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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b I way Apr 18. 2023

사랑의 증거

오빠는 왜 매번 그대로야

어른들 말씀이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데 내 지난 삶을 돌아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조금 늦은 나이에 군 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돌아왔더니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보고 깜짝 깜짝 놀란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내가 너무 깨끗해져서 몰라보겠단다. 군대가 무슨 세탁기도 아니고 내가 그렇게 더러웠다는 뜻이냐고 물으니,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어떻게 그걸 여태 몰랐냐고 되묻는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보통 '깨끗' 보다는 '깔끔' 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나?)

알제(ALGER) 생활을 시작한 후로 서울살이 보다 훨씬 더 자주 청소를 한다. 상시점검으로 모자라 적어도 2주에 한 번씩 대청소를 한다. 집안에 고양이를 한 마리 들인 후부터 청소 강도는 더욱 심해졌다. 알제 사막의 두터운 황사먼지를 경험한 뒤로 유리창 청소는 절대 1주일을 넘지 않고, 바닥청소는 2주에 한 번, 생활 쓰레기는 매일 저녁 한 곳에 담아 비워내고, 내가 쓰는 욕실과 고양이 변소 역시 수시 점검, 정리한다. 설거지는 요리하는 중간중간 미리 하고, 식사를 마친 뒤 남은 그릇까지 까끗이 닦아 놓으면 비로소 청소가 끝난다.

한 번씩 대청소를 끝내고 나면 몸은 무겁지만 마음은 되려 가볍다. 특히나 말끔해진 유리창이 이른 아침 황금빛 햇살을 한그득 안고 들어오는 날에는 뭔가 새롭고 낯선 일, 조금은 두려운 과제까지 과감하게 도전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새로 시작하는 인생의 충만한 에너지 같은 것이 용솟음친다.


하지만 묘하게도 다시 한 주의 업무가 시작되고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이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집 상태에 적잖이 놀라곤 한다. 그간의 내 노력이 다 어디로 갔는지, 아직 몸 이곳저곳 남아있는 근통이 지난 내 노고를 말해주는데 청소의 흔적만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집안이 지저분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집안은 늘 정돈이 잘 돼 있는 편이었다. 다만, 대청소의 전후 상태가 뚜렷이 구분되지 않아 조금 허탈하다는 말이다.


한참 결혼에 진지했던 서른 중반 어느 연애, 지금 이 청소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적이 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상당히 을의 입장에서 연애를 한 셈인데, 상대 눈높이에 맞춘답시고 빈 지갑 탈탈 털어 나름 패션에 공을 들였던 시기다. 물론 노력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다. 머리 속으로 온갖 디자인을 조합해 피팅룸에 들어가면 웬 두꺼비 한 마리가 진주 목걸이를 차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한참 쓸데없는 고민 끝에, 그래 옷은 문제가 없지, 이렇게 태어난 게 문제지, 라며 자학하고 늘 입던 스타일의 옷만 여러 벌 골라 나온다.


나의 갑 상대인 여성은 강남 토박이에 전국이 아는 이름의 아파트에 거주하고, 부모님께 칭찬받아 일금 천 만원을 용돈으로 하사받는 집안의 장녀였다. 당시 나는 그 버거운 연인과 또래 지인들 모임에 초대받아 S기업 회장이 즐겨 찾는다는 압구정의 모 카페를 찾았다.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고 은밀한 스캐닝이 끝나면 서로의 직업과 취미를 묻는다. 이어 맛집과 쇼핑에 대한 '논의'가 끝나면 나는 어느새 서민 두꺼비에서 찢어지게 가난한 두꺼비가 된다.


모임을 파하고 돌아가는 길 중간, 뜬금없이 그녀가 물었다. "근데 오빠는 왜 매번 똑같애?"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끔뻑끔뻑하며 쳐다 보는데, "오늘 친구들 만나는데 신경 좀 쓰지 그랬어. 아까 친구 남친들 못 봤어?" 하고 덧붙인다. 물론 봤다. 안 볼 수가 없지. 하지만 본다고 달라지는 게 있겠나. 그녀가 말한 남자들은 내 수준에 따라하기도 어렵고 흉내마저 버겁다. 그렇다고 내 삶이 억울한 건 아니다. 각자 세상 사는 즐거움이 다른 것 뿐인데, 그녀는 내가 그들처럼 변하지 않는다고 불평이다. 하지만 그 날 내 모습은 비록 헌 집 두꺼비의 형상일지라도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결과였다.


노력해도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건 슬픈 일인다. 하지만 우린 결과보다 노력의 과정에서 더 큰 감동을 느낀다. 세상은 그런 감동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누군가 나의 집을 방문해 '이 집은 언제 봐도 똑같애' 라고 운을 띄운다면, '그건 이 집 주인이 엄청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라고 답을 해줄 것이다. 내 옆에 있는 누군가 늘 그대로인 모습이 지겹다고 느낀다면 오늘 당장 청소부터 해보시길 권한다. 해도 해도 끝이 없고, 티도 나지 않는 것이 집안일이다. 내게 소중한 누군가의 어제와 오늘 모습이 동일하다면, 그건 그 사람이 나를 위해 엄청 노력하고 있다는 증거다. 바로 나를 사랑한다는 확실한 증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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