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태어난 게 실수였다.
지구에서 새로운 봄을 맞이 한 지 벌써 서른한 번째, 나는 아직도 이 별은 내가 살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품고 있다. 더 나은 곳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한 채 오늘도 나는 아침을 맞았다.
늦게 일어나서 아침은 굶고, 급하게 버스를 탔다. 나는 외계 행성을 탐사하는 연구원처럼 찬찬히 낯선이 들을 관찰했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이 작업이 흥미롭지는 않다. 그냥 습관이다. 스마트폰에 인기 연예인을 검색하는 것보다 움직이는 사람이 더 내게 가깝게 느껴져서 일까? 그러다 내 눈빛이 다른 사람의 것과 부딪혀 얼른 시선을 피했다.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사람을 구경하는 것은 시간 가는 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내가 재미를 느끼는 것 같기도 하다. 시간 낭비는 아닌 것 같다.
버스에서 내리니 길 고양이가 후미진 골목길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아기 고양이인 듯 작고 통통했다. 눈빛은 나를 잔뜩 경계했지만 내 눈길을 피하진 않고 천천히 응시했다. 나는 사람은 싫지만 동물은 옛날부터 참 좋아했다. 나쁜 생각이라곤 주인 놈의 손에 든 간식을 어떻게 하면 빼앗아 먹을까 하는 것 밖에 못하는 멍청하고 귀여운 녀석들. 사랑해주지 않고는 못 배길 소중한 생명체들이다. 고양이를 보니 양철로봇 같은 내 심장도
한 송이 꽃을 피울 수 있을 정도로 따스해진 것만 같다. 내겐 짧지만 행복한 시간들이다.
회사에 도착해 과장과 인사를 했다. 그녀가 새로 산 코트를 입고 나를 빤히 쳐다본다. 칭찬을 바라는 눈길이지만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지 않아 시선을 피했다. 그녀의 못된 심보와 고약해 보이는 얼굴 주름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싼 코트였다. 내 반응을 기다리다 못한 그녀가 말을 툭 걸었다. "현서 씨, 이거 새로 산 건데 어때?" 나는 대답했다. "비싸고 고급스러워 보여요." 그녀의 입꼬리가 묘하게 뒤틀린다. '평생을 기다려봐라. 내가 잘 어울린다고, 예쁘다고 하나.' 나는 서류로 시선을 던지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매서운 눈초리가 느껴졌지만 개의치 않았다.
필름 카메라에 원하지 않는 것을 찍어놓고 사진 현상을 기다리는 것처럼 지구에서 사는 내 인생은 기대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아마도 나는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이 아닐까?
나는 어떤 생명체일까? 알고 싶다. 여기는 지구. 나는 호모 사피엔스와 가장 닮았다. 지구인이라면 16가지 성격 유형 안에 들어간다고 한다. 그럼 나는 뭘까? 12분 간에 MBTI 성격 유형 테스트를 했더니 나는 INTP라고 한다. 내가 INTP라면 나와 같은 INTP들은 어떻게 지구에서 살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나는 결과지에 나온 INTP-T의 특성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Introvert 내향 => 내면에 집중
iNtuitive 직관 => 이상적 주관적
Thinking 사고 => 논리적 목표 중점
Perceiving 인식 => 자율적 융통성 있는
Turbulent 동요 => 외부 스트레스에 민감
나란 사람은, 시끄럽지 않은 조용한 곳에서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나의 판타지를 충족할 이상적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 그 안에서 공상하고 상상하는 것을 즐긴다. 현실적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잊고 살 때가 있어서 주변에서 일깨워주지 않으면 해야 할 일을 잠시 잊기도 한다. 이렇듯 만들어진 나만의 이론이 있고, 논리가 있기 때문에 이 논리 안에서 사람을 판단하며 나름의 계급을 정하고, 그 잣대로 평가한다. 사람을 볼 때 이 사람에게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보고 친구가 될지, 선생님이 될지, 연인이 될지를 결정한다. 배울 수 없다면 친하게 지내지 않는다.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모든 것에 앞서는 것은 사랑이지만 어디까지나 드문 이야기다.)
