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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b I way Apr 18. 2023

기생충

원소스 멀티유즈. 어차피 일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19년 6월 20일, 미국 프로야구 ‘워싱턴 내셔널스 VS 필라델피아 필리스’ 와의 경기. 포스트시즌을 세 달여 앞두고 리그 하위권에 머물러 있던 내셔널스 타석에 베네수엘라 출신의 무명선수 ‘헤라르도 파라(Gerardo Parra)’ 가 등장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같은 해 2월 자이언츠에서 방출된 파라에게 큰 기대를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의 등장과 함께 경기장을 가득 메운 응원가는 일시에 경기장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잠시 어리둥절하던 관중들은 이내 너나 할 것 없이 일어나 양팔을 위아래로 흔들며 크게 춤을 추었다. 주위의 만류에도 파라가 끝끝내 고집을 꺽지 않았던 새로운 응원가 ‘핑크퐁 아기상어’의 미국 메이저리그 데뷔 순간이었다. 비록 시즌 후반에 접어 들수록 주전보다 벤치를 지키는 날이 더 많았지만, 파라는 이에 주눅들지 않고 아기상어와 함께 관객의 열띤 호응을 유도하며 응원단장으로서 워싱턴 내셔널스의 사상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도왔다.


사실 아기상어는 파라의 테마송이 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특히 ‘16년 업로드한 ‘핑크퐁 아기상어 댄스’ 영상은 ‘22년 유투브 사상 첫 누적조회수 100억뷰를 기록하며 엔터테인먼트 분야의 새 시대를 열었다. 그런데 나는 아기상어 보다 그 캐릭터가 만들어 낸 각종 파생현상에 더욱 이목이 갔다. 당시 아기상어는 산업이 아니라 헤게모니, 즉 만국 공통의 시대정신에 가까웠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아기상어는 전 세계 음원시장을 집어 삼키며 이제 세상 어디를 가도 ‘뚜루루뚜루’ 하는 상어가족 테마를 들을 수 있고, 유아용품 매장에는 상어가족 베개부터 장난감, 각종 침구류, 의상, 과자, 양말에 이어 아기상어 화장지까지 진열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 곳 알제리마저 핑크퐁 모자를 쓰고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볼 수 있으니, 상어가족이 아예 온 세상을 집어 삼켰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 같다.  


이처럼 하나의 성공 컨텐츠로 여러 장르의 파생시장에 접목하는 마케팅 기법을 ‘원소스 멀티유즈 (One Source Multi Use : OSMU)’라고 한다. 예를 들면, BTS의 성공으로 한류문화 컨텐츠 시장이 전반적으로 호황을 맞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아기상어에 앞서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나라 기업이 이 OSMU 기법을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OSMU의 궁극 목표는 하나의 원천기술로 100가지 성공사례를 만드는 것이다. 반면, 우리 기업은 이와 반대로 100명이 해야 할 일을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것으로 OSMU를 이해했다. 즉, 기업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기 위해 오늘도 누군가는 혹사를 당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마치 20% 인원이 기업 매출의 80%를 책임진다는 ‘파레토 법칙’ 과도 연관이 있는데, 원소스 1인을 파레토 20에 비유하면 기업 내 소수 인원이 결국 회사업무 대부분을 맡아서 한다는 의미가 된다. 


문제는 파레토 20에 해당하는 인원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인데, 원소스도 사람인지라 언제까지고 80인의 무게를 견디며 살 수는 없다. 피로가 쌓이고 스트레스가 임계점에 이르면 압사의 공포를 느낀 원소스들은 서둘러 사표를 던지고 줄행랑을 친다. 그리고 남은 원소스는 이제 20대80이 아니라 10대90 혹은 5대95를 감당해야 할 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열심히 구직사이트를 돌아다닌다. 그럼에도 남은 80인의 기생충들은 결코 자신들의 손으로 일을 할 수는 없으니, 이제 일할 사람을 외부에서 대거 영입하기로 한다. 하지만 경력직도 바보가 아닌 이상 OSMU 기업에서 오랜 시간을 버티기는 힘들다. 웃긴 건 죽어라 일하는 파레토의 20보다 80의 기생충 무리가 더 많은 급여를 받는다는 점인데, 이런 부조리한 현실에 지친 나머지 정작 일할 사람은 떠나고 무능한 사람들만 남아 결국 기업은 그레셤이 말했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현상’이 생겨난다. 


고등학교 시절 유독 달리기를 잘 하던 친구가 있었다. 피 씨 성을 가진 그 친구는 도내 단거리 신기록을 보유할 만큼 촉망받던 선수였는데, 아쉽게도 교내 육상부에는 그와 견줄 만한 주전 선수가 없었다. 그렇게 선수가 없다는 이유로 친구는 코치의 지시에 따라 장단거리 따지지 않고 대회에 참가했는데, 심지어 멀리뛰기, 장대높이뛰기 시합까지 참가하는 일도 있었다. 당시는 스포츠과학이나 선수생명에 대한 개념이 거의 전무하던 시절이었다. 누가 무엇을 잘 하는지 세세히 따져 볼 겨를도 없이 선수 한 명당 받을 수 있는 지원금만 계산하며 다단계처럼 아이들을 대회에 우겨 넣었다. 그러다 결국 우려하던 사고가 터졌는데, 멀리뛰기 도움닫기를 하던 그 친구의 발목이 피로골절로 그만 주저앉아 버린 것이다. 그 후 친구는 약 3개월 간의 병원 치료를 받았고, 적절한 휴식기를 거친 다음 무사히 학교에 복귀했다. 그런데 복귀 첫 날 친구는 육상코치로부터 내달 마라톤 경기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들었다. 친구와 그의 부모님은 오랜 고민 끝에 결국 전학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 피씨 성의 그 친구는 전국체전에서 뛰어난 실력으로 단거리 종합 순위 2위에 올랐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 왔다.


여기 내 친구의 전학 결정을 두고 배신자라 욕하며 손가락질 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 친구는 앞서 언급한 OSMU 전략의 전형적인 원소스 인력이었다. 아마 친구가 코치 말 대로 마라톤까지 뛰었다면 그의 다음 순서는 분명 발목이 아니라 무릎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잘 달렸던 선수 정도의 기억으로만 남아 쓸쓸히 고등학교 생활을 정리하고 돈 밖에 모르는 코치는 또 다른 희생양을 찾아 '다단계 영업'을 시작했을 것이다. 본래 파레토의 80 인력은 고마운 줄 모르고 받을 줄만 안다. 그러니 굳이 내 팔이 안으로 굽지 않았더라도 친구와 그의 부모는 당시 아주 현명한 선택을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친구의 전학 결정은 ‘그 때도 옳고, 지금도 옳다.’ 반면, 13년째 아직 회사에 붙어 사는 나는 과연 원소스 인력일까 아니면 파레토 80에 붙어 사는 기생충 무리일까. 곧바로 답이 나오지 않아 무척 심란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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