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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분랑 May 10. 2024

복숭아 세 개

할아버지에게

입관

금요일 낮 1시. 장례지도사가 입관한다고 가족들을 불렀다. 어젯 밤(목요일) 열한시 넘어서야 겨우 다 모인 가족들은, 아침 일찍 평창 장례식장으로 갔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자마자 장례식장으로 옮겼다. 할아버지만 혼자서 장례식장에서 밤을 보냈다. 11시에 입관하는 사람이 있어서 점심을 먹고 나서 1시가 지나서야 할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삼 사년 전에 미리 구해놓았던 수의를 입은 채 누워계신 할아버지는, 집에서보다 훨씬 작아 보였다. 얼굴은 하얀 천으로 덮어놓아 볼 수 없었지만, 동그마니 누워계신 할아버지를 보자마자 눈물이 흘렀다. 할머니, 고모, 고모부, 아버지, 어머니,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막내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 손주로는 나, 동생 둘, 사촌 동생 넷. 동생 짝인 제부에, 혼자 둘 수 없어 동생에게 안긴 채 함께 들어 온 조카까지. 좁은 방이 우리 가족으로 가득 찼다. 할아버지 가까이 다가가서 아버지들과 고모가 먼저 말을 건네고 이어서 손주들이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아버지들이 말을 할 때, 나는 할아버지 발치에 서서 내내 할아버지 발을 만지고 무척 부드러운 수의를 어루만졌다. 할아버지가 이렇게 작았었나, 우리 할아버지 좋은 수의 해 입으셨네, 이런 생각들을 하며 마지막으로 뵌 할아버지 얼굴을 떠올렸다.

     

마지막 보름

3월 17일에 할아버지, 할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전화를 받고 아버지가 평창에 들어가셨다. 열이 펄펄 끓는다는 말에 코로나 간이 검사를 해보니 코로나가 맞았다. 할머니는 금세 괜찮아지셨는데, 할아버지는 열이 40도 가까이 올라서 원주의료원으로 모셨다. 음압병동에서 간병인과 함께 삼일 남짓 지내고 코로나를 떨쳐낸 할아버지는, 다시 평창으로 돌아오셨다. 하지만 병동에서 거의 못 드시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와서 죽조차 넘기지 못하셨다. 간병인이 정성들여 입에 먹을 것을 넣어주지 않았던 모양이라, 내내 주무시기만 하고 먹지 않으셨다. 할머니는 그런 할아버지 곁에서 애가 말라 울면서 아버지에게 전화하셨다. 작은어머니, 아버지가 죽을 사다 드리기도 했다는데, 통 드시질 못했다. 어머니가 사 간 전복죽을 곱게 갈아서 드리니 한 그릇을 뚝딱 비우시고, 좋아하는 고구마 라떼도 한 잔 드시더니 눈에 빛이 돌아왔다고, 그렇게 전해 들은 날이 3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런데 그 다음주 화요일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것 같다는 연락을 받았다. 수요일 아이들과 공부를 마치자마자 조퇴를 내고 평창으로 갔다. 

    

할아버지와 나

들어가는 내내 할아버지와 추억을 떠올렸다. 내가 여덟, 아홉살 무렵 할아버지 오토바이를 탔던 기억, 중학생일 즈음 설을 쇠러 평창에 갔다가 마음에 드는 옷을 사 내라며 다락방에 틀어박혔을 때, 할아버지가 사 줄테니 내려오라고 부르던 기억이 떠올랐다. 할아버지가 오토바이를 몰고, 그 뒤에 동생이, 끄트머리에 내가 탔는데 뜨거운 배기통에 다리를 살짝 뎄던 기억이 났다. 중학생 즈음, 설을 쇠러 갔다가 어른들이 입는 옷을 파는 가게에 걸린 검은색 뜨개옷이 마음에 쏙 들어왔다. 어릴 때 뭘 사달라고 조르는 편이 아니었는데, 검은색 바탕에 붉은색 작은 장미가 쫌쫌따리로 붙었던 뜨개옷이 어찌나 마음에 들었는지, 당장 어머니에게 사달라고 졸랐다. 음식 준비로 바빴던 어머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어른들이 입는 옷을 왜 입으려고 하냐’며 ‘너무 비싸서 안 된다’고 성을 냈다. 웬일인지 기분이 너무 상했던 나는 코를 훌쩍이며 다락으로 올라갔다. 추워서 시멘트 벽에 성에가 낀 다락에서 어머니를 탓하며 눈물, 콧물 찍 흘리며 내려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어머니, 작은어머니, 할머니가 와서 들여다보며 내려오라고 했지만, 단단히 고집을 부렸다. 가만히 지켜보던 할아버지가 ‘얼른 내려와서 할아버지랑 같이 사러 가자.’ 해서 눈물 슥 닦고 할아버지와 밤길을 걸어서 가게 앞까지 다녀왔던 일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내일 문을 열면 사주겠다고 했지만, 할아버지가 가게까지 함께 가 준 것만으로 마음이 괜찮아졌다.  

