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면 성수동에 자주 간다. 성수 거리는 화려하진 않지만 소소한 볼거리가 많다. 친환경 재료로 만든 빵집도 있고, 아기자기한 그릇과 컵을 파는 소품샵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요즘 담백한 먹거리를 찾아다니는 재미에 빠진 나는 '금금'이라는 퓨전 밥집을 가보기로 했다. 보리된장 고기국수와 치즈 고기말이, 문어 비빔밥을 주문하고 시원한 둥굴레차를 마시며 기다렸다.
잘게 썰어 볶은 돼지고기와 총총 썰어놓은 쪽파, 세네 점 올라온 수육, 화룡점정 계란 노른자까지 각자의 맛을 헤치지 않는 선에서 적절하게 어우러졌다. 담백한 맛과 버무려진 소스는 약간 매콤해서 먹는 내내 흐뭇한 미소가 감돌았다. 자칫 느끼해서 몇 입 먹다 보면 질리기 마련인 고기튀김도 튀김옷을 얇게 묻혀 고소한 맛을 살리면서도 풍미를 놓치지 않았다. 살짝 매운 마요 소스도 찍어먹으니 더욱 맛있었다.
깔끔하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언니와 함께 향수 공방으로 향했다. 최근 미스 디올 블루밍 부케 향수를 샀지만 지속력이 약해 실망하며 아쉬워했던 언니는 자신만의 향수를 제조하고 싶다며 나를 데리고 갔다. 100여 가지의 향수 앞에서 우리는 입을 떠억 하고 벌리며 신남을 감추지 못했다. 사장님은 하나씩 시향 해보라며 시향지를 주시고 마음에 드는 향의 번호를 적어 알려달라고 하셨다.
언니는 몇 가지 향을 맡아보다가 처음 마음먹었던 디올 향을 골랐다. 사장님은 다른 향을 섞어가면서 원하는 향을 만들어보는 것을 추천하셨고 언니는 머스크 향도 추가하고 싶다고 의사를 밝혔다. 머스크 향을 합하자 블루밍 부케의 향이 희석되어 네 향도 내 향도 아닌 것이 되었다. 사장님은 그렇다면 재스민 향을 넣어 살짝 눌러주면 향이 되살아날 거라고 하셨다.
"저는 재스민 향 싫어해요."
언니는 향을 맡아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사장님은 답답하다는 듯 언니를 설득시켰다. "재스민 향이 들어가야 부케향이 올라오고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어요. 독단적으로 재스민만 나는 게 아니에요." "아무튼 재스민은 안 들어갔으면 좋겠어요." "정, 그러시다면, 엠버 향은 어떠세요?" 한 발 물러선 사장님은 엠버 향을 맡게 해 주며 언니의 표정을 살폈다. 언니는 킁킁 거리며 향을 맡더니 빙그레 웃었다. "오, 이건 괜찮네요." "이건 재스민 향이 아주 조금 첨가된 거예요. 느끼지 못할 만큼 들어갔어요."
사장님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언니에게 향료 조합법을 알려주셨다. "자 그럼, 부케 향 넣으시고, 엠버 향 넣으시고, 에탄올 채워주세요." 언니를 저울에 그램수를 달아가며 공병에 향료를 채웠다. 공병에 담긴 배합물을 흔들면서 사장님의 추가 설명을 들었다. 5일 후에 사용하셔야 되고, 충분히 흔들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는 흔히 요리를 하거나 색을 조합하거나 향을 배합할 때 느껴지고 보이는 것만을 집중해서 만드는 경향이 있다. 단맛이 많이 나는 음식의 경우 단 것만 넣으려 한다던지, 물감을 섞어 원하는 색을 만들 때도 연두색을 만들기 위해서 초록색에 하얀색을 섞는다. 물론 두 가지 모두 맞는 방법이긴 하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설탕을 부었는데도 단맛이 덜 느껴질 때다. 이럴 때는 소금을 넣어주면 단맛을 끌어올릴 수 있다. 연두색을 만들 때도 진한 연두색을 원한다면 노랑과 파란색 물감을 섞어주면 원하는 색을 만들 수 있다. 필요 없다고 생각했던 재스민향이 첨가되어야 블루밍 부케 향을 완성시킬 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람 간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의 A와 내성적이고 소극적인 성격의 B가 단짝 친구인 경우다. A가 가끔 허둥대고 흥분할 때마다 B가 눌러주고, B가 의기소침할 때마다 A가 기를 살려준다. 서로의 겉 성향으로만 친구가 되고 안되고를 속단하기에는 A와 B가 가진 무수한 장점들이 가려질 위기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5일 후 언니는 원하는 블루밍 부케향을 얻어냈다. 엠버 향 몇 방울이 가져다준 쾌거였다. 관계의 미학도 비슷할 것이다. 나는 과연 어떤 향을 만나 어떤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게 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