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또는 어두운
어린 나는 파랑색을 좋아했다.
흰 도화지에는 유난히 하늘색을 많이 칠했다.
꽃잎도, 나무들도, 땅도, 바다도, 모두 다 푸른 물빛이었다.
그래서일까, 크레파스든 색연필이든 물감이든 하늘색은 늘 부족하고 모자랐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은 키가 작아졌고 뭉툭해졌으며 낡아져서 쓰기가 어려워졌다.
마지막 하늘을 연하게 칠하니 색연필심이 튕겨 나와 도화지 위를 굴렀다.
빈 종이에 연필 하나를 들고 하늘이라고 크게 썼다.
힘을 주어 몇 번을 겹쳐 그렸다.
까만색 심이 긁혀서 가루를 만든다.
손날에 붙은 부스러기들은 도화지 위를 활보하며 제 색으로 더럽힌다.
번진 글자를 덮으려 하늘색 크레용을 든다.
덧칠하면 할수록 흐린 날이 계속된다.
본연의 색은 잃은 지 오래다.
밝음을 향해 다가가고 싶지만,
온전한 파랑이 더 이상 색을 드러내지 못한다.
낙망이라는 커튼을 걷으면 희망이 비친다.
통유리로 청춘의 빛과 불안의 눈부심이 쏟아진다.
커튼을 치면 찡그려지는 눈살,
눈을 뜨면 빛의 산란이 나를 어지럽힌다.
빛은 구원인가, 심판인가.
젊은 나는 벼랑 끝으로 정신없이 내달리고 내몰리고 넘어졌다 굴렀다 떨어졌다 매달린다.
내 빛의 색은 무색인가, 하늘색인가.
나의 구원은 어디서 오는가.
편견과 아집이 가득한 얼굴의 심술보처럼
내 하늘색은 글자로 대체된다.
내가 하늘이라면 하늘이다.
나만의 하늘색을 만들다 한숨이 터져 나왔다.
우기고 소리 지르면 파란 하늘이 검은 하늘이 될까.
비 올 듯 캄캄한데 손에 우산이 없다.
한 두 방울씩 내리는 눈물은 내 몸에 스며들고,
하늘색 구름을 내린다.
내일은 날이 맑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