   

우리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1935년 12월 24일(음력)에 평창 신리에서 태어났다. 공부 욕심이 많았던 증조할머니 덕분에, 할아버지는 고등학교 공부까지(졸업은 못 하심) 했다. 고등학교 공부를 마치지 못한 까닭은, 시골 촌놈이 무슨 공부냐, 농사나 짓고 장가나 가라고 끌어내린 증조 할아버지 때문이었다. 뜻이 꺾인 채 고향에 내려온 할아버지는 스물에 할머니와 혼인을 했는데, 젊은 피가 부글부글 끓었는지, 툭 하면 할머니가 가져온 반짓고리를 마당에 던지곤 했단다. 마음에 들지 않으니 집으로 가라고, 번쩍하면 마당에 반짓고리를 내던지셨다고. (그런 할아버지가 몸이 불편해지고 치매가 오신 뒤로는 할머니가 잠깐이라도 없으면 불안해하며 손을 꼭 잡고 있으려 했다.) 시골에서 한자를 비롯해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젊은이였던 할아버지는 어느새 면사무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공무원 일을 하며 모은 돈으로 아들 셋을 다 장가보내고, 집도 사주었다. 땅도 조금씩 사두었다가 필요할 때 팔아서 목돈으로 쓰곤 했다. 정년퇴임을 하고도 연금을 아껴서 정기예금에 1억 가까이 모아놓은 채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말이 많지 않았다. 조용히 계시다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성격이었다. 아들들이나 할머니에게는 성을 내시기도 하고, 고집도 부리셨지만, 손주들에게는 그럴 일이 없었다. 4년 전 쯤 뇌경색으로 쓰러지신 뒤, 몸 왼쪽이 불편해지고 가벼운 치매가 왔을 때도 하루 종일 침대에 걸터앉아 조용히 신문을 읽으셨다. (치매가 시작됐을 때는 작은아버지, 작은어머니를 통장 도둑으로 여기고 큰 소리를 내기도 해서 두 분이 무척 놀라시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하루 전 날

