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놀아주는 여자(2024)>
“너와 내가 타인인 이상 현재의 시간과 느낌을 오해와 오차 없이 나눠 가질 수 없다는 불변의 진리는
자주 나를 괴롭혔지만 가끔은 위안도 되었다. “
소설 <로기완을 만나다(조해진, 창비)> 에서 이 문장을 만난 뒤 자주 떠올랐다.
오래 알고 지낸 가까운 사이에서도 이따금 낯선, 처음 보는 얼굴을 볼 때가 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을 부대끼며, 함께 먹은 밥이 수만 끼나 되는 가족에게서도 모르는 얼굴을 볼 때가 있는데, 사회에서 만난 사이는 오죽할까? 타인이란 관계성은, 화자의 고백처럼, 낯선 면을 마주할 때 위안이 되기도 했지만, 좁고 깊은 인간 망을 가진 내게는 괴로운 순간일 때가 더 많았다. 납득이 되지 않으면 행동이 힘든 사고를 지닌 탓에 다 알고 전부 이해하는 충만함으로 대하고 싶었다. 소설을 인용하자면, 나는 그 어떤 오해와 오차 없이 당신의 현재를 나눠 갖고 싶어 하는 사람인 셈이다. 그렇기에 그럴 수 없음이, 나와 당신이 타인이기 때문이라는 거리감은 충만하고자 하는 사이에 절망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얼마 전 종영한 jtbc 드라마 <놀아주는 언니>를 뒤늦게 정주행 하고 있다. 드라마를 시청하게 만든 건 우연히 본 재방송도, SNS에 돌아다니는 짤도 아닌, tvN 예능 <유퀴즈 온 더 블록>에 출연한 엄태구 배우 때문이다. 엄태구 배우는 두 엠씨의 질문에 연신 무릎을 쓸며 수줍게 대답했다. 넷플릭스 영화 <낙원의 밤>에서 본 차갑고 시린 태구와 너무도 달랐다. 그 외 작품에서도 강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 왔기에 부끄러워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엄태구 배우의 모습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귀여워서!
이런 반전 있는 엄태구 배우는 드라마 <놀아주는 언니>에서 잘 표현되고 있다. 어두운 과거를 가진 서지환은 엄태구 배우가 연기해 온 이전 역할들과 닮아 있지만, 과거를 청산하고 힘든 순간을 이겨내게 추억을 만들어주었던 어린 시절 민하를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진 서지환은 부끄러워 뚝딱이는 엄태구를 닮았다.
드라마는 서지환이라는 인물을 통해 겉모습만 보고 나와 다르다고 구분 짓는 차별과 그로 인한 혐오가 아닌, 공감하고 이해하는 세상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전한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고 범죄자는 더욱 그렇다고 믿어오던 장현우 검사(권율 분)가 서지환을 겪어가며 생각했던 것과 다른 모습에 혼란스러워 하지만, 단정짓던 오해의 빗장을 풀고 협력관계로 전환되는 관계의 변화를 가져온다.
이런 기획의도를 생각해 보면 서지환은 대중이 생각하는 모습과 다른 매력도 갖고 있는 엄태구 배우였여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드라마 소개문구에 적힌 ‘반전 충만 로맨스’에서 ‘반전’은 의도된 표현으로 보인다.
이런 순간이면 어김없이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 떠오른다.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한 사람의 과거, 현재, 미래가 오는 것. 그 사람의 생이 오는 것이라 말하던 시는 한 사람 안에 우주만큼 넓은 세계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내가 본건 그 사람의 과거이자 현재뿐이다. 그마저도 내가 보고 싶은 부분만 보았거나, 내가 볼 수 있는 부분만 본 그 사람의 극히 일부이다. 미래는 보지도 못했는데 나는 어째서 내가 본 게 그 사람의 전부라 생각했을까. 처음 본모습을 주저 없이 ‘낯선, 어색한, 어울리지 않는’이라 규정해 버렸던 것일까? 새로운 모습의 발견은 이토록 기분 좋은 반전을 가져올 수 있는 일인데 말이다.
소설 <로기완을 만나다>는 너와 내가 타인이라 ‘헤아려보려던 내 노력은 어느 순간 무의미하게 흩어진다’와 ‘타인의 고통이란 실체를 모르기에 짐작만 할 수 있는 결핍된 대상이다’라고 말하는데서 멈추지 않는다. ‘타인과의 만남이 의미가 있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삶 속으로 개입되는 순간이 있어야 할 것이다’로 이어진다. 나는 아직도 너와 내가 타인이지만, 오해와 오차가 없는 사이가 되길 바란다. 이상을 품는 N적 사고다. 다만 관계에 대한 이런 바람으로 괴롭거나, 혼자 편한 위안으로 삼기보다 기대라는 영역에 두고자 한다. 모르는 얼굴을 마주할 때 보게 되는 낯섦은 내가 발견한 또 다른 당신이며, 오해와 오차가 줄어든 우리의 미래로, 기분 좋은 반전은 서로의 삶 속으로 개입된 순간이 될 테니까. 내 인생의 문장이 ‘헤아려보려던 내 노력은 어느 순간 유의미하게 모아졌다’라는 고백으로 이어져 나갔으면 한다. 이런 고민을 하는 좋은 사람으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