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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작용 Jan 25. 2020

섣부른 조언

2020. 1. 23. 군산의 한 카페에서 

나는 모르는 사람이 있는 자리였다.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드문드문 이야기를 나누었다. 후에 나를 부른 동생에게 낯선 자리에 왜 나를 불렀냐고 물었더니 그가 대답했다.

      

누나는 혼자 있으면 안돼.     


웃음이 나왔다. 3개월 쯤 전인가, 매일 같이 약속을 잡고 누군가를 만나 시간을 보내던 나를 보며, 그가 했던 말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누나는 혼자 있는 법을 배워야 해.


그에게 말했다. 


“나한테 했던 말 기억나?”

“무슨?”

“나한테 혼자 있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잖아.”

“...”

“이제는 혼자 있으면 안 된다니.”

“그때는 그게 맞았는데....”     


뒷말을 채 완성하지 못한 채 그가 웃는다. 멋쩍은 얼굴을 보며 나는 생각한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래서 나는 혼자 있는 법을 배워야 하는 걸까, 아니면 혼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인걸까?     


“그게 섣부른 조언이라는 거야.” 채우지 못했던 뒷말을 내가 메꾸었다.

섣부른 조언은 상처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조언하는 사람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상처를 주기 위해 조언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다만 말의 형태는 조심할 필요가 있다. 같은 조언이라 해도 심약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쉬운 말의 형태가 분명히 있다. 예를 들어,      


“너는 ~ 해야 해.”


와 같은 말. 이런 말은 우울함에 주저앉아 겨우 숨만 헐떡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들릴지도 모른다. ‘할 수 있는데, 왜 못하니? 네가 그걸 하지 못하는 건 네가 게을러서야.’ “너는 ~ 해야 해.” 와 같은 조언은 상대를 위축시킨다. 그런 말은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나를 거울처럼 비춰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섣부른 조언이 상처가 됨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언을 잘 듣고 있는 편이다. 아무리 섣부른 조언이라도 모든 조언에는 나를 위하는 마음이 실려있다. ‘나는 네가 나아졌으면 좋겠어.’ ‘네가 행복했으면 해.’ ‘이렇게 하면 너에게 더 좋지 않을까?’ 와 같은. 


그러니까, 조언을 듣고 난 후에는 이렇게 대답하게 된다. 

“고마워, 그래 노력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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