목표는 높지만 실현 가능한 계획을 짜지 않고 실천할 능력과 에너지도 없다. S나 J 같은 현실주의자, 계획자, 추진자가 없다면 나의 추상적 상상력, 목표는 흐지부지되고 만다. 나는 자율적으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탱탱볼처럼 이리저리 날뛰는 상상력으로 문제를 바라본다. 브레인스토밍은 좋아하지만 보고서는 싫어한다.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은 나에게 사약을 마주한 장희빈처럼 몸서리쳐지게 피하고 싶은 일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외부 스트레스에 굉장히 민감하다.
고 3 때 나를 가르쳤던 과외선생님이 했던 말이 있다.
"어머님, 현서는 온실 속 화초처럼 과잉보호받으면서 살았네요. 그러시면 안 돼요. 자극을 이겨내고 더 강하게 자라야 합니다."
스트레스는 나를 마르게 했고, 예민하게 했고, 아프게 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외계인이 아닐까 생각했다.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 내가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 다른 사람들은 멀쩡해 보인다는 것이 나를 더 비참하게 했다. 그럴수록 부모님은 나를 더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놓으셨다.
"불안해하지 마. 아가. 엄마가 너를 지켜줄 거야. 걱정하지 마. 아가."
그래서 나는 책 속에 파묻혀 살았다. 현실 속 나는 내가 원했던 나와 달랐다. 높은 성적을 받지도 못했고, 반장을 하지도 못했으며, 인기도 없고, 못생겼다. 키도 작고, 모델처럼 마르지도 않고, 볼품없었다. 그러나 소설 속에 인물들은 나와는 달랐다. 그들은 특별했다. 내가 되고 싶었던 인물들이었다. 그들의 인생을 닮고 싶었다. 그들의 세계에 함께 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와 대화보다는 책 속의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택했다.
그래서 점점 말수가 없어졌고, 소극적이 됐으며, 엄마 아빠를 걱정스럽게 만들었다.
"저렇게 사회성이 없어서 엄마 아빠 없으면 어떻게 살려고 그러나."
고3이나 서른 하나가 된 지금이나 나는 아직도 스스로가 영 탐탁지 않다. 늘 엄격한 관리자로 매서운 눈초리로 나를 감시하고 기준에 미달하면 채찍으로 내려치기만 한다. 나를 사랑하는 방법도 잘 모르겠다. 사회 속에서 살아야 하는데 달음박질해도 잘난 사람들을 따라가질 못한다. 황새를 흉내 내는 뱁새처럼,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외계인처럼 살고 있다.
아무도 날 이해하지 못할 거야.
왜냐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못났으니까.
못난 사람의 말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아.
불 꺼진 창은 모두가 그냥 지나치니까.
사춘기의 민감한 감수성 탓이라고 생각했다. 별 대수롭지 않은 고민이고, 지나갈 열병이라고 치부했다. 그러나 아직도 마음 한 구석이 시린 걸 보면 아직 사춘기가 진행 중인가 보다. 돈을 벌고,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가방을 사도 아직 마음은 애인가 보다.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닫힌 창문과 불 들어오지 않은 방 안에서 오지 않는 손님을 기다리는 것. 낯은 가리지만 혹시나 올 인연을 위해 늘 깨어있는 것. 그게 나였던 것 같다.
그래, 지구에 불시착한 것도 맞고, 내가 원해서 이곳에 온 것도 아니고, 나는 이곳이 마음에 들지도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서 살기로 했다. 죽을 용기가 없어서도 맞고, 죽기가 무서워서도 맞다.
한낱 심리테스트에 살 희망을 걸어보는 것은 웃긴 일이다.
그래도 3%의 동지들이 지구에 살고 있다. 친구들은 아니지만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이겠지.
이 글은 그들에게 보내는 서신. 애정의 메시지다.
앞으로 쓸 글들은 INTP들이 지구에서 겪는 고초와 고난, 역경, 가끔 겪는 즐거움들이다.
INTP들이 일기장처럼 써 내려가는 이곳의 글들을 보며 위로를 받고, 재미도 얻고, 부디 흥미로운 것들을 찾아가는 재밌는 지구 여행길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