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안 되는 경력

사마귀 앞발처럼

시청에서 만난 노인의 주된 업무는 도장 찍기였다. 시청 민원실에는 총 12개의 창구가 있는데, 그 중 초청장 업무를 담당하는 건 1번과 2번 창구 두 개 뿐이었다. 노인은 항상 2번 창구에 앉아 일을 봤는데, 두 창구의 역할이 어떻게 다른진 몰라도 하나 분명했던 건 2번 창구와 달리 1번 창구의 직원은 수시로 사람이 바뀌었다는 점이다. 지난 2년간 초청장 때문에 수도 없이 이 곳 민원실에 드나들었지만 1번 창구에 같은 직원이 앉아 있는 걸 본 기억은 없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도장 찍는 노인은 언제나 2번 창구 자신의 자리에 앉아 묵묵히 도장을 찍고 있었다.

 

가슴팍 명찰에 붙은 노인의 이름은 무스타파였다. 본래 혁명전쟁에 참전했던 군인 출신이라고 하는데 무슨 까닭으로 이 곳 민원실에서 일을 하게 된 건지 그 배경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얼핏 듣기로 전쟁이 끝난 다음 먹고 살 길이 막막해진 퇴역군인들이 대규모 가두행진을 벌였는데, 시위확산을 두려워한 알제리 정부가 재향군인회 같은 조직을 만들어 그들에게 여러 공공일자리를 안겨 주었다고 한다. 그 덕에 시위에 참여했던 무스타파 노인도 얼떨결에 공직 하나를 배정받았는데, 그 일이 이 곳 시청 민원실 2번 창구였다는 것이다.

 

나중에 추가로 안 사실이지만 노인은 같은 창구에서 도합 30년을 일했다고 한다. 놀라운 경력이지만 그와 별개로 정작 내가 노인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그의 손목 때문이었다. 노인은 모든 업무를 왼손으로 봤는데 특이하게 도장 찍는 일만은 오른손으로 했다. 어느 날 노인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는 무료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 짓을 하도 오래했더니 손목이 아예 도장찍는 모양으로 굳어 버렸어" 무슨 말인가 싶어 봤더니 아닌 게 아니라 그의 오른손목이 사마귀 앞발처럼 팔 안쪽으로 심하게 꺽여 있었다. 놀란 마음도 잠시, 그는 내친 김에 자신의 오른 소매까지 걷어 붙이며 한 마디 덧붙였다 "이놈의 손모가지, 이제 도장 찍는 일 말고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어, 제길"

 

노인을 보니 문득 어린 시절 봤던 전쟁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독일군 병사로 보이는 한 남자가 유대인 포로를 끌고 인근 공터로 갔는데, 그 곳에서 포로는 병사의 지시에 따라 열심히 땅을 파기 시작했다. 여러 날 같은 곳을 팠더니 어느새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야 할 만큼의 구덩이가 생겼다. 그러자 병사는 갑자기 구덩이에 걸쳐 놓았던 사다리를 치워버리고 자기 막사로 돌아가 버렸다. 깜짝 놀란 포로는 구덩이를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지만,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단단한 흙벽을 오를 수가 없었다. 그 후 하루 걸러 먹을 것을 들고 나타나던 병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구덩이를 찾는 횟수가 줄었고, 결국 다른 지역으로 전출을 가면서 포로는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 안에 갇혀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노인과 포로의 공통점은 둘 다 한 가지 일만 죽어라 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노인은 사마귀 앞발의 장애를 얻었고 유대인 포로는 자기가 판 무덤에 갇혀 어이없게 죽었다. 한 가지 일을 10년 이상 하면 전문가 소리를 듣는다고 하는데, 그 전문성이 생계를 보장하지 못하면 거꾸로 독이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얼마 전 회사는 수평적 조직문화를 만든다며 내 직급을 '프로' 로 바꿔 버렸다. 그럼 나는 13년차 프로 직장인이 되는 셈인데, 이 회사를 나가서도 이 프로 기술이 생계 유지에 도움이 될 지는 모르겠다.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든다. 무스타파 노인처럼 내가 이 조직에서 30년을 꼿꼿이 버티면 회사를 나가서도 생계 걱정없는 전문성을 갖게 되는걸까, 아니면 그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장애만 남는걸까.

 

몇 일 전 권고사직을 받고 퇴사하는 모 부장님의 송별 문자를 받았다. 그 분은 30년 근속을 딱 2년 앞둔 시점에 짐을 꾸리려니 못내 아쉬움이 남는다고 했다. 사실 직장인에게 2년 모자란 30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찌 보면 오래 일할수록 '한계효용'이 떨어져 다른 기업에서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그러니 점점 지금 다니는 회사에 더욱 집착하게 되고, 이런 순환이 반복되면 앞서 구덩이에 빠진 포로처럼 스스로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멍청이가 된다. 그러니 모 부장이 말한 30년은 오히려 기피 대상에 가까운데, 그 분은 퇴사를 앞둔 순간마저 그걸 목표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월급쟁이 13년차에 들면 고민이 많아진다. 회사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나를 '전문가' 혹은 '프로' 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들 단어의 속뜻은 '나는 모르겠으니 네가 알아서 다 하라' 는 뜻이다. 회사는 조금만 방심해도 일이 넘어온다. 아무리 회사 안에서 전문가 소리를 들어도 회사 밖에서는 결국 노인의 오른 손목만큼의 가치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고민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가능할 때 이 구덩이를 벗어날 지, 아니면 장애를 안더라도 어느 정도 체념하며 사마귀 앞발로 살아갈지. 답은 명확한데 용기가 없어 찍지 못하는 슬픈 밤이다. 만일 노인처럼 공직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1번과 2번 중 어느 창구에서 일을 하게 될까. 비록 만약이라는 가정이지만 부디 그 선택이 1번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