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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는 Jul 31. 2021

낯선 남자와 한 쇼파에서

히피친구 4

새벽 두 시가 넘어갈 무렵까지 우리는 테라스 안 쇼파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낮에 그 애를 처음 봤을 때도 이야기를 한시간 가량 나누었던 것 같은데 무슨 할 이야기가 그렇게도 많았는지 별 이야기를 다 나누었다. 자다가 깬 채로 그 애를 맞이한 나는 여전히 몽롱한 상태였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2년이 지난 지금은 구체적으로 기억도 나질 않는다.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것은 그 애의 눈빛이다.



그 애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특히 동양 문화에 대한 호기심이 엄청났는데,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것은 한국의 장례문화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장례식장을 대관하여 3일정도 장례를 치르고, 조문객들은 부의금을 준다는 말을 해주니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화장을 하는지 무덤에 묻는지 꽤 구체적으로 꼬치꼬치 물어봤던 기억이 난다. 처음 본 외국인 이웃과 한국의 장례 문화까지 이야기를 나눈다는 사실에 나는 오히려 생산적인 대화라고 생각했다. 그간 남자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이상형이나, 한국의 데이팅 문화나, 외국 남자랑 사귀어 본 적이 있냐.. 이런 수준에 대화에 그쳤기 때문에. 



그 애는 독일에서 가장 친한 자신의 친구들은 이란에서 온 애들인데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오히려 죽음을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라고 여긴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대화의 흐름은 죽은 후의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순간 순간을 대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 영혼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사실 2년 전의 나는 종교도 없었고(지금도 없지만), 내 온 관심사는 클럽이나 남자, 연애와 같은 단순 쾌락의 감정들에 불과했고, 아침부터 밤까지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던 아이였기에 죽음에 관해 눈을 또랑또랑하게 뜬 채로 그러나 나긋한 목소리를 지속하며 이야기를 해주는 그 애에게 알 수 없는 동경의 감정이 들었다. 



생각하고, 명상하고, 자연 속 영혼들을 느끼며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런 그 애의 모습은 온전해보였다. 나는 말을 거의 하지 않고 그 애의 이야기만 조용히 듣기만 하고 있었는데 가끔씩 맞장구를 치거나 내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그 애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뚫어지게 날 응시했고, 낮은 목소리와 특유의 말투로 나에게 집중했고 흥미로워했다. 이야기가 길어지며 서로 더 가까이 앉고, 벽에 기댄 머리가 서로의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하면서 내 코 끝에는 그 애의 몸에 밴 아로마 향기가 불쑥 들어왔는데 그 잔향과 그 애의 파란 눈, 낮은 목소리가 낯선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왜인지 모를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건너편 작은 나무 집에서 흘러나오는 노란 조명과 나무 사이로 비치는 달빛, 집 앞에 쌓인 나뭇잎이 바람에 사부작거리는 소리, 때때로 깡총거리며 뛰어오는 집 앞의 토끼들.  만남이지만 서로를 무언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기에 충분한 환경이었다. 너무 많은 이야기를 나눈 탓에 목이 완전히 잠긴 우리는 뜨문 뜨문 말을 이어가며, 어느새 그 애의 허벅지 위로 손깍지를 끼고선 쇼파에 앉아 잠시 잠에 들었다. 아침이 되기 전 우리는 잠에서 깨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 우리 또 보는거지?


그 애의 손을 잡고 잠시 잠에 청하며 그간 내가 그토록 싸워오던 공허함이 잠시 채워져서일까, 난 무의식적으로 다음의 만남을 기약하며 그 애에게 물었다.   


- 잘 모르겠네. 같이 놀러가면 좋은데, 그런데 내가 다음주부터 뮤직 페스티벌에 가려고 고향에 내려가서. 볼 수 있으면 보자.   



그러면 그렇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그 애가, 스스로로도 온전한 그 애가 나를 위해 페스티벌을 포기하고 기숙사에 남을 리가 없었다. 어짜피 나도 한달 내로 쾰른을 떠날 몸인데, 다시 보기 힘들 뿐더러 우리가 여기서 친구로서 인연을 이어가도 한달이면 흐지부지될 관계가 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그 애는 가볍게 나를 안아주고 성킁성큼 자신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그 후로도 그 애가 고향에 내려가기 전까지 그 애는 거의 매일 아침 내 방 테라스 창문을 두드리며 자고 있는 나를 깨웠다. 몇 번은 무시하고 잠을 자기도, 몇 번은 열려있는 창문 사이로 들려오는 그 애의 목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 퉁퉁 부은 얼굴로 아침 인사를 하기도 했다. 



며칠 후 그 애는 완전히 기숙사를 한동안 떠난 것인지, 온통 보이질 않았다. 트램 정거장으로 가기 위해선 그 애의 집 앞을 지나쳤어야 했는데 창문도 굳게 닫혀있었고, 그 애의 아랫집에 사는 이란 남자애가 사다리를 타고 화분들에 물을 대신 주는 것을 보고 그 애가 떠난 것임을 직감했다. 



여름 밤, 그 애와 테라스에서 보낸 신기한 밤 사이 나는 그 애에게 어떤 감정을 느낀 것인지, 이성적인 감정은 아닌 것 같으면서도 왜인지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가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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