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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b I way Oct 23. 2023

명품의 반전

마음 만으론 안 되는 결혼 그리고 사랑

1794년, 혁명의 뜨거운 열기는 식고 단두대의 서슬 퍼런 칼날이 온 도시 곳곳을 휘감던 공포정치 시절, 성난 군중의 함성 뒤로 제복 차림의 한 남성이 파리 시내 한 보석세공인의 거리에 들어섰다. 어딘가 부상을 입은 듯 남자는 연신 자신의 배를 움켜쥐며 아슬아슬 힘겹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결국 어느 작은 상점 앞에 쓰러져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는데, 처음부터 이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보석세공인 니토(Marie Etienne Nitot)는 잠시 바깥 동정을 살피더니 서둘러 밖으로 나가 자신의 가게 앞에 쓰러진 남자를 들쳐 메고 들어왔다. 다행히 남자는 몸집이 작아 나이 든 니토가 업기에도 무리는 없었다. 남자의 앞섶은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부상 정도가 심하지는 않았다. 이 날부터 남자는 니토의 보살핌을 받으며 서서히 몸을 회복해갔다. 약 일주일의 시간이 흐른 뒤 남자는 니토가 나눠준 옷을 입고 다시 길을 나섰다. 가게를 나서기 전 남자는 니토를 돌아 보며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반드시 돌아와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 평소와 다름 없이 자신의 가게 앞을 청소하던 니토는 한 무리의 기병대가 거리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호기심과 공포가 반쯤 뒤섞인 표정으로 무장 기병들의 사열을 지켜보던 니토는 잠시 뒤 대열 가운데 금장(金藏) 마차에서 자그마한 체구의 한 남자가 내리는 걸 보았다. 그 남성은 자신의 옷 매무새를 조금 다듬더니 곧장 니토의 가게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니토는 순간 공포에 질려 온몸에 심한 경련이 일었다. 마차에서 내린 남자가 자신의 코 앞까지 다가왔을 즈음 니토는 양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고꾸라질 뻔 했다. 순간 남자는 자신의 몸을 바싹 낮춰 쓰러지는 니토를 밑에서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여전히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의 양손을 꼭 감싸 쥔 채 설핏 웃으며 말했다 ‘겁내지 마십시오. 빚 갚으러 왔습니다.’


2년 전 묵은 빚을 갚기 위해 니토의 가게 앞에 불쑥 나타난 이 남자의 이름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세’ 훗날 프랑스 제 1공화정의 황제가 되는 인물이다. 그는 먼저 은혜에 보답하는 의미로 니토를 자신의 왕실 전담 세공인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곧 있을 황제 대관식에 필요한 모든 보석의 세공과 납품을 니토에게 맡겼다. 당시 파리의 모든 유행은 소위 ‘왕실 패션’이 주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황제 내외가 착용한 의상과 보석의 파급력은 가히 절대적이었다. 그렇게 니토의 보석은 파리 궁정을 중심으로 점차 귀족사회에 유행처럼 퍼져 나갔고, 황제의 대관식 당일 황후 조세핀(Joséphine de Beauharnais)이 직접 쓰고 나온 ‘티아라(Tiara)’ 왕관(Crown)으로 니토의 보석은 파리를 넘어 전 유럽에까지 그 명성을 알렸다. 아쉽게도 나폴레옹의 실각과 함께 니토의 삶도 암흑기를 맞았지만, 당시의 유명세를 기점으로 니토의 가게가 있던 방돔광장(Place Vendome)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그가 죽은 지 약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전히 유럽 내 대표 메종(Maison) 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는 니토의 가게는, 최근 배우 송혜교가 모델로 나와 국내에서도 제법 알려진 프랑스 명품 브랜드 ‘쇼메(Chaumet)’ 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국내 쥬얼리 인기 브랜드 목록에서 쇼메의 이름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간 전통강자로 군림했던 ‘티파니앤코, 블가리, 까르띠에’ 等 브랜드는 여전히 상위 포지션을 차지하고 있지만 똑같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쇼메는 어찌된 영문인지 유독 국내에서 만큼은 인기가 없다. 한 브랜드 전문가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가볍고 세련된 이미지를 추구하는 최근 트랜드에 반해 쇼메는 여전히 ‘무겁고 올드한’ 이미지를 탈피하지 못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역사로만 보면 앞서 언급한 다른 브랜드에 비해 쇼메가 단연 으뜸이지만, 오래된 만큼 그의 무거운 이미지가 시시각각 변하는 한국 트랜드의 속도를 따라잡기는 역부족이었나 보다.


