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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Jin Jun 18. 2018

[메트로폴리탄_10] 뱃놀이 by 에두아르 마네

마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시대 프랑스 미술계를 주도하던 ‘왕립 미술 아카데미’와 살롱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1648년,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미술’을 연구하고 왕실 보유 미술품을 관리하는 ‘왕립 미술 아카데미’를 발족시켰다. 아카데미는 전통적으로 데생, 즉 선과 형태가 색채보다 중요하다는 신념을 고수했다. 1876년까지는 심지어 채색은 가르치지도 않고 데생만으로 교육을 이끌어 갔다. 이들이 모범으로 삼는 회화란 ‘자끄 루이 다비드’나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처럼 완벽한 원근감과 매끈한 형태, 그리고 붓 자국이 전혀 느껴지지 않도록 채색된 역사화였다. 


당시 프랑스 미술계를 장악한 왕립 미술 아카데미는 해마다  ‘살롱전(전시회가 개최된 루브르의 정사각형 건물인 살롱 카레에서 유래한 명칭)을 열었다. 살롱전의 입상은 화가들이 제도권에 진입하는 지름길이었다.  다만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고전적 취향에 부합하는 화가에게만 열린 길이었다. 이 때문에 다양한 기법을 시도하는 진보적 젊은 화가들 사이에서는 불만이 커져갔다. 문제의 1863년, 그 해의 살롱전은 그 어느 때보다 심사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주먹구구식 심사로 당락을 결정됐고, 낙선자들은 평가에 납득하지 못했다. 그 결과 나폴레옹 3세는 낙선자들을 위한 전시회, ‘낙선전’을 따로 개최하도록 했다. 

파리 시민 둘 중 하나는 다녀갔다고 할 만큼 낙선전에 몰린 인파는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여기에 몰린 대중들은 미술계 거장들의 평가를 거부한 풋내기들을 비웃기 바빴다. 낙선전에 작품을 제출한 화가들은 애초의 기대와는 달리 대중의 야유와 조롱으로 상처만 더 키웠을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첫 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려야 했지만 그 유일무이했던 ‘낙선전’에서도 스타가 탄생했으니, 그가 바로 에두아르 마네다. 

                                         

<풀밭위의 점심식사> 파리 오르세 미술관

비웃음의 대상이었던 낙선전 작품 중에서도 가장 큰 논란과 멸시를 받은 작품이 바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파리 오르세 미술관 소장)’였다. 이 작품은 젊은 남자들 사이에 여자가 옷을 벗고 앉아서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풍경을 그린 그림으로 신화나 역사 속의 여인이 아니라 평범한 여자의 누드라는 점, 그리고 그 여인이 감히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다는 점이 그림의 현실성을 부각하며 관객을 불편하게 했다. 당시 신화나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닌 평범한 '사람'의 누드는 예술작품이 아니라 외설이었다. 

또다른 전문가들은 그의 그림에서 사라진 입체감에 주목했다. 마네는 <풀밭 위의 점심 식사>에서 명암을 표현하는 중간 색조를 과감히 생략하고 밝은 색과 어두운 색만 사용했다. 그 결과 공간의 깊이감이 없어지고 인물들은 납작하고 평면적으로 보이게 되었다. 사실 야외의 빛 속에 노출된 인간의 눈은 밝음과 어둠을 세세하게 구분하지 못한다. 인간의 눈은 밝은 빛 속에서 중간색을 인지하지 못하고 어두운 부분은 어둡게, 밝은 부분은 더 밝게 본다. 즉 사물들이 평면과 가까운 모습으로 인지된다는 의미이다. 사실 그동안 그림에서 표현해 온 명암은 실내 인공 조명하에서만 가능한 특수 상황이었다. 결론적으로 마네의 그림이 우리 눈에 더 진실한 공간의 표현인 셈이다. 기성작가의 시각에서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 식사>는 예술적 완성도가 형편없이 낮은 외설스러운 작품이었지만  마네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한 젊은 화가들 사이에서 이 작품은 미술사에 있어 새로운 시대를 여는 위대한 작품이었다. <풀밭 위의 점심 식사>이후 미술은 주제 측면에서도 표현 측면에서도 신화의 세계, 이상의 세계에서부터 현실의 세계로 방향 전환했다. 


