이 이야기를 남자에게 하지 못하고 있었다가, 몸을 보여주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되어 비로소 공개하게 된 것이다.
‘순결한 여성’의 '백옥 같은 피부'를 기대했던 남자는 여자의 흉한 상처를 보고 크게 실망했다. 그날 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신혼여행 내내 두 사람은 서먹한 시간을 보내다가 돌아왔다는 것이다. 신랑은 자기도 모르게 화가 나고 언성이 높아지면서 새신부를 붙잡고 다그쳤다고 한다.
"왜 그동안 말 안 했어. 그리고 여기 말고 다른 데는? 또 화상 자국 난 곳 없어?"
여자의 팔을 들어서 구석구석 찾아보고, 몸을 이리저리 돌려 확인을 했다고 한다. 다행히(?) 눈에 보이는 곳 말고 다른 곳에는 상처가 없는 것을 확인했지만, 앞으로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고 털어놨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교수는 남자후배에게 감정을 이입한 듯 생생히 연기를 했다.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분노를 억누르는 듯이 음성을 낮추기도 하면서 우리 모두가 그 이야기에(특히 새신랑의 분노와 당혹감에) 공감해 주기를 바라는 듯했다.
그때 교실에서 잔잔한 파도처럼 술렁이던 소리와 분위기가 기억난다. 교수의 입에서 '아니 글쎄 순백의 천사여야 할 새신부의 몸에 끔찍한 화상 자국이 있었다니까’라고 말을 놓는 순간 헉, 하고 목구멍으로 날숨 소리를 내던 남학생들, ‘여자 어떡해’라고 입을 가리고 속삭이던 여학생들. 그리고 '대체 이 이야기의 핵심이 뭐지? 그래서 신랑의 고민이 뭐지? 신부한테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지?'라고 어리둥절해하던 나 같은 학생들이 섞여 있어서 애매모호하던 강의실 분위기. 절대다수가 공감하는 느낌이 아니고, 각자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지만 발언권을 얻지 못해서 아무도 나서지 않는 상황. 17년 전이었으니, 지금 사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던 그때.
교수가 이 알 수 없는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부부 사이에는 신뢰, 예의, 정직이 중요하다'라는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 사이의 신뢰와 예의, 정직은 중요한 덕목이다. 그런데 그 신뢰와 예의, 정직을 무시하고 상대방에게 배신감을 안긴 대표적인 예시가 새신부 몸에 있는, 미처 알리지 못한 화상 자국이라니.
그 화상 자국을 알았다면 남자는 결혼을 다시 생각할 수도 있었을 아주 중대한 사안이라고 교수는 말했다. 신부의 몸이 매력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건 신뢰의 문제이다, 미리 말할 수도 있었는데 ‘숨기고’ 결혼한 것이다, 이걸 드러내면 남자가 자길 선택하지 않았을 거라는 걸 여자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수는 목청 높여 말했다. 혹시 화상 자국을 숨긴 애인과 사귀다가 버림받고 수도자가 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핏대를 세우며 자기 일처럼 화를 냈다.
혼전순결까지(?) 지켜가면서 서로를 아껴준 두 사람이 결혼이라는 큰 관문을 넘어 백년해로를 맹세하고 사람들 앞에서 서약한 결혼식 아닌가. 어떤 고난과 역경이 있어도 남편과 아내로서 서로를 평생 아끼고 사랑할 것을 다짐하기로 작정하는 게 부부 아닌가. 그 앞에서 배와 다리에 흉한 화상 자국이 있는 새신부 때문에 결혼생활이 고민된다고 말하는, 신혼여행을 다녀오자마자 신부님에게 ‘고해성사’하는 새신랑이라니. 왜 혼전순결 따위 지켜서는. 어쩌다가 새신부도 저런 생각을 갖고 있는 남편을 거르지 못하고 받아들이게 됐을까. 그게 그렇게 큰 하자라고 느끼는 사람인 줄 진작에 알았다면 서로 얼굴 붉힐 일 없이 조용히 뒤돌아 헤어지면 그만인 것인데.
교수는 이 사안이 얼마나 중대한지를 강조하며 '남자는 시각적 동물이라서 눈에 보이는 게 매우 중요하다'라고 재차 말했는데, 나는 거기서 묻고 싶었다. 그렇다면 교수님은 그렇게 중요한 시각적 자극을 위해 매일 아침 마주 보는 자신의 외모를 얼마나 공들여 가꾸고 있나요,라고. 남자의 예민한 시각적인 기준이 왜 항상 타인에게 특히 여성에게만 향해 있는지 궁금하다. 자신을 보는 시선은 관대하면서 왜 유독 타인에게만, 여성에게만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지.
지금의 내가 그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면 손을 공손히 들고 물었을 것이다. 발언해도 되나요? 지금 적절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스무 살의 나는 혼란스러워하면서 팔과 손등의 아토피 상처가 보이지 않도록 옷깃을 끌어내리고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내 아토피 사실을 ’미래의 남편’에게 말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낭만적인 신혼여행지에 가서 환상적인 첫날밤을 보내려고 하는데, 씻고 나온 내 몸을 보고 남편이 경악을 하면 어떡하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평생 함께 하고 싶어서 결혼식까지 올린 사람이, 왜 지금껏 아토피가 이렇게 심하다고 말하지 않았느냐고 다그치며 내 몸을 이리저리 돌리고 살피는 사람이라고 상상하면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다.
