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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 Jul 10. 2021

소리 없는 아득한 너의 세계

여름이었다

장마가 시작되었다.


가는 빗방울들이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 위로 툭툭 떨어진다. 빗줄기는 크고 작은 원을 그리며 물속으로 스며든다. 표면에 생긴 둥그런 파형은  계절의 옅은 목소리처럼 희미하게 흔들리며 퍼져 나간다. 파도의 물결이 만들어낸 어떤 기억은 찰나의 시간 동안 진동했다가 유유히 사라진다. 느리게 진폭을 그리던 너의 목소리처럼 낮고 속절없이 증발한 기억들. 습기를 머금은 나무 창틀에서 시큼한 초여름 냄새가 난다. 창틀에 매달린 빗물 속에 먼지와 흙이 섞여있다. 아슬아슬하게 맺혀있는 빗방울에 후우, 숨을 불어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창틀 앞에 엎드린 채로 고개를 돌려 쏟아지는 비를 본다. 쏴아아아. 소형 배달 트럭이 차도에 고인 물웅덩이를 세차게 밟으면서 지나간다. 장화를 신고 인도를 걸어가던 어린이  명이 꺄르륵 고함을 지르며 비켜선다.


"어떤 소리야?"


영준은 골똘히 비를 바라보는 내 등을 톡톡 두드려서 자기 쪽으로 돌아보게 만든다. 막 잠에서 깨어난 기척이다. 며칠 째 장마인 통에 햇볕을 볼일이 없는데도, 눈이 부시다는 듯이 가늘게 눈을 뜨고 나를 본다.


"잠이 안 오면 빗소리를 음악처럼 틀어놓는다며. 어떤 소리인데?"


수어와 함께 낮게 진동하는 목소리를 내며 영준은 미소 짓는다. 자신은 소리를 들을 수 없어서, 어떤 소리가 나는지 정말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 아니란 걸 나는 알고 있다. 투박한 손등을 삭삭 스치는 소리, 팔과 어깨를 툭툭 두드리는 경쾌한 소리가 쏟아지는 빗소리에 섞인다. 찜기에 푹 쪄진 듯한 눅눅한 티셔츠 상의가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 있다. 비를 맞은 것처럼 앞머리가 땀에 흠뻑 젖어 있고,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뺨이 조금 상기되어 있다. 도서관 전체가 통째로 물에 잠긴 것처럼 축축하지만 건강하게 그을린 영준의 피부결은 표면이 매끈한 종이처럼 산뜻하다. 영준이 내는 호흡이 섞인 웃음소리가 근사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흔들린다.


"응, 오래전부터 불면증이 있어서."


영준은 입술 양 끝을 당겨 소리 없이 웃는다. 좋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계속 말하라는 듯이 눈썹을 치뜨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해하고 싶은 만큼 오래 머무르는 시선. 이해하기 귀찮은 만큼 멀어지는 눈빛. 처음에는 어색하고 부담스러웠던 눈맞춤에 어느덧 익숙해졌다. 이제는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 순간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어느새 영준과 나는 그런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


"눈에 보이는 그대로야. 빗소리는 어떠냐면."


나는 몸을 일으키고 서서 영준을 마주 본다. 두 손으로 그의 두 손을 맞잡는다. 비밀 세계로 떠나기 위한 의식을 치르듯 경건하게 손깍지를 낀다. 인주를 묻힌 지문으로 도장을 찍듯이 손 끝으로 그의 손등을 톡톡 다독인다. 장난스러운 귓속말처럼 들렸으면 좋겠다. 몸속에 작은 전율을 일으키는 달콤한 속삭임처럼 느꼈으면.

"작고 투명한 소리야."


손깍지를 푼다. 검지와 중지를 세워 손가락 걸음으로 어깨까지 천천히 올라간다. 작은 곤충이 식물 줄기를 기어 올라가듯이 꾸준하게 올라가 어깨에 도착한다. 그런 다음 어깨에서부터 팔 아래까지 천천히 쓰다듬으며 내려온다. 손끝에 영준의 팽팽한 근육과 소름이 돋은 피부결이 만져진다.  


"맑고 귀여운 소리가 와르르 다 함께 떨어지는 소리야. 세차고 힘이 있어."


