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가을, 프랑스 여행과 함께하던.
올 한 해 쉬어가면서, 3월부터 여행을 준비했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항공사 마일리지로 프랑스 왕복 비행기 표를 끊었다. 일터에 나갈 때는 도저히 꿈 꿀 수 없는 9월에 출발하는 표를. 추석과 개천절, 한글날, 토요일 사흘, 일요일 이틀을 합쳐서 24박 25일이나 프랑스에 머물렀다. 파리로 들어가서 스트라스부르, 콜마르, 디종, 리옹, 아비뇽, 아를, 마르세유, 니스, 툴루즈, 몽생미셸, 다시 파리에 들렀다 돌아왔다.
여행을 하는 첫 번째 까닭은 호기심이다. 아무리 사진과 영상을 봐도 내 눈으로 보지 않으면 호기심이 풀리지 않는다. 그 곳에서 본 콜로세움과 사진으로 본 콜로세움은 다르다는 것을 안다. 같은 사진이라도 콜로세움에 다녀온 뒤로는 ‘요 옆으로 난 길로 조금만 걸어가면 포로 로마노지.’ 하며 사진으로는 보이지 않는 길을 머릿속에 그린다. 콜로세움에 들어가서 내려다보는 바닥이, 올려다보는 하늘이 어땠는지를 떠올린다. 콜로세움 곁에 서 보아야, 얼마나 높은지를 떠올릴 수 있다. 때로는 둘레에 자라던 나무나 풀, 꽃이 떠오르기도 한다.
다른 까닭은 자유다. 밖에 나가면 한결 느긋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낸다. 친구들이 종종 여행가서 찍은 사진을 보며 ‘너는 진짜 여행 체질인가봐. 나가서 찍은 사진은 얼굴이 달라.’ 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자유로운 분위기가 묻어난다.’는 말도 자주 듣는다. 어쩌면 여행지에서 제일 눈에 띄는 여행자일 수도 있다. 동양인으로 혼자 돌아다니기 때문이다. 더 많은 눈길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서 다른 사람의 눈길에서 자유롭기도 하다. 부러 다른 사람의 눈길을 받아내지 않기 때문이다. 온종일, 오로지 걸어다니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배고프면 먹는 하루가 이어지면, 바쁘게 이어지는 하루하루 속에서 날카롭게 서 있던 마음이 느슨해진다.
머리카락 사이를 스치고, 치맛자락을 나부끼는 바람을 맞으며 걷는다. 겉옷과 안에 입은 옷 사이로 스미는 바람도 좋다. 바쁠 일이 없으니, 천천히 걸으며 구석구석 둘러본다. 한국에서는 걸을 때 꼭 음악을 듣는데, 여행할 때는 듣지 않는다. 듣지 않아도 절로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자주 듣는 노래일 때도 있지만, 몇 년이나 듣지 않았던 노래가 술술 나오기도 한다. <인사이드 아웃>이란 애니메이션에 꼭 맞는 장면이 나온다. 사람 머릿속에 감정을 다루는 본부가 있는데, 본부에서는 짧은 기억, 길게 두고 보는 기억을 나누어서 보관하고, 때로는 기억 구슬을 가져와 머릿속에 펼쳐내기도 한다. 누구나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노래를 하루 종일 흥얼거려보았다. 그걸 <인사이드 아웃>에서는 치약광고에 나오는 노래가 들어있는 구슬이 제멋대로 틀어서, 하루 종일 그 노래를 흥얼거린다는 재미난 설명을 한다.
프랑스에서는 자주, 여행하는 도시에 알맞은 노래가, 자주 듣지 않던 노래가 절로 흘러나왔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타난 도시는 스트라스부르를 본 따서 그려냈다. 독일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도시라 많은 부분이 독일과 비슷했다. 짙은 갈색 나무가 드러나게 지은 전통 집이나, 돼지발에 맥주를 넣어 푹 삶아낸 음식이 그렇다. 큰 강물이 흘러가고 옛 도심 사이를 흐르는 운하도 멋을 더한다. 사람들은 넉넉하게 흐르는 물가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친구와 먹고 마시며 웃고 떠든다. 도착한 날은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둥둥 떠다니는 따뜻한 날이었다. 파리 에어비앤비 주인인 프랑수아즈가 스트라스부르에서 꼭 가야 하는 식당을 알려주어서, 그곳에서 우리나라 족발 같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다. 식당이 자리 잡은 옛 도심을 천천히 둘러보는 사이 어느새 내 머릿속에서는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오는 ‘인생의 회전목마’가 흘러나왔다. 미야자키 하야오 애니메이션에 음악을 거의 다 만든 히사이시 조의 가장 유명한 노래가 아닐까. 추근덕거리는 병사들 틈에서 소피를 쏙 빼낸 하울이 공중으로 솟아올라 마치 왈츠를 추듯 도시의 하늘을 가로지르는 장면에 나오는 그 노래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앞에서 커피를 마시며 물끄러미 지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도, 작은 골목 사이사이 마다, 건물 창틀 마다 올려놓은 예쁜 꽃 화분을 구경할 때도, 주인과 나란히 걸으며 여행을 즐기는 강아지들을 볼 때도, 자꾸만 흘러나왔던 왈츠 가락.