그렇게 마네는 인상파 화가들이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포문을 연 기수가 되었고, 인상주의자들의 대부이자 후원자로 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추종자들의 기대와 달리 인상파 회화전에는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었다. 마네는 인상파 회화전보다는 보수적인 살롱전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하지만 그는 분명 한편으로는 인상파 화가들보다 앞서 세상의 편견에 맞선 선구자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의 혁신성에 깊이 경도되었던 기성 화가였다. 그 결과 인상파에 대한 헌정과도 같은 이 작품, <뱃놀이>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 작품 <뱃놀이>는 그의 수많은 그림 중에서도 인상파의 기법이 두드러지는 작품이다. 

[뱃놀이]

마네는 법무관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화가로서의 명성을 쌓기 이전에도 이미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긴 했지만 이 그림 뱃놀이를 그릴 즈음에는 그동안 그렸던 그림들이 대거 팔리면서 파리 근교 센강 유역의 별장에서 여름을 보낼 정도로 여유가 있는 상황이었다. 1874년 여름, 그는 가까운 아르장퇴유에 집을 마련한 모네와 함께 이 작품, ‘뱃놀이’를 포함하여 물에 관련된 그림을 여러 점 그렸다. 


이 작품은 화창한 여름 날 강에서 보트를 타는 남녀를 그리고 있다. 마네는 이전에도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 외광 회화를 좋아하고 물을 좋아했던 모네의 영향을 듬뿍 받은 이 작품은 보다 가벼운 색채로 찰나의 순간마다 변화하는 자연광을 잡아내고 있다. 붓으로 찍은 듯 짧게 끊은 터치로 마무리된 여인의 여름 드레스에서, 보트가 지나가면서 만든 물의 움직임에서 그 효과를 확인할 수 있다. 이에 더하여 이 그림은 신화나 역사 속 위대한 인물이 아니라 ‘파리 중산층의 휴식의 순간’같은 인상파들이 즐겨 주제로 삼았던 동시대인의 삶을 표현하고 있다. 인상파의 일원이 되길 거부했던 마네가 그린, 주제도 표현양식도 철저히 인상파적인 회화이다. 특히 이 그림을 위해서는 기존의 강하고 거친 대조를 추구하기 위해 즐겨 쓰던 검은 색을 걷어냈다. 오직 여자의 모자에 달린 리본만 마치 자신의 낙관처럼 검은 색으로 남겨 두었을 뿐이다.  

더불어 모델보다 약간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  마치 사진처럼 뚝 끊어버린 오른쪽의 돛대와 수평선을 없앰으로써 강물의 공간감을 없애고 마치 벽처럼 다가오게끔 묘사한  과감한 구성 또한 당시 인상파들 사이에서 유행한 일본 채색 판화 ‘우키요에’의 영향이다.  하지만 이는 또한 마네가 지속적으로 추구해 온 회화 철학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차원의 평면에 입체적인 삼차원의 공간을 재현하려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회화란 이차원의 평면 위에 구성된 색면의 집합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그의 그림은 언제나 평면적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면 마네의 작품들이 다른 작품들보다 특별히 더 잘 그린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게다가 마네의 그림은 그 이전 시대의 명암법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즉 다른 그림과 비슷한 그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현대를 사는 우리가 현대 회화에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마네와 동시대인들의 눈에 비친 마네의 그림은 유별나다 할 만큼 다르게 달라 보이는 그림이었다. 중간색을 생략하여 입체감은 모자라고, 거친 붓 자국이 난무한 그림,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리다 만 그림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의 그림은 사진이 보편화되기 시작한 시대에 회화가 나아갈 바를 제시한 혁신적인 작품이었다. 마네는 세기의 스캔들 속에서 새로운 예술의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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