내가 처음 쇼메의 역사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건 약 5년 전 H백화점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나는 압구정에 사는 한 부잣집 여성을 만나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녀의 집 근처 백화점에서 약속을 정하고 보는 일이 잦았다. 하루는 그녀가 1층 명품관에 있다기에 나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재촉해 백화점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명품관에서 만나 천천히 매장을 둘러 보는데 마침 쇼메 브랜드가 눈에 띄었다. 빈 지갑이었지만 눈이라도 호강하자는 생각에 나와 그녀는 함께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살 생각도 없이 마냥 둘러보기만 하려니 일순 무료한 기분이 들어 그녀에게 쇼메 메종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 반응 없이 듣고만 있던 그녀가 나폴레옹 이름이 호명되는 순간 눈을 반짝이기 시작하더니 종래에는 ‘정말 섹시한 역사’ 를 알게 되었다며 반색을 했다. 비록 지갑은 헐거웠지만 그녀의 명품 칭찬에 나도 이 매장에 어울리는 사람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그로부터 일주일, 그녀를 만나고 정확히 백일 째 되는 날. 어떤 선물을 할까 고민하던 차에 문득 지난 주 방문했던 쇼메가 떠올랐다. 섹시한 역사를 좋아한다던 그녀를 위해 지난 백 일을 추억할 수 있는 뜻 깊은 선물을 위해 여러 날 동안 함께 찍은 사진을 정리해 예쁜 앨범에 담았다. 그리고 압구정 골목 S그룹 회장이 즐겨 찾는다는 카페에서 만나 정성껏 포장한 선물을 내밀었는데 어째 그녀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했다. 내가 준 앨범을 한참 들여다보던 그녀는 선물이 크고 무거워서 들고 가기 힘드니 다음에 다시 달라고 했다. 주문한 커피를 다 마시고 계산을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그녀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빠는 참 순수한 것 같아’ 당시에는 ‘순수’ 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할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분명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 날 이후 우리 관계는 줄곧 섞이지 않는 재료 마냥 서먹한 사이로 남았고 어느 순간 헤어지자는 말도 없이 헤어졌다.


어느 날 다소 황망했던 이별에 홀로 가슴앓이 하던 나는 그녀와의 만남을 주선했던 지인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가만히 내 말을 전해 듣던 친구는 앨범 얘기가 나왔을 때 수화기 넘어 짧은 탄식과 함께 나의 ‘순수함’을 나무랐다. 간단히 말하면, 그 백일 째 되던 날 나의 선물은 추억 나부랭이가 덕지덕지 묻은 앨범이 아니라 유구하고 섹시한 역사가 담긴 쇼메여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를 보면 항상 돈 많고 잘 생긴 ‘기획 본부장’이 돈 없고 불쌍한 인턴사원과 사랑에 빠져 집안의 숱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에 골인하는 스토리가 많지 않은가. 드라마 속 본부장은 자기 신분을 몰라 보고 온갖 실수를 연발하며 심지어 자신을 허물없이 폭행까지 하는 여직원에게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 라는 말과 함께 사랑에 빠지곤 한다. 재벌家 여성과의 맞선자리를 모두 마다하고 지지리 궁상 여직원에게 빠져 드는 드라마 속 본부장에게 재물은 전혀 특별한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막상 닥치고 보니 나의 순수는 그저 지지리 궁상이고 빈한한 지갑은 부잣집 여성의 문턱을 넘기도 어려운 게 현실이다. 마음을 담은 백일 선물은 무겁다는 핑계로 손에 지고 갈 가치도 없는 넝마 취급이나 받고, 헤어지자는 말도 아까운지 그녀로부터 무응답 이별을 통보 받은 나는 애꿎은 드라마 작가나 욕하는 ‘순수한' 짓거리만 하고 있었다. 친구 말에 따르면 나는 순수한 게 아니라 순진하고 멍청한 거였다. 차마 그런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어 순수라는 단어로 포장했던 그녀의 말은 어쩌면 나를 위한 마지막 배려였을 지도 모른다. 


요즘은 사랑 하나로 결혼에 성공하는 일이 점점 어려운 사회가 됐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는 탓에 무신론자로 평생을 살아온 어느 지인의 말처럼, 마음이라는 것도 이제는 눈에 보이는 실질이 있어야만 오롯이 인정받는 세상이 된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씁쓸하다. 일전에 모 중견기업 회장과의 식사자리에서 나눈 대화가 생각난다. 회장은 아들이 곧 장가를 가는데 며느리가 판사라며 대놓고 자랑질을 했다.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아이고’ 하며 축하 인사를 건네고 회장과 아들은 감사하다며 화답했다. 그로부터 약 1년 뒤 어느 회의석상에서 다시 그 아들을 만났는데, 결혼 생활에 관해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더니 ‘비싼 차를 타면 유지비가 많은 드는 법이죠’ 하고 말했다. 그 말인 즉, 잘난 여자를 만나려면 그 만큼 돈 쓸 각오도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가만 돌아서 생각하니 지난 나의 황망했던 이별이 새삼 이해되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나의 연애도 제법 비싼 차를 탔던 경험에 해당하는데, 비싼 차를 타면서 유지비는 안 내고 싸구려 앨범으로 퉁 치려고 했으니 나는 결국 무임승차를 하다 강제로 쫓겨난 꼴이었다. 하지만 이제와 깨달은들 어쩌겠는가. 앞서 그런 진리를 깨우쳤다고 해서 나의 텅 빈 지갑이 명품으로 둔갑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내 수준에 맞는 중고차를 알아봐야 하는데, 그녀를 따라 명문관을 다녀 본 경험 탓인지 괜히 눈만 높아져서 싸구려 차는 이제 눈에 들어 오지도 않는다. 지갑은 빈한한데 눈만 하늘에 달렸으니 올해도 결혼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는 모양이다. 마음보다 재력을 먼저 키웠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와 함께 용처(用處)도 없는 마음이 요즘따라 더욱 쓸쓸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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