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은 인간을 지키는 필살기 중 하나 같다. 힘들고, 아프고, 충격적인 일을 겪으면 뇌는 몸을 지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 기억을 지운다. 괴로운 기억을 감당할 힘이 없다면, 우선 잊게 하는 배려로 삶을 살아가게 하듯. 또는 모르는 게 약이라는 듯, 살아온 모든 시간의 것들이 기억보다 망각의 영역에 존재하게 한다. 그래서 혹자는 망각을 신의 선물이라고 하는지도.
글에서 말한 적 있지만, 나는 이런 신의 선물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나와 줄곳 함께 자란 언니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일을 세세하게 기억하는 반면 나의 기억은 대부분이 흐릿하다. 한때는 언니의 기억력이 부러웠고, 질투했고, 그래서 기록의 형태로 기억할 일들을 보존해가고 있으나, 점점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줄어갔다. 잊히는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요즘, 이래도 괜찮은가 하는 불안이 든다. 깜빡, 깜빡하는 기억의 단절을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잊어버린 기억 속에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지는 않은가 하는 불안과 사라져 버리는 기억들에 대한 염려다. 아마 기억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두 편의 드라마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tvN 월화 드라마 <선재 업고 튀어>는 과거로 돌아가 미래를 바꾸려는 타임슬립 소재의 이야기다. 임솔(김해윤 분)은 최애 류선재(변우석 분)를 살리기 위해 미래에서 과거로 온다. 과거에서 지나온 시간을 다시 살게 되면서 임솔은 자신이 기억하는 과거는 실제 일어났던 일의 일부였다는 걸 깨닫는다.
가령 이클립스의 메인보컬 류선재와 자신은 연예인과 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관계인 줄 알았지만, 과거로 돌아와서 보니 선재는 앞집에 사는 이웃이었고, 같은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지난 시간에 아마도 두 사람은 골목에서, 학교의 어느 곳에서 스쳐 지나가며 서로를 보았을 수 있다. 실제로 선재는 자신을 택배기사로 착각해서 말을 걸었던 임솔에게 첫눈에 반했고, 임솔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잊은 어떤 순간이 누군가에겐 영원토록 기억될 추억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임솔은 과거 자신에게 일어났던 교통사고도 기억하지 못했다. 타임슬립으로 돌아온 과거에서 임솔은 하교하는 버스에서 졸다 사고가 일어났던 장소에서 내리게 되지만, 처음 온 장소임에도 낯익은 느낌이 드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을 뿐 자신이 겪었던 일에 대해 아무런 기억도 떠올리지 못했다. 그날의 사고는 단순 교통사고가 아니었다. 살인마에게 쫓기다 차에 치인 사고로, 이후 임솔은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게 된다.
극심한 외상 후 스트레스는 임솔에게서 그날의 기억을 전부 지워버린다. 하지만 다시 돌아온 과거에서 임솔은 사고가 일어났던 장소에서 취객과 실랑이가 붙었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선재를 보면서, 과거에 자신을 위해 달려오던 선재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가 잊은 건 기억일까, 선재 너였을까?” 잊은 기억 속에 잊어선 안 되는 것이 있지 않았을까.
망각은 대체로 섬세하지 않다. 충격적인 사고의 순간, 그때 느꼈던 고통만 뽑아내 지우지 않는다. 뭉뚱그려 덩어리째로 기억을 지워버린다. 자신을 도운 선재였지만, 그를 보면 그날의 일이 악몽처럼 떠올라 임솔은 기억 속에서 선재까지 지워버렸다. 하지만 잊었다고 해서, 지웠다고 해서 기억은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여러 번의 타임슬립 끝에 임솔은 선재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게 반복되는 과거에서 그와의 인연을 모두 끊지만, 그래서 지난 과거의 모든 일이 솔이만 기억하는, 선재에겐 없던 일이 되었지만, 불현듯 선재를 기억 속에서 떠올린 솔이처럼, 선재 또한 망각에 새겨진 기억 속에 솔이를 떠올리게 된다.
