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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보 Dec 31. 2023

이 끝에 뭐라 이름을 붙일까?

나에게 12월은 가장 바쁜 달이다. 12월 생이다 보니 생일 축하와 함께 한 해가 가는 것을 기념하는 송년 모임을 많이 갖는 편이다. 보통 그런 자리에서 돌아본 나의 한 해는 비슷비슷했다. 꾸준한 성격 탓에 작년에 한 일의 대부분을 그다음 해에도 하고 있었고, 안정성을 추구하는 타입이라 새로운 시작은 드물었기에 소위말하는 사건사고 같은 게 없는 편이다. 하지만 올 해는 좀 달랐다.


지인들 중 누구는 내게 처음으로 외부에 연재한 글이 잘 마무리 됐는지 물었고, 누구는 엄마가 응급실을 갔던 일을 이야기하며 부모님의 안부를 물었다. 가장 더운 7월에 있었던 회사 에어컨 고장 사건은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일이었다고 2023년 최악의 사건으로 꼽았고, 십여 년 만에 자원해서 참석했던 국내 선교는 많은 것이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이웃과 사회를 보는 다정한 시선을 가졌었다고. 살짝 포기하고 있던 책 개정판을 2년 만에 마무리 짓게 된 것에 대한 기쁨과 격리 의무까지 사라진 이 시점에 걸린 코로나로 멘붕이 왔던 기억 그리고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었던 스마트스토어를 얼렁뚱땅 시작하게 된 일과 대망의 이사까지! 만나는 이마다 다른 이야기가 나왔고, 그렇게 지나간 일을 돌이켜 보며 잊고 있었던 많은 일이, 그야말로 많은 일들이 떠올랐다.


엄마는 올 해 두 번이나 응급실을 찾았고, 소화기 내과와 내분비 내과 두 곳의 진료가 추가됐다. 엄마의 건강을 위해 항상 주변에 기도를 부탁해왔지만, 그 어느 해보다 말라가는 엄마를 보며 자꾸만 마음이 가라앉고 무기력해졌다. 이런 나를 위해선 기도를 부탁하진 못 했다. 아빠가 은퇴 하시고 2년이 지난 올 해 취직을 하셨다. 좋은 소식을 서둘러 주변에 나눴지만, 출근한 지 한 주만에 허리 디스크가 재발하면서 퇴사를 고민하는 아빠의 상황은 쉽사리 주변에 나눌 수 없었다. 마음이 고단해지자 수다스러운 나조차 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었다. 13년 만의 이사는 부모님 대신 나와 언니가 주축이 되어 진행했다. 부족한 경험과 노련한 경험이 부딪히며 우리 집은 두 달간 심한 갈등을 겪었다. 지치고 지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며 예민함에 몸 살을 앓던 그 모든 이야기를, 어디다 말할 수 있으랴.


글을 쓰며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들었던 자괴감, 스마트 스토어를 열고서 생긴 불안감. 이제 회사에서는 내 위로 실장님 한 분 밖에 없다. 더 많은 일을, 책임감 있게 수행해야 하는 것에 대한 부담감. 그리고 우울감. 이상하게 올 해는 자주 우울해졌다. 바닥으로 끌고 가려는 감정에게 휘둘리지 않기 위해 씨름하던 많은 밤과 낮이 떠올랐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이 사람에게도 내가 모르는 많은 일이, 시간이 있었을 테고 숱한 감정을 혼자 감당하며 오늘, 여기까지 왔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울컥했다. 전부를 알지 못한다 해서 전부 모르는 건 아니었다. 우리는 매일, 매 순간을 나누지 않았지만 한 해의 끝자락에 서로의 수고를 헤아리고 있었다.


덕분에 고단했던 지난 시간을 애틋한 마음으로 다시 살펴볼 수 있었다. 연재는 이어지지 않았지만, 이를 통해 기회가 주어졌을 때의 감사를 잃지 말고 다시 올 그 순간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고민을 시작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어 감사했다. 긴장했던 것에 비해 스마트 스토어는 순항 중이다. 아직도 실수하지 않을까 걱정인형답게 염려가 많지만, 삶이 확장되길 바라던 소망을 올 해가 가기 전 이룰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엄마는 다행히 늦지 않게 원인을 찾았고 약이 효과가 있어 경과가 좋다. 1–2년간 결과를 추적해야 하지만 낙심한 마음을 오래 두지 않게 회복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아빠에게도 감사한 일이 찾아왔다. 고작 한 주의 출근이었음에도 회사는 아빠의 건강 상태를 함께 염려해 줬고, 소정의 치료비를 주며 몸이 회복할 수 있게 도왔다. 아빠는 사회에서 처음 받는 배려라고 말씀하셨다. 긴 직장 생활로 지쳐있던 아빠의 마음까지 회복된 듯, 지금까지 큰 문제없이 회사를 다니고 계신다.


이사하고 2주가량 지났을까, 어느 밤 엄마와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는 이사 과정이 너무 힘들어서 이사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싶었다고. 그래서 새 집에 오는 게 하나도 설레지 않았는데 지내다 보니 우리 가족에게 딱 맞는 집이란 생각이 계속해서 든다고 하셨다. 이사 온 집은 가족이 바라던 요소가 하나씩 들어가 있다. 엄마가 바라던 창문이 있는 부엌, 아빠가 바라던 소파를 놓아도 될 넉넉한 거실, 언니와 나는 각 자의 방이 생겼다. 모두의 힘을 모아 마련한 집이라 애정이 커서 그렇게도 부딪혔던가보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사한 후 아빠는 본인의 의지로 교회에 가고 계신다.


엄마와 대화를 하고 난 후 이 생각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무엇이라 이름을 붙여야 할까?

사실 그간 나는 인류애를 잃어버린 듯 모든 것을 형해 자주 화를 냈다. 감당하기 벅차게, 끊임없이 신경 써야 하는 일이 생기면서 여유를 잃고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한 해가 끝나는 지금, 이중인격처럼 모든 게 다행이고 감사라고 고백하고 있다.


물론 어떤 일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 생각만 하면 깊은 한숨이 나오지만, 이 일도 지나고 나면 감사하다고 고백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불평과 불만으로 쉼표를 찍기보다 어차피 맞게 될 감사한 내년의 끝을 향해 미리, 감사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나의 기도는 무엇을 구하고 바라는 안달복달의 기도지만, 이런 생각을 하고 난 뒤부터 조금씩 그렇게 될 미래를 그리며 주실 것에 대한 감사로 기도가 바뀌어 가고 있다.


올해 가졌던 ‘확장’이란 목표는 내년에도 계속 이어갈 생각이다. 다만 조금은 더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힘든 일이 없지 않을 거고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겠지만, 그런 순간 낙담하며 불평하기보다, 올해 감사를 고백한 지금의 시간을 생각하며 미리 그 끝을 향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싶다. 그렇다면 소망하는 대로 넉넉히 넓은 지경을 갖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살아가게 될 2024년을 감사하며, 이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해보려 한다.


해피뉴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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