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보 Dec 07. 2023

긍정으로부터 시작되는 진짜 이야기

책 <달의 바다(정한아, 문학동네, 2023)>

 “그녀는 좋은 사람이야”
레이철은 음식을 내게 덜어주면서 말했다.
“그녀를 만난 것은 이번 생에 내가 받은 두 개의 축복 가운데 하나지.”
“나머지 하나는 뭔데요?”
내가 묻자 레이철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지금의 나를 만난 것.”
-달의 바다(정한아, 문학동네, 2023)-

이야기 가운데 나의 눈물샘 버튼을 누르는 소재는 정해져 있다. 소중한 이의 죽음. 사랑을 주고받았던 이와 함께한 모든 시간이 영원한 이별 앞에 추억이 되는 그 과정 앞에 속수무책 눈물을 쏟아낸다. 그래서 이유 없는 죽음이 난무하는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 책에는 그런 죽음의 그림자가 없다. 그런데도 나는 여러 번 코 끝이 찡해졌다.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떨어트리지 않기 위해 길게 숨을 들이마셔야만 했다.


이야기는 실패로 시작한다. 은미는 올해도 기자 시험에 떨어진다. 벌써 다섯 번째다.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해서 한아름 감기약을 사서 돌아왔는데, 은미의 자살 계획을 눈치챈 할머니가 조용히 쨈을 만들며 은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죽지 마, 또 하면 되지”. 그런 말을 하실 줄 알았던 할머니는 은미에게 이참에 쉬면서 고모가 있다는 미국에 좀 다녀오라고 한다. 미혼모로 찬이를 낳아 기르던 고모는 어느 날 갑자기 미국 남자와 결혼을 선언하고 떠났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찬이만 덜렁 한국에 보내고서는 연락을 끊었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그동안 고모는 몰래 할머니만 볼 수 있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촉망받던 과학기술연구원이었던 고모는 미국에서 우주비행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모든 게 온통 기밀이라고 편지도 할머니 친구네 집으로 보냈다며. 그런 고모가 곧 거처를 옮기게 될 건데 그러면 편지도 어려워질 거라고, 더 늦기 전에 고모를 보고 왔으면 한다고 할머니는 모아놓은 비상금을 꺼내 은미에게 주었다.


그렇게 미국으로 떠난 은미가 고모를 만나면서 생길 여러 가지 이야기를 상상했다. 멋진 우주비행사가 된 고모에게서 위로를 얻고 많은 영감을 받은 은미가 어쩌면 한국이 아닌 미국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 그런 이야기. 소설의 제목도 <달의 바다>이니, 은미도 이 참에 우주와 관련된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만약 이 이야기가 드라마였다면 나의 기대처럼 주인공은 실패와 역경 끝에 반짝반짝 빛나는 꿈의 무대 위에 오르며 부와 명예, 사랑까지 다 쟁취했을 것이다. 하지만 <달의 바다>는 소설이다. 드라마가 아무리 현실적이라 한들, 소설을 이기긴 힘들다. 시청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결말이 거즌 다 해피엔딩이니까. 나의 엔딩 역시, 익숙한 ‘성공’에 맞춰져 있었다.


이야기가 주는 희열은 익숙한 개념들을 부술 때 찾아온다. <달의 바다>는 은미가 고모를 만나고 얼마 있지 않아 나의 익숙한 성공 결말을 부순다. 고모는 은미가 생각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그건 은미에게도, 내게도 충격이었다. 하지만 고모는 여전히 은미가 알고 있던 고모였다. 큰 웃음소리로 주변을 환하게 만드는 사람, 거짓말을 하던 어린 조카가 처음 죄책감에 눈물을 흘릴 때 그 잘못을 스스로 수습하도록 도왔던 지혜롭고 강했던 사람, 그러나 매력적인 사람 중에 거짓말에 서투른 사람이 없다며, 다만 매너를 지켜야 한다고 말하던 유머를 알던 사람, 스스로를 상처 주지 않는 사람,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을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라고 말하는 유쾌한 힘을 가진 사람.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고모가 어디서든 자신 있게 그녀의 삶을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사실뿐이었다.”는 은미의 확신처럼 말이다. 위로를 받고 영감을 얻는데 남들로부터 얻은 타이틀, 성공이라 불리는 일반적인 것들은 전혀, 아무런 필요가 없었다. 그런 성공보다 중요한 건 너무도 많았다. 나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 소중한 진짜 나를 만나는 것 등등.

그래서 자꾸만 눈물이 났던 것 같다.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야기는 패배주의가 짙거나, 우울한 그런 분위기가 아니다. 성공의 굴레에 나를 밀어 넣고, 채찍질하며 그 사이를 굴러다니게 한 게 슬퍼서 눈물이 났다. 요즘 내가 만나는 이야기, 나누는 대화에 성공과 실패가 자주 등장한다. 아마 연말이라 그런지도 모른다. 무엇을 이뤘나 되뇌다 보면, 이루지 못한 것들만 크게 보인다.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은 게 올 해만의 특별한 일도 아닌데, 이번 해에는 유독 년 초부터 쉽지 않아 마음에 실패감이 짙었던 것 같다.


그럴수록 무거워지는 성공이란 굴레를 이고 지고, 힘겹게 12월까지 왔는데 <달의 바다>는 “지금의 나를 만난 것”을 축복으로 삼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미국에서 만난 이들은 한때 총망받고, 잘 나가던 과거가 있다. 하지만 지금은 소위말해 주목 받지 못 하는 삶을 산다. 그들은 원하는 인생을 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사람이 원하던 인생이 무엇인지, 품고 있는 야망이 무엇인지 우린 알지 못 한다. 과거 영광을 누리던 그 시절인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지금인지. 다만 그들은 부와 명예 이런 것과 상관없이 “지금의 나”를 찾아가고, 찾은 그런 안정감을 갖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은미와 그녀의 친구, 민이도 어떤 면에서는 미국에서 만난 그들과 다르지 않다. 원하는삶을 살지 못 하고, 그게 불편하게 느껴지고 참기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서 생각하게 된다. 무엇을 원하는지, 이것이 내가 원하는 것인지. 비로소 진짜 이야기를 시작할 ‘때’를 만난다.


 “그때부터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거죠. 진짜 이야기는 긍정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언제나 엄마가 말씀해 주셨잖아요?”


<달의 바다>는 긍정으로부터 시작되는 진짜 이야기에 대해 운을 띄우며 끝을 낸다. 그 이야기를 써 내려가야 할 사람이 마치 나라는 듯. 운을 띄웠지만 이미 모든 이야기는 앞서 다 풀어져있다. 그렇기에 나는 남들이 원하고 혹은 내가 스스로에게 건 기대 때문에 옴짝 달짝 못하는 나를 해방시켜 주는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졌다.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쓰면서 동시에 그렇게 흘러가지 않더라도, 이 과정을 통과해 어디로든 가 있을 내가 지금의 나를 만난 것을 축복이라 말하게 될 이야기를 말이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이야. “

“그래서? “ “자유지”

매거진의 이전글 최선을 다하고 포기하지 않는, 촌스러운 멋에 대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