오후 세 시쯤 할아버지 댁에 가서 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가니 할머니는 곤히 주무시고, 할아버지는 눈을 감은 채 “어어어.”하는 소리를 내며 팔을 휘저었다. 돌아가실 때 나타난다는 섬망증세가 이거구나 싶었다. “할머니, 큰손주 왔어.” 할머니 다리를 살짝 만지며 깨웠다. 할아버지 얼굴 가까이에서 “할아버지, 큰손주 왔어.” 큰 소리로 부르자,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가벼운 치매라지만 나와 동생 얼굴과 이름을 자주 잊어버리던 할아버지라, 나를 알아보시는지 알 수 없었다. 할아버지는 곧 눈을 감고 팔을 휘저으며 아프신 건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지 “어어어.” 소리를 냈다. 때로는 어디가 찌르듯이 아픈지 몸을 움찔하며 “아야야” 하기도 했는데, 말을 할 힘이 없어서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 묻고 답할 수 없었다. 곧 돌아가실 것만 같은 모습에 조용히 울다가, 할머니가 앉아서 신세한탄 하는 걸 들어드렸다. 눈을 뜨고 뭔가 불편함을 얘기하시는 것 같아서 얼른 돌침대 위로 올라가 할아버지를 내려다보며 “할아버지, 뭐가 불편하세요?” 물으니 이불을 휙 걷으셨다. 기저귀를 차고 있는데 기저귀를 다 적시고 요, 할아버지 웃옷에 시꺼먼 물이 다 묻었다. 어제도 동네 빨래방에서 이불 빨래를 해 왔다는데, 오늘도 이불을 버렸다며 할머니가 “씨팔, 씨팔” 욕을 했다. 이불을 걷어내고, 바지를 벗기고 기저귀를 가는데 할머니는 힘이 없으니 내가 할아버지를 모로 누이고 할머니와 함께 물티슈로 등을 닦아드렸다. 검은색 물똥을 한가득 쌌는데, 고약한 냄새는 하나도 나지 않았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장을 비운다고 하더니, 이게 그건가 싶어서 또 눈물이 나왔다. 새 기저귀로 갈고 다시 눕혀 드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가 물을 찾았다. 할머니가 얼른 숟가락으로 물을 입에 흘려 넣었지만, 옆으로 누웠으니 그대로 흘러내렸다. 얼른 돌침대 위로 올라가 할아버지를 일으켰다. 등을 조금만 일으켜 세우는 것만으로도 할아버지는 아파했다. 할아버지 몸이 딱딱한 나무토막 같았다. 등 뒤로 무릎을 밀어 넣어서 몸을 조금 세우고 숟가락으로 조심 조심 물을 흘려 넣었다. 내내 물을 못 드셨는지 입술이 부르트고, 혀도 하얗게 일어나고 바싹 말랐다. 마음 같아서는 벌컥 벌컥 마시면 좋겠지만, 숟가락으로 드시는 것조차 자꾸 사레가 들렸다. 할머니 혼자서는 할아버지에게 물도 못 드리던 터라, 큰손주가 온 걸 알고 나서는 몇 번이나 물을 찾으셨다. “무!” 하면 얼른 올라가 등 밑에 무릎을 밀어 넣고 숟가락으로 물을 떠 드렸다. 그러는 중에도 섬망 증세는 이어졌다. 갑자기 허공을 바라보며 두 팔을 뻗으시거나, 왼쪽 팔로 계속 벽을 두드렸다. 저녁 여섯시 쯤 작은아버지가 와서 요플레와 단백질 우유를 같은 방법으로 몇 숟가락 떠 넣었다. 그래서인지 눈에 제법 힘이 돌아와보였다. 저녁을 먹고 집으로 오기 전에 누워 계신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했다. 돌침대 위로 올라가 할아버지를 내려다보며 “할아버지, 큰손주 이제 집에 가요. 일요일에 또 올게요.”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눈을 바로 뜨고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할아버지가 팔을 들어 내 얼굴을 쓰다듬어 주셨다. 살갗이 조금 차가웠지만, 할아버지가 나를 알아보시는구나, 잘 가라고 인사해주시는구나,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가게 문을 닫자마자 평창으로 들어와 하룻밤을 잤다. 다음날 낮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으니, 지금 막 집을 나섰다고, 앞으로 일주일은 더 사실 것 같다고 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날 저녁 할아버지가 가쁜 숨을 몰아쉬어서 할머니가 얼른 작은아버지,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서둘러 할아버지 집으로 건너왔다. 세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할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쉬었다.     

화, 목요일마다 평생학습원에서 아이패드로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운다. 7시 반쯤,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가 떠올랐지만, 낮에 아버지와 전화했을 때 괜찮다고 해서 크게 걱정하지 않고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한 마디에 동생과 내가 함께 어어어어어, 하고 울었다. 흑흑 흐느끼는 울음이 아니라 절로 어어어어 하는 울음이 났다. 손전화기 너머로 조카가 “엄마, 괜찮아. 엄마, 괜찮아.” 달래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전화를 끊고 교감 선생님에게 전화를 드리고, 금요일, 토요일에 만나기로 했던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강의실로 들어가 짐을 챙기고 강사에게 말하는 동안에도 눈물이 멈추지 않아 훌쩍훌쩍 울었다. 차를 타고 집으로 가는 내내 눈물이 나서 운전하느라 혼났다. 달봉이(함께 사는 강아지)를 부탁드렸던 선생님이 아홉시 조금 넘어서 오셔서 달봉이를 맡겼다. 싹 씻고 머리를 말린 뒤, 짐을 챙겨서 어머니와 막내를 데리고 평창으로 들어갔다. 우습게도, 11시가 넘어서 다 모인 가족들은, 밥부터 해먹었다. 할아버지가 저녁때 돌아가셔서 다들 저녁을 걸렀던 터라, 오밤중에 밥을 해서 다들 둘러앉아 국 한 그릇에 밥 말아 먹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우리는 모여서 밥부터 먹는구나, 픽 웃음이 났다. 작은아버지 댁에 가서 자는 둥 마는 둥하고 장례식장에 모여서 친척들과 울다가 웃었다.

