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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마 Apr 23. 2021

목욕탕 비너스

아토피와 나 2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목욕.


  정확히 몇 살 때였는지는 모르겠다. ‘빨간 고무 다라이’ 안에 들어가서 물세례를 받고 팔과 다리와 배, 등을 벅벅 밀렸던 것만 기억난다. 고통의 절정은 머리 감기다. 엄마 무릎에 허리를 대고 엉거주춤 눕는다. 상체를 뒤로 젖혀 마치 텀블링하듯이 고개를 꺾어 세숫대야에 머리칼을 담근다. 엄마는 두피가 벗겨질 만큼 꼼꼼히 비누칠을 하고 손빨래인지 헷갈릴 만큼 거친 손동작으로 내 머리와 얼굴을 씻긴 후, 상체를 들어 올려 앉힌다. 목욕탕 타일 바닥은 차갑고 축축해서 엉덩이를 대면 얼음연못 위에 앉은 듯이 시렸다.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머리도 울렸다.

 

 정기적으로 이 고통의 시간은 나를 찾아왔다. 엄마 손에 머리를 맡긴 동안, 신음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이를 꼭 물어야 했다.


서양에서는 빨간 고무 다라이가 아니라 파란 것을 쓰는구나.


  대중목욕탕에 처음 간 날이었다. 엄마는 집에서 언니와 나를 번갈아 씻겼으므로, 가족 아닌 사람의 알몸은 제법 성장했을 때까지 볼 기회가 없었다.


 대중목욕탕.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묵묵히 옷을 벗고 서로의 알몸을 보고 보이고 커다란 탕에 들어가 때를 불리고 벗기고 나오는 곳. 북극에서 가져온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차가운 우유나 사이다를 먹을 수 있는 곳. 물놀이를 싫어하는 아이가 없듯이 나도 대중목욕탕을, 정확히 냉탕을 매우 좋아했다. 작은 바가지 두 개를 위아래로 겹쳐 그 부력에 몸을 맡기고 어설프게 발을 굴려 수영 비슷한 것을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탕에 앉아 코까지 얼굴을 잠그고 눈만 낸 채로 사람들 몸을 관찰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대중목욕탕에 가보기 전까지, 모든 사람의 피부가 나와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아토피가 특이체질이 아니고 ‘사람’이 살면서 흔히 겪는 현상, 머리가 빠지고 이가 썩고 방귀가 나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며 대수롭지 않은 증상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주 약간 운 나쁜 사람들이 나처럼 경우가 심한 편일 뿐이라고만 생각했다. 몸에 아무것도 나지 않은 사람이야말로 독특한 체질이자 축복받은 몸이라고 믿었다.


  대중목욕탕에 가서 알았다. 나와 똑같은 피부를 가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거의 없는 게 아니라 하나도 없다는 것을. 오랜 시간 미온탕에 엎드려 남을 관찰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여태껏 아토피가 없는 엄마와 언니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거라 생각했는데, 나의 착각이었다. 정상적인 피부는 아토피가 있는 쪽이 아니라 비너스 조각상처럼 희고 매끄러운, 아무런 상처도 없는 쪽이었다. 비너스. 서양 미술전집에서 본 적이 있었다. 조개껍질 위에 우아하게 서서, 도자기처럼 흰 피부를 뽐내고 있던 신비로운 여인. 한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는 소중한 부위를 긴 머리카락으로 가리고 있었다(나중에 중학교에서 배웠다. 내가 기억하는 그 그림의 제목이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라는 것을).


 그런 사람은 세상에 오직 엄마와 언니, 둘 뿐인 줄 알았는데 대중목욕탕에서 만난 모든 여자들이 바로 그 비너스 같았다. 몸에 아토피가 없다는 점에서. 모든 여자의 몸은 참 아름답구나 느꼈다. 몸에 아토피가 없는 것만으로도.    

비너스는 아니지만 이 분도 참 아름답다.


  중학생 때였다. 녹차탕에 들어가 등을 내놓고 앉아있는데, 뒤에서 누군가 젖은 손으로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뒤돌아보니 학교 친구였다. 수영장이든 헬스장이든 모르는 사람들과 어울려 훌렁 훌렁 잘도 벗는 지금이야 상관없지만, 예민한 사춘기 시절에는 친구사이라도 서로 알몸을 보고 보이는 게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다. 나는 반가우면서도 민망해서 얼굴을 붉히며 탕에 상체를 다 담그고 목만 내놓은 채 인사를 했다. 친구도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탕에 누가 앉아있는데 등에 아토피가 보이길래. 혹시 너인가 싶어서 와봤는데 너 맞네.”


이러고 있었을텐데 어떻게 난 줄 알았을까?


  내가 좋아하지 않는 친구였다면 그 말이 상처가 되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친구였고, 친구에게 악의가 없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내 기분은 그리 나빠지지 않았다. 그때 목욕탕에서 만난 친구는 20년째 가까이 지내며 지금은 좁은 내 인간관계에서 더없이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저 멀리서 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으면 내 부모님은 나를 잘 알아볼 것이다. 중학교 동창조차도. 난 이때 일을 가끔 떠올리면서 웃는다. 너무 자책하지 않고, 적당히 재밌고 허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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