아를. 아비뇽에서 기차를 타면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에 자리 잡은 아주 작은 마을이다. 그리스 시대 아레나(원형 경기장) 둘레에 마을 건물이 옹기종기 둘러앉아서 그것만으로도 아름답지만, 많은 사람이 아를을 찾는 까닭은 바로 고흐 때문이다. 아를에 남은 고흐의 작품은 넉 점에 지나지 않지만, ‘별이 빛나는 밤’이란 작품에 나오는 강이 바로 아를을 흐르는 론 강이다. 고흐가 살았다는 까닭만으로도 기차에서 내리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역에서 얼마 걷지 않아서 골목 틈으로 아레나가 보인다. 고흐 덕분에 왔지만, 새하얗게 빛나는 대리석으로 지은 아레나가 주는 느낌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아레나 바로 앞에 보라색 나팔꽃으로 뒤덮인 식당에서 물끄러미 오래 전 건축물을 바라보며 점심을 먹었다. 아레나 2층에 올라가니 시원한 바람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큼지막한 대리석 난간에 걸터앉아 바람을 느끼며 좋아하는 노래를 몇 곡이나 들었다. 가장 먼저 흘러나온 노래는 바로 돈 맥클린의 ‘빈센트’다. ‘starry starry night’하고 시작하는 노래를 들으며 빈센트 반 고흐를 떠올렸다. 토요일이라 성당에서는 얼마 전 태어난 아기의 세례식이 열렸다. 온 가족이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모여서 토실 토실 귀여운 아기를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시청 광장에서는 결혼식에 온 사람들이 모여서 신랑 신부를 기다렸다. 아이부터 어른까지 파란색으로 맞춰 입고 시끌벅적 웃고 떠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아쉽게도 ‘밤의 테라스’에 나오는 노란색 식당은 2년 전부터 문을 닫았다고 한다. 코로나 때문이지 싶다. 언젠가 다시 열린 식당에 앉아서 커피 한 잔 마시고 싶다.
붉은색 벽돌로 지은 건물이 아름다운 툴루즈에서는 정말 오랫동안 듣지 않고, 잊었던 노래가 흘러나왔다. 니스에서 7시간이나 걸려서 도착한 툴루즈. 역 밖으로 나와서 숙소를 찾아가는 내내 건물은 온통 붉은색 벽돌로 지은 아름다운 집이었다. 다른 도시와는 사뭇 다른 차분한 분위기였다. 도시를 가로지르는 큰 강이 흘러서 넉넉한 느낌이 들었고, 플라타너스 나무 또한 가지치기를 하지 않아 커다랗게 자라나서 더욱 그러했다. 오래된 대학 건물, 자코뱅 수도회 건물, 여전히 사람이 사는 집 모두 붉은색 벽돌로 지은 골목을 걷다 보니 브라질의 가수 카에타노 벨로소(Caetano Veloso)의 ‘Cucurrucucu Paloma(꾸꾸루꾸꾸 팔로마)가 절로 흘러나왔다. 오랫동안 듣지 않았던 노래인데 문득 떠올라서 조금 놀랐다. 어쩌면 도시의 차분한 분위기가 머릿속 어딘가에 잠들었던, 이 도시와 닮은 차분하고 조금은 슬픈 노래를 불러낸 모양이었다. 문득 떠올린 노래는 툴루즈에 머무는 동안 내내 입에서 떠나질 않았다. 수도원 건물 앞 의자에 앉아서 몇 번이나 다시 들으며 보낸 짧은 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문득 찾아오는 외로움은 어쩔 수 없었다. 놀랍게도 이번 여행에서는 외로운 순간이 없었다. 하루 하루 온전하게 보냈다. 아름다운 풍경 안에 그저 머물렀다. 그 곳에 사는 사람들, 여행 온 사람들을 지켜보며 조용히 웃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은 몰랐지만, 마치고 돌아와 가만히 생각해보니, 예전처럼 누군가 그리워서,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담담하게 그곳에 머물렀다. 절로 흘러나오는 노래와 함께. (2023.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