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반작용 Jan 12. 2020

이것은 다루기 힘든 감정이다.

1월 3일, 글쓰기 모임, 낯선 대구에서.

생각보다 차가 막혀, 한참을 도로에 있었다. 해가 질 무렵의 대구. 어둠에 쫓겨 붉게 저무는 태양을 배경으로 네모반듯한 빌딩들이 솟아나고 있다. ‘내가 도시를 아름답다고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순간 나는 도시가 가진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했다. 그러나 풍경에 대한 감탄은 곧 ‘늦으면 어떻게 하지?’ ‘주차할 만한 곳이 없으면 어떻게 하지?’ 와 같은 일상의 고민들에 묻혀버렸다.  

   

다행히 제시간에 도착했다. 스튜디오 콰르텟이라는 카페였다. 카페는 북극성처럼 어두운 밤거리를 밝혀주고 있었다. 세로로 긴 창문 안으로 환하게 불을 밝힌 내부가 보였다.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낯선 이의 등장에 어리둥절한 다섯 명의 얼굴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강민이 나를 소개한다. 그제야 사람들의 표정이 풀어진다. 제 친구예요. 라는 말 한마디의 힘이 이렇게 셀까.      

그녀는 글쓰기 모임을 운영하고 있다. 4페이지 이내의 글을 써서 서로의 글을 읽고 피드백을 해주는 모임이라고 했다. 모임은 단순했다. 글을 쓴 뒤, 자신의 글에서 피드백받고 싶은 점도 함께 적는다. 예를 들어 ‘비문은 없었나요? 불필요한 문장은 무엇일까요? 글의 제목은 적절한가요?’ 같은 것. 그럼 다른 사람은 글을 읽고 ‘저는 이 문장이 좋았어요. 이곳에 이 문단은 적절했을까요? 여기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하는 식으로 피드백을 해준다. 모임은 아무도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 채 조용조용히 진행되었다. 다들 진지했다. ‘참 열심히 산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감정 하나가 솟아났다.   

  

나는 모임에 참관하고자 했다. 참관. 그날의 나를 묘사하기에 무척이나 적합한 단어가 아닐까. 나는 모임원이 쓴 글을 진지하게 읽어보지도 않았고, 무언가 말을 하고 싶은 기분도 아니었다. 대신 모여 앉은 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낯선 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몇 가지 단서를 조합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생각하면서 그곳에 앉아있었다. 그저 다른 이의 삶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었다. 지켜본다는 것은 여행의 본질이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중심에서 멀어져야 하고 오직 여행자만이 중심과 멀어질 수 있다. 그러니까 내가 대구에 와서 다른 이의 삶을 참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갑자기 지켜보는 것에 회의를 느꼈다. 보는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 보는 것이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참관이라는 단어 때문이었을까? 내가 그곳에서 보기를 선택했던 것은. 갑자기 나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한 욕망에 사로잡혔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슬그머니 무리에서 빠져나와 노트북을 켰다. 내가 무언가를 할 때는 항상 노트북이 있으니까. 그런데 의욕만 앞설 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보며 또다시 글에 대한 이야기를 훔쳐 듣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했다. 무언가를 해야 하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 모순적인 감정은 무엇인가.     


강민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대충 씻고. 기진맥진한 몸을 뉘었다. ‘이 기분이 뭔지 모르겠는데’라고 생각하며, 감정에서 도망치듯 잠에 들었다. 오늘 아침, 기절과 같은 잠에서 눈을 뜨자마자 생각했다.     


아, 불안이었구나.      

나에게 불안은 가장 익숙하고 흔한 감정이다. 불안은 지구를 가득 채운 바다처럼 그렇게 항상 나에게 있다. 그러나 불안은 다루기 힘든 감정이기도 하다. 불안을 앞에 두고 나는 도저히 숨을 수가 없다. 불안은 밀물처럼 주기적으로 몰아쳐오고 나는 대책 없이 당하고 말 뿐이다. 대구에 와서 보낸 일주일 동안, 나는 불안을 느끼지 못했다. 다양한 감정들과 마주하느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또다시 이렇게 불안과 마주해버리고 만 것이다.      


헛웃음이 났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불안이 없는 상태에 금세도 익숙해져 있었다. 일주일 동안 불안하지 않았다는 것을 오히려 긍정적인 신호로 보아야 할 것 같았다. 나는 그것에 불안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슬쩍 껴안는다. 나는 아마 평생 불안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을 거야. 그리고 가만히 반추해보는 것이다. 내가 느낀 그 불안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왜 그 상황에 놓인 것이 불안했을까, 어제의 그 불안과 예전의 내가 느꼈던 수많은 불안들은 어떻게 다를까. 하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