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대로 살아보기
보통 '먹고 살기 위해' 라는 말이 붙으면 좋아하던 취미도 지긋지긋한 일이 된다. 일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하기 싫은 일, 억지로 하는 일, 마지못해 하는 일, 시키니까 하는 일, 심지어 죽지 못해 하는 일이 된다.
그런데 가끔 일처럼 시작한 일이 취미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내게는 요리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나는 그 좋다는 미국 한 번 못 가보고 일반인은 평생 가볼 일 없는 민주콩고에서 9개월을 살았다. 왔다 갔다 지내온 세월까지 모두 합치면 대략 2년쯤 될거다. 한국에서는 뭐든 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돈만 주면 구할 수 있지만 민주콩고 같은 곳에서는 돈으로 해결 못 하는 일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두부가 먹고 싶은데 두부 파는 곳이 없으니 콩을 한 되 사서 직접 만들어 먹어야 하는 일이다. 어찌 보면 달리 선택할 길이 없어 시작한 일인데, 공 들여 음식을 만들다 보니 어느새 재미가 붙었다.
두부를 만드려면 당연히 콩부터 구해야 한다. 다행히 콩고 인심이 좋아서 굳이 돈 쓸 필요없이 인근 식당에 들러 콩 한 소쿠리 부탁하면 환하게 웃으며 수북이 담아 준다. 콩을 구했다면 일단 깨끗이 씻어 한 번 푹 삶은 다음 곱게 갈아서 큰 솥에 넣고 팔팔 끓이기 시작한다. 불 위에 얹었다고 끝난 것이 아니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간부터 나무주걱으로 계속 저어 주어야 한다. 휘휘 젓는 방향도 눈 만난 강아지처럼 정신없이 나대지 않고 한 길 따라 천천히 둘러쳐야 한다. 멍하니 한참을 저어주다 보면 슬슬 부드러운 앙금이 생기는데, 그런 앙금을 모아 모판에 붇고 적당히 식혀 주면 그럴듯한 모양의 두부가 완성된다.
요리는 상당히 능동적인 활동이다. 누군가 만들어 준 대로 먹지 않고 내 입맛에 맞춰 재료를 고르고 간을 한다. 두부를 생각하기 전에는 김치꽁치찌개를 자주 만들어 먹었다. 김치꽁치찌개는 보통 김치와 꽁치가 들어가지만 나는 내 입맛대로 참치도 넣고 돼지고기도 넣었다. 그러면 빌리엘리엇 뮤지컬에 빌리가 조연이 된 것처럼 김치꽁치찌개에 꽁치가 어색하게 껴있는 듯한 신메뉴가 탄생한다. 두부도 원한다면 검은콩을 넣은 검정두부가 될 수도 있고, 불조절과 식힘 정도에 따라 연두부가 될 수도 있다. 요리는 메뉴대로만 살지 말고 메뉴판을 직접 차리며 살아 보라고 나를 이 먼 곳 콩고까지 보낸 회사의 불편한 배려에 따른 결과가 아닐까.
P.S.
한국에서 살 때는 돈을 아끼려고 집에서 요리를 했다. 민주콩고에서 살 때는 먹고 싶은 걸 구할 수 없으니 만들어 먹었다. 한 번 아프리카 꼬리표가 붙으니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흔적이 사라지지 않아 지금은 다시 아프리카 최북단 알제리에 와서 일을 하고 있다. 알제리는 터키와 프랑스의 문화가 많이 녹아 있는 나라다. 두 나라 모두 제빵기술에 일가견이 있다. 빵 만드는 역사도 유구하다. 그래서 알제리에 사는 나도 빵을 즐겨 먹는데, 순간 민주콩고에서 살던 기억이 떠올라 빵을 먹는 김에 아예 '내 빵'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사진에 나와 있는 빵은 실패작이다. 그것도 처참히 실패했다. 반죽을 하고 냉장고에 넣어 숙성하는 시간까지 꼬박 이틀이 걸렸는데, 정작 이스트가 제대로 부풀지 않아 목이 매어 죽을 만큼 텁텁한 반죽 덩어리가 되었다. 그래도 버터를 조금 녹인 다음 붓으로 촘촘히 발라 놓으니 그럴듯한 빵 형상은 갖췄다. 맛은 포기했지만 그럼에도 오븐에 담아 익히는시간 동안 온 집안이 빵 굽는 냄새로 가득했다. 오븐 앞에 앉아 빵이 구워지길 기다리는 약 15분의 시간, 기분 좋게 떠다니는 여러 생각들이 모여 한 장의 글이 된다.
빵 만드는 일이 이렇게 힘든데, 나는 불평 한 마디 없이 홀로 버티며 꿋꿋이 오븐 앞에 앉아 있다. 일처럼 힘든데 취미처럼 기분은 좋다. 빵을 굽다 보면 뭔가 내 인생을 능동적으로 사는 것 같아 기쁘다. 삶이 뭔가 허투루 지나지 않는 것 같아 즐겁다. 그래서 일처럼 시작한 취미를 오늘도 그만두지 않고 열심히 또 열심히 하는가 보다. 앞으로는 맛이 없는 글이라도, 이스트가 숨 쉴 구멍을 찾아 열심히 반죽을 밀어내듯, 하루의 능동적인 삶을 기록해보기로 했다. 내일은 크루와상까지 만들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