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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b I way Apr 18. 2023

염치 없는 두꺼비

언제부터 나이를 먹은걸까


포크레인, 지게차 같은 건설기계를 임대하는 업체사장이 얼마 전 회의 말미에 광고를 하나 보여주었다. 마라톤 광고였는데 장장 4백 킬로미터 코스를 일주일에 거쳐 완주하는 사막 경기였다. 자신을 48년생이라고 소개한 그 노인은 이번 겨울 온 가족이 함께 참가할 계획이라며 내게도 같이 갈 것을 권했다. 그 말에 나는 별 생각없이 이제는 나이가 들어 힘들다며 단박에 거절했다. 그러자 그 노인은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듣는다는 표정으로 백발노인도 히말라야 등정하는 세상에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나이 탓을 한다며 핀잔을 준다. 나는 아차 싶었지만 그렇다고 사막에서 수백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굳이 타인들과 경쟁하며 달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별다른 대꾸없이 살포시 웃어넘겼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한 가지 일화가 떠올랐다. 몇 달 전 함께 일하는 직원이 둘째를 낳았는데 한껏 들뜬 표정으로 아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처음 임신 소식을 알려 올 때만 해도 잔뜩 우울한 표정이더니, 막상 해산을 하고 보니 다시 생기가 도는 모양이었다. 작년에 첫 째를 낳았으니 올해 바로 연년생을 낳은 셈인데 몸은 괜찮으냐고 물었더니 퇴근 후 아이들이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날의 피로가 모두 말끔히 가신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도 어서 짝을 찾아 똑같은 기쁨을 느꼈으면 한다기에 나는 이미 나이가 들어 힘들다며 고래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랬더니 결혼에 무슨 나이를 따지냐며 언성을 높이기에 그 날도 별 다른 말 없이 손사래만 치고 돌아섰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문득 묘한 궁금증이 생겼다. 나는 대체 언제부터 나이를 먹은 걸까. 회사에서 마라톤 동호회까지 했으니 달리기가 무조건 싫은 건 아니요, 언젠가는 좋은 사람 만나 애를 갖는 상상도 해봤으니 딱히 결혼이 싫은 것도 아니다. 단지 말로서 수긍한들 금방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섣불리 ‘예’ 하고 대답했다가 지키지 못하면 괜히 실없는 사람 취급에 불편한 대화만 길어질 수 있으니 우선 덮어두고 보는 것이다. 좋게 보면 신중한 성격이고 달리 보면 판단력이 흐려지는 것인데 나이가 들면 판단력은 자연히 떨어지게 마련이니 어찌 보면 나이가 든다는 건 결국 결정장애를 겪는다는 말이 아닌가 싶다.


사실 확실한 선택지가 있다면 굳이 결정장애를 겪을 필요도 없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결혼 문제만 해도 그렇다. 우리가 잘 아는 어느 염치없는 두꺼비 이야기처럼 헌 집 주고 새집 받는 조건이면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문제는 상대방 두꺼비도 똑같이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두꺼비들이 만나면 각자 조건만 저울에 달아 놓고 아무런 결론 없이 오늘 커피값은 누가 내나, 하는 못난 고민만 하다 헤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결혼은 서로 피차 가진 것 없는 어린 시절에 하는 게 낫다는 말까지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돈 주고도 못 사는 그 어린 시절 다 보내고 여태 홀로 남은 두꺼비는 오늘도 철 없이 새 집 가진 두꺼비나 기웃거리며 쓸쓸히 밤을 보낸다.


한때 미쳐 살았던 드라마 ‘아일랜드’ 에서 배우 이나영이 남편 ‘강국(현빈)’ 에게 이런 말을 했다 “너와 있으면 참 좋아. 편하고 따뜻해. 그런데 국아, 그 사람은 말이야, ‘함께 불행해도 좋을 사람’이야. 그 사람은 내가 필요해.” 참 어려운 말이다. 하지만 현실의 어려움을 차치하고라도 당당히 함께 불행해도 좋을 사람을 택하는 이나영의 용기가 가슴 한 켠을 찐하게 울린다. 이건 헌 집도 필요 없으니 내가 가진 새 집으로 이사 오라는 따뜻한 인간의 초대가 아닌가. 그런데 요즈음 결혼은 내가 가진 집에 상대방 집까지 얹어 이층 양옥을 지어야 속이 후련하니 드라마는 역시 현실과 다른가 보다.


몇 달 전 아비장으로 출장을 갔다. 초행길이라 우선 제대로 된 호텔부터 잡고 싶었는데 한도가 빠듯하니 조금 괜찮다 싶은 곳은 여지없이 예산 초과였다. 그럼에도 여기저기 묻고 손품을 팔았더니 적당히 예산 내에서 묵을 만한 곳을 찾았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한 번 괜찮은 숙소를 찾고 보니 더 나은 옵션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하루 꼬박 찾아 다녔더니 정말 더 나은 숙소가 여럿 보이는 게 아닌가. 앞서 찾은 숙소로 예약하지 않은 걸 다행이라 여기며 또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막상 결정하려고 보니 혹시나 더 괜찮은 장소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 또 결정을 미루고 미루다 결국 출장 전날까지 마음을 졸여야 했다.


오늘 와서 보니 내가 나이를 먹긴 먹었다는 생각이 든다. 시원하게 드러내고 초대할 집도 없고 호텔 하나 잡는데도 이런 결정장애를 보이고 있으니 참 딱한 노릇이다. 최근 휴대전화를 새로 장만하려고 근처 매장을 찾았다.가장 저렴한 폰을 달라고 했더니 한국에서는 이미 문화재가 되어 버린 슬라이드 폰을 보여준다. 그 폰으로 이것저것 스마트 기능 사용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점원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진다. 적당한 값에 중저가 스마트폰을 들고 매장을 나오는데 가판에 진열된 최신 폰들이 눈에 들어왔다. 손에는 중저가 폰을 들고 눈은 갓 출시된 Z플립에서 눈을 떼지 못하니 올해도 이 두꺼비는 혼자 쓸쓸히 겨울잠이나 자려나 보다. 참으로 딱하고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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