기억이 돌아오는 스토리는 타임슬립이라는 판타지 장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극적인 연출임을 감안하더라도, 마침내 서로를 떠올리는 두 사람을 보며 기억이라는 게 얼마나 신비한 움직임을 갖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 모습은 마치 “어쩌면 놓치지 말아야 할 순간들은 어딘가에서 찬란한 빛을 내며 끊임없이 나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지 모른다” 는 임솔의 고백처럼 기억의 조각들이 내 안의 어딘가에 차분이 머물러있어 다시 등장할 때를 기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tvN 토일 드라마 <눈물의 여왕(2023)> 은 부부라는 관계 속에서 진심을 나누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추억이라 말할 수 있는 기억에 관해서도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 있다.
“지금은 좋지만 살다 보면 또 고비가 올 거 아니야. 그럼 그 달콤했던 기억들을 유리병에서 사탕 꺼내먹는 것처럼 하나씩 꺼내 먹으며 힘들고 쓴 시간들을 견디는 거지. 그러니까 우린 좋을 때 그걸 잔뜩 모아 둬야 하는 거라고. “
큰 수술을 앞두고 해인(김지원 분)과 현우(김수현 분)는 좋은 기억을 쌓는다. 살다 보면 찾아올 고비 앞에 꺼내 볼 행복한 기억들을 유리병에 모으듯 추억을 만들어간다. 그런데 그렇게 소중하게 쌓은 기억을 모두 다 잊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지금껏 살아온 기억들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건 나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해인은 자신이 받아야 할 수술의 후유증으로 기억 손실이 온다고 했을 때 수술을 망설였다.
수술 후 해인은 기억을 모두 잃는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처럼 자신을 잃지는 않았다. 사라졌다 생각한 기억은 해인의 내면 깊이 자리해 있어 그녀의 습관, 버릇, 취향으로 나타났고, 가슴에 스며들었던 현우를 향한 감각이 되살아나며 다시 그를 사랑하게 된다. 해인은 그렇게, 솔이 말하던 찬란한 순간들이 보내는 신호를 놓치지 않고 잡은 셈이다. 살다 보면 기억하는 것보다 잊어버린 채로 살아가게 되는 일들이 더 많지만, 그 모든 것은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머물며 나를 만들어 가고 있으며, 그렇게 기억은 나란 사람을 통해 항상 존재하는 중이었다.
사실 올해 시작부터 지치는 일들이 연속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인지 눈 깜빡할 사이에 5월이 되었고, 지난 5개월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생각하면 떠오르는 게 없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던 어른들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도 같다. 시간은 점점 더 빠르게 지나갈 텐데, 이렇게 살면 남는 것 없는 인생이 될 것 같아, 글 초반에 적은 염려와 불안이 든 것 같다(조금 우스운 생각처럼 느껴지실 분들도 계실 수도 있지만).
그래도 기억에 대해 곱씹어 보는 가운데 나온 이 생각이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혼에 스미는 것’이라고 말해주던 솔이 할머니의 대사로 확인받은 기분이다. 할머니가 시간과 기억이 희미한 치매를 앓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 대사가 주는 더 큰 울림이 있었다.
유리병 속에 행복하고 즐거운 일만이 아닌, 어렵고 힘들고 지치는 지금의 순간도 한 조각씩 담아 놓고 싶어졌다. 이런 기억들 또한 나를 이뤄가는 조각들이며, 임솔이 괴롭다고 생각했던 기억의 이면에서 숨겨진 ‘선재’를 발견했듯, 때를 기다려 떠오른 기억 속에서 과연 나는 무엇을 발견하게 될 것인가 궁금하기도 하다. 설령 같은 기억만 떠오를지라도 그 안에서 달라진 나를 찾을 수 있을 것도 같다.
놓치지 말아야 할 순간들이 끊임없이 보내는 찬란한 빛의 신호를 잡게 될 그날, 이 글을 기억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