남자는 그 여자에게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그 신부도 신랑의 반응에 똑같은 감정을 느꼈을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런 상대방이 끔찍한 사람이니까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이런 몸을 갖게 된 나를 더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 상황에서, 비이성적으로 다그치는 상대에게 책임을 지우지 않고 스스로 상처를 내면서 괴로워하는 것이다. 그게 더 익숙하니까. 그러라고 배웠으니까. 지금 눈앞에서 남교수가 말하고 있듯이.
나는 항상 '이런 상태'인 나에 대해 양해를 구해야 하는 쪽이고, 상대방은 사랑과 자비로 용인하는 쪽이 되어야 하는 걸까. 알고 싶다. 이 아토피 상처가 대체 누구를 위한 고통인지. 새신부의 몸의 화상은 왜 신랑에게 내쳐질 만큼 큰 잘못이 되는 건지. 미리 말했다면 달라지는 건 뭔지.
그날 교양수업의 교훈은 그것이었다. 사랑한다면 숨기지 말 것. 나에게 아무리 큰 ‘하자’가 있어도 상대방에게 미리 이야기를 해주어야 상대가 놀라지 않는다는 것. 이건 거액의 빚이 있다는 말과 같으며, 숨겨둔 애가 있다는 말과 같을 만큼 중대한 문제라는 것. 화상 자국을 숨겼다는 사실이 파혼 사유가 되느냐고 조심스레 물어보는 새신랑과 어떤 여자가 결혼 생활을 이어갈 수 있을까. 자식을 낳고, 함께 키우고, 노년까지 행복하게 늙어갈 수 있을까.
나는 ‘새신부의 화상 자국’에 대적할만한 ‘새신랑의 외모적인 충격 요소’가 무엇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대머리는 어떨까. 남자가 나를 만나는 1년 동안 감쪽같이 가발을 썼던 것이다. 찰랑거리고 풍성한 그의 머리숱이 그의 매력을 더해주었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가발이었다면? 신혼 첫날밤에 씻고 나온 새신랑의 머리칼이 온데간데없고 반짝이는 두피만 있다면? 물론 적잖이 놀랄 것이다. 광범위한 몽고반점은 어떨까. 듬직해 보이는 새신랑의 엉덩이에 커다랗고 시커멓게 몽고반점이 자리 잡고 있다면. 엉덩이뿐만 아니라 엉덩이와 등, 허벅지까지 넓은 부위에 걸쳐 퍼져있다면. 혹은 등과 가슴에 누런 고름이 들어차 있는 여드름이라면 어떨까. 결혼을 되돌리고 싶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순백의 신부에게 ‘화상 자국’이 문제라고 한다면 신랑에게도 대머리나 몽고반점, ‘가드름, 등드름’ 같은 걸 들고 와서 비교할 게 아니라 똑같이 ‘화상 자국’을 대입해서 생각해 볼 일이다. 남자 몸에 화상 자국이라고 한다면 갑자기 사건이 그렇게 중대해지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그 상처 때문에 그를 더 사랑하게 될 것만 같은, 어떤 근사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을 것만 같다.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문제는 외모적인 약점이 어떤 것이냐가 아니다. 상대의 그 부분을 내가 어떻게 인식하고 바라보느냐가 더 중요한 것 아닐까. 물론 상상하지 못했던 어떤 비밀스러운 요소가 상대방에게 있다는 것을 결혼 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사건의 중대함을 떠나서 당혹감을 감추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 기대와 어긋난 점 때문에 실망감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고, 그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하기로 서약했다면 몸의 문제를 알게 되었다고 했을 때 기능적인 면이 아닌 오로지 미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렇게 마음이 차갑게 돌아설 수 있을까. 나는 잘 모르겠다.
"여자 몸에 그런 흉측한 상처가 있는데 어떤 남자가 좋아할까요?"
신랑은 완전히 속았다니까. 옷으로 가리고 있으니까 껌뻑 속았지 뭐. 감추려고 마음먹었으면 무슨 재주로 알 수 있었겠어요, 안 그래? 남교수의 그 말을 들은 뒤로 나는 내 아토피의 미적인 면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이유 없이 시각적 불편함을 안겨 주었던 내 아토피가 나의 연애와 결혼 생활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겠다는 신선한 공포가 덮친 것이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 애인이 되거나 남편이 될 사람에게는 숨김없이 내 모든 것을 다 보여줄 것이라고. 아토피 상처로 가득한 내 몸을 보고 상대방은 놀랄 수도, 당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몸 때문에 나와 연애를 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나도 주저 없이 그를 놓아줄 것이다. '순백의 신부'를 원하는 사람에게 아토피 흔적을 가진 '색소침착의 신부'는 적합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박스 훼손 상품'같은 이런 나라도, 내용물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나를 가질 자격이 있는 멋진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외모가 아니라 내면을 볼 줄 아는 속 깊은 사람일 것이라고. '이런 나'를 선택한 그가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사랑해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 생각도 틀렸다. 아토피 환자라서, 팔다리에 못난 상처가 뒤덮여 있다고 해서, 내가 '비록 흠집은 났지만 할인해 드릴게요'라고 홍보를 하며 낮은 자세로 팔아야 하는 박스 훼손 상품은 아닌 것이다.
예선전(외모)을 통과해야지만 본선(내면)에서 겨룰 자격이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외모가 기준에 못 미친다면 내면을 보여줄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는 뜻이겠다. 외양이 어떻다고 해서 내면이 용인될 수 있는지 없는지를 상대방이 결정하게 두지 않았으면 좋겠다. 몸에 상처가 있다고 해서 내가 '훼손 상품'은 아니다. 나의 아이덴티티는 박스에 담긴 상품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