내가 서툰 수어로 말하자 영준은 치아가 보이도록 활짝 웃는다.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허공을 가르는 박수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뒤로 젖히면서. 그가 환하게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피어난다. 영준은 내 눈동자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간다. 내가 그의 왼뺨에 생긴 보조개를 보고 있다는 걸 들켜버렸지만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귀엽고 세차고 힘이 있는 소리라고."

"응."

"그 소리가 없으면 왜 못 자는데?"


영준은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의 망막에 내 실루엣이 비쳐 보인다. 귀엽고 세차고 힘이 있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평온해져. 내 몸을 맡기고 꿈나라로 떠나도 안전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밤마다 무서운 생각이 찾아오거든. 불안한 마음이 깊어지면 귀가 먹먹해지면서 세상의 모든 소리를 사라지게 해. 눈을 깜빡이는 소리도, 침을 삼키는 소리도, 점점 빨라지는 심장소리도 잠식해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게 돼버려. 무중력 상태에 놓인 것처럼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환각을 느껴. 굵은 빗방울이 양철 지붕을 때리는 소리, 먼 곳에서 내리치는 듯 한 발 늦게 떨어지는 천둥소리,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 소리는 불안함이 나를 아득한 무소음의 세계로 끌고 가려는 걸 막아줘. 나쁜 꿈이 찾아올 것 같은 두려움을 시원하게 몰아내 주지. '아득한 무소음의 세계'에서 나고 자란 영준에게 그런 말을 해도 괜찮을까. 너에게는 평소와 다름없는 날들이 나에게는 특별히 무시무시하고 힘든 날이 된다는 것을. 침묵의 세계가 익숙한 영준은 아무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완전한 너의 세계이니까. 말하기를 조심스러워하는 건 나의 편견 때문일 것이다. 이 배려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 영준을 위한? 아니면 제대로 말을 고르지 못하는, 소통이 서툰 나를 위한?


"소리가 없으면 무서워."


흔들리는 나의 눈빛을 더듬으며 영준은 내가 무엇을 머뭇거리는지 읽어 내린다. 쏟아지는 빗소리에 숨길 수 없는 한숨을 들었을까. 내가 쉴 새 없이 떠드는 동안에도 그는 나의 표정과 몸짓을 샅샅이 보고 있다. 소란한 너의 세계를 이해하고야 말겠다는 듯이. 이해하는 것은 내 특기라는 듯이.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네가 있으니까."


나는 영준의 크고 두꺼운 몸통을 가만히 안았다. 가슴에 귀를 대니 튀어나올 듯이 요란하게 뛰는 건강한 심장소리가 들렸다. 두 팔을 조여 꽉 껴안았다. 내 심장이 빠르게 고동치는 것을 그도 느낄 수 있었겠지. 영원할 것만 같았던 시간. 오랫동안 가만히 붙이고 있던 몸을 떼어내면서 영준이 말한다. 나가자.


"지금이 아니면 언제 젖어보겠어."


영준은 내 손을 힘차게 쥐었다. 우린 장맛비가 쏟아지는 도서관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영준은 소리를 지르고, 높이 뛰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크게 웃는다. 자주 고개를 돌려 비에 흠뻑 젖은 채 나란히 뛰는 내 얼굴을 확인한다. 우리는 두 팔을 높이 쳐들면서, 고개를 흔들어대면서, 목청을 높여 소리치면서 운동장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달렸다. 하늘이 뚫린 듯이 세차게 퍼붓는 비를 아프도록 온몸으로 맞으며.


"이제 무섭지 않지."


목소리를 높이듯이 큰 몸짓으로 영준은 말했다. 소리 없는 아득한 세계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밤마다 찾아오던 불면증. 무력하게 몸이 붕 떠올라 꼼짝할 수 없는 환각. 그 세계가 찾아오더라도 예전처럼 두렵지 않을 것이다. 내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지만 내 눈에 맺힌 이야기를 모두 이해해 주었던 영준. 비가 오는 평범한 하루를 축제처럼 신나게 만들어주었던 영준. 뜨거운 한 계절을 몸으로 겪고 듣고 느끼게 해주었던 영준. 두려움을 이해하고 극복하게 해 준 영준. 밤새도록 귀 옆에 틀어둔 빗소리 음원처럼 나쁜 기운을 시원하게 몰아 내준 영준. 엎질러진 추억을 주워 담을 동안 바깥 풍경이 수채화처럼 번진다. 창틀에 내내 매달려있던 빗물이 마침내 툭, 아래로 떨어진다.


영준이 소리 없이 떠난 뒤에도 장마는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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