     

마지막 용돈

아버지들이 물러나고 손주들이 가까이 모여 서서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수요일에 할아버지가 물끄러미 바라보며 얼굴을 어루만졌던 기억이 났다. 핏기 없이 두 눈을 꼭 감고 누워계신 할아버지 두 볼을 감쌌다. 무척 찼다. “할아버지, 좋은 곳으로 가요.” 눈물을 참고 겨우 한 마디 했다. 내내 조용히 지켜보던 할머니가 마지막에 할아버지가 왜 이렇게 차갑냐며, 왜 또 차가운데 집어 넣냐며, 얼른 따뜻한 바깥에 내 놓으라고 우셔서 다들 엉엉 울면서 할머니를 모시고 나왔다.

금요일 하루 동안 아버지들, 어머니들 손님이 우르르 왔다. 큰아버지였던 할아버지라, 육촌, 팔촌 친척들까지 다 오셨다. 어릴 때 몇 번 뵈었던 분들인데도 얼굴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학교에서는 같은 학년 두 분 선생님이 오시고, 섬강초 선생님 두 분도 오셨다. 오신 분들 모두 밥이 맛있어서 많이 드시고 갔다. 마음이 좋았다. 향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봐야 해서 여럿이 돌아가며 지켰다. 세 시간 남짓 자고 일어나 어제 손님을 치르고 남은 밥과 국을 데워먹고 차로 5분 거리인 할아버지 무덤 터로 갔다. 회다지 소리를 네 번이나 하고 곱게 떼를 입히고 나니 네 시간이 훌쩍 지났다. 가까운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할머니 집으로 가서 쓰러져서 잤다. 세 시간을 내리 자고 일어나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또 잤다. 하루 지나 월요일에 삼오제를 지내고 할아버지가 주는 마지막 용돈을 받아 들었다. 작은아버지가 , 들어온 돈 가운데 얼마를 떼어서 손주들에게 주셨다. 그 돈으로 망가진지 오래 됐지만, 사지 못했던 에어팟을 샀다.     


복숭아 세 개

아버지나 어머니, 할머니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꿈을 꾸지 않으셨다고 한다. 보통 누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임종꿈을 꾼다는데, 아마 내가 꾼 꿈이 임종꿈이었나보다. 꿈이 하도 좋아서 로또꿈인가 싶어, 두 번이나 로또를 샀다. 하나도 안 맞길래, 이상하다, 정말 좋은 꿈이다, 했는데 그게 할아버지 임종 꿈이었다. 꿈에서 잘 알고 지내는 밥집 사장님이 나무 바구니에 복숭아 세 개를 담아서 건넸다. 아주 오래된 복숭아 나무에서 딴 귀한 복숭아라고 하는데 빛깔과 향기가 이 세상 것 같지 않았다. 꿈에서도 너무 귀하고 보통이 아닌 것 같아서 차마 먹지 못하고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장례를 치르고 상담을 받았던 교수님께 여쭈어보니 임종꿈이 맞단다. 아, 내가 꿨구나. 우리 할아버지 좋은 곳으로 가시는 꿈을 내가 꿨구나. 무르익은 귀한 복숭아 세 개는 할아버지가 삶을 잘 일구었고, 오래 아프지 않고 돌아가심을 이른다고 했다. 어찌나 곱고 귀해보이는 복숭아였는지, ‘우리 할아버지가 신선이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할아버지 이름은 이춘재다. 봄 춘에 돌림자로 재상 재 자를 썼다. 할아버지를 묻고 돌아온 이튿날, 뮤지엄산에서 혼자 할아버지를 떠올리다, 그래서 봄에 돌아가신건가, 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눈물이 푹 나와서 엎드려 엉엉 울었다. 아직도 문득, 할아버지가 떠오르면 눈물이 난다. 할머니 집에 갔는데 할아버지가 없으니 불쑥 눈물이 올라온다. 내가 태어났을 때 할아버지는 채 쉰이 되지도 않았다. 아흔을 사셨으니, 할아버지와 손주로 사십년 가까이 함께 한 셈이다. 꽤 긴 세월이라, 앞으로도 종종 눈물이 올라올 것 같다. 


옛날 사진을 뒤져보니 할아버지와 찍은 사진이 꽤 많다. 거의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졸업식 때 찍은 사진들이다. 큰손주였던 내게 할아버지는, 졸업식에 꼭 함께하는 것으로 사랑을 보여주셨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에, 첫 손주에게 할아버지가 듬뿍 쏟아주셨던 사랑을 뒤늦게 깨닫는다. 내가 조카에게 사랑을 넘치도록 부어주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사랑을 받았었구나. 할아버지가 가시면서 내게 주신 마지막 선물은, 사랑 받았다는 귀한 깨달음이다. (2024.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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