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피친구 3
"Hallo"
누군가 내 발코니 창문을 두드렸다. 깊은 잠에 빠져있다가 몽롱한 상태로, 곧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깬 나는 창문을 살짝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늦었지? 나 왔어"
그 애는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정체모를 각종 치즈와 빵, 바베큐를 얹은 음식을 들고 내 방 테라스에 기대 있었다. 가로등 하나 없던 기숙사였고, 나무가 무성히 자라 유일한 빛이었던 달빛과 저 높은 건물 안의 조명을 가리고 있었기에 그 애의 실루엣과 반짝거리는 금발 머리만 보였다. 무슨 생각으로 남의 집 발코니에 밤 중에 들어와 창문을 두들긴 것인지, 당황스럽기도 하면서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아마 바로 경찰에 신고했겠지?) 경험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내심 웃기기도 했다. 무서울 법도 했지만, 교환학생은 반쯤 나사가 빠진 채로 살아야 재밌는 거라고 모든 사람은 다들 Crazy하지만 감추고 살고 있는 거라고 나에게 진지하게 말했던 친한 친구의 이야기가 떠올라 그저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발코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벽에 기대어 섰다. 새벽의 기숙사는 조용했다. 잔디밭에서 파티를 하던 애들은 다 각자 집으로 흩어졌고, 도로와도 조금 떨어져 있기에 풀벌레 울음소리만 들렸다. 그 애에게 널 기다리다가 잠들었다고, 왜이렇게 늦게 왔냐고 물었다. 난 이미 옷도 갈아입었고 씻었다고.
그 애는 바리바리 싸온 음식을 나에게 건내주고, 자기가 치즈를 구웠는데 한 번 먹어보라고 하며 말을 돌렸다. 언제 뭘 하자고 약속 아닌 약속을 해놓고, 두루뭉술 넘어가는 어떤 유럽인들의 태도에 지쳐있을 때였기에 조금 짜증나기도 했다. 특히, 나는 곧 이 곳을 떠날 것이 예정된 애였기에 나에게 '언제 뭘 하자', '다음주에 어디에 놀러가자' 라는 말을 해놓고 말의 흔적도 없이 시치미를 떼는 아이들이 몇 몇 있었는데 처음에는 멍청이처럼 언제 연락이 올런지 계속 기다리기만 했고 몇 달이 지나서야 이런 말들이 다 빈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동양권에서 온 친구들은 '약속'이 '약속'이었지만, 프랑스 등 유럽에서 온 몇 몇 친구들에겐 아닌 듯 했다. 특히, 자유로운 영혼의 삶을 표방하고, 처음 본 사람들에게도 매우 친근하게 다가서며 술과 여행, 파티를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이런 경향이 더 잘 나타나는 것 처럼 느껴졌는데, 어떤 일에 책임을 절대 지지 않고자 하는 마음이 말버릇에 담긴 것 같다고 나 혼자 결론을 내렸다.
생각해보면 이 애도 어떤 식으로든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사는 애였으니, 얘가 나에게 남긴 언지와 약속들은 그저 비눗방울과 같이 금방이라도 톡 터질 것이라는 것을 알았어야 했다. 그제서야 이 애에 대한 대략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얘도 그냥 나랑 어떻게 해보려는 거 아니야?'라는 의구심이 들다가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독일에서의 마지막 한 달을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려 기를 쓰고, 관계를 증명하는 것에 힘을 쓸 필요가 있겠냐고. 만나고 곧 헤어질 상대방이기에 그저 순간의 감정, 서로에 대한 이해에 집중하며 그리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대화와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은 어떻겠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