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사랑 후에 오는 것들(2024)>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일은 언제부터 자연스러웠던 것일까? 처음부터? 그렇다면 그 처음은 어떻게 시작되는 건데?
묻고 싶었다. 진심은 자연스럽게 전해지기 마련이라던 준고에게.
우연이 인연이 되기 위한 노력
준고와 베니의 시작은 우연이었다. 일본으로 유학을 온 베니가 우연히 준고의 도움을 받았고 같은 동네에서 여러 번 우연히 마주쳤다. 베니는 그런 걸 믿어 본 적이 없다. 운명이니 기적이니 하는 것들. 그런 걸 바라는 건, 운 좋게 기적처럼 이뤄지길 바라는 사람들의 가벼운 희망 같은 거라 생각했기에 베니는 실현시키려는 자신의 의지를 믿으려 했다. 하지만 베니가 매일같이 달리던 아주 큰 공원에서 우연히, 다시 한번 준고를 본 순간 그가 자신의 운명으로 느낀다.
베니가 준고를 운명이라고 느낀 데에는 준고의 노력이 있었다. 베니를 만나기 위해 일부로 그녀가 운동하는 공원을 찾아갔고, 도로리 옆에 있어야 한다던 핏퐁 캐릭터를 뽑기 위해서 핏퐁이 나올 때까지 밤새 오락실에 있었다. 물론 베니에게는 핏퐁을 한 번에 뽑았다는 귀여운 거짓말을 곁들인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연인이 된다.
전해지지 않은 마음
준고의 말처럼 사랑하는 진심은 이렇듯 말로 하지 않아도 전해진다. 베니도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럼에도 말로 해 줬으면 했다. 아무리 진심을 안다 해도 계속 듣고 싶은 말도 있으니까. 예를 들면? 사랑해라는 말. 윽, 어렵다. 준고는 말했다. 그는 말로 표현하는 게 힘들다고 했다. 그가 소설을 쓰고자 하는 것도 하지 못한 숱한 말을 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가 하지 않은 말은 ‘사랑해’ 뿐이었을까? 그는 점점 베니와 함께 하는 시간이 줄었고, 베니와의 약속보다 다른 사람의 부탁을 우선하기도 했다. 베니는 그의 사랑을 의심하게 됐고, 진심을 확인하고 싶은 순간에도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너와 함께 하기 위해서’라는 변명 같은 말 밖에.
그의 지난 사랑이 끝난 이유도 제대로 마음을 전해야 하는 순간조차 침묵해서였다. 그러니 그는 사랑으로 충만했던 이때, 베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했다. 그 말을 했다면, 행복해하는 베니 표정을 보았다면, 그다음 말하기는 조금 더 쉬웠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베니에게 그의 사랑을 의심하며 외로워하는 순간이 오지 않았을 수도 있고, 준고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아 베니를 외롭게 한 순간을 오랫동안 후회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헤어졌을 수도 있지만 오해가 만든 상처라던가 미련으로 남은 감정을 정리하는 시간은 조금 덜 아팠으리라 생각한다.
'자연스레' 속에 있는 '부자연스러움'
어렵고 불편해서 자연스럽게 해결되길 기대했으나 아무런 노력 없이 풀린 적이 없었다. 어색한 대화의 자리를 갖거나, 말로 하기 힘들면 편지를 쓰거나 하는 노력을 통해 상황은 점차 나아졌다. 상대방이 알아줄 거라 믿는 믿음은 누군가의 눈에 이기적인 행동으로 비치기도 했다.
걷고, 뛰고, 젓가락 질 등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하는 행동도 짧고 때론 긴 어설픈, 어색한 노력의 시간이 있었다. 저절로 된 듯 보이는 자연스러운 경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일에서 우린 숱한 노력을 해왔다. '자연스레'라는 건 전하기 위해 노력하는 다정한 부자연스러운 행동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니 진심을 말로 전하지 않을 거라면, 더 많은 노력이, 더 깊은 농도로 필요하다. '진심'이 가진 진정성에 너무 많은 걸 기대해서는 안될 일이다. 우연을 운명으로 만들던 준고는 어디 갔을까?
처음부터 쉬운 건 없다.
자연스레 저절로 되는 것도 없고.
긴 시간을 준고는 후회했고 베니는 지난 이별에 메어있었다. 두 사람은 긴 시간이 지나 비로소 그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 뒤 관계에 제대로 된 마침표를 찍는다. 나는 두 사람을 보면서 마침표가 아닌 시작점을 만들었다.
아침과 잠들기 전 엄마를 있는 힘껏 안아드리고 있다. 표현이 서툴고 그래서 데면데면하게 구는 사람이라 상당히 어색함에도 노력하는 건, 아픈 엄마와 함께 할 시간이 그리 많이 남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다. 가끔은 소심한 행동이지만 아빠의 어깨를 토닥이며 응원하는 마음을 전하고, 언니와 기꺼이 손을 잡고 걸으며 사랑한다고 쉴세 없이 말하는 언니에게 나도 그렇다는 말을 개미목소리로 답하기도 한다. 나는 조금이라도 후회를 줄이고, 당신은 조금 더 행복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어느 날 문득 찾아올 외로움과 고통 앞에서도 사랑받고 있음을 기억할 수 있게 열심히 노력하는 중이다. 침대 밑에 가득한 편지박스나 주고받은 카카오톡,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 담긴 사진들. 내가 자연스럽게 여기고 있는 소중한 관계 속에서도 이런 부자연스러운 모습의 다정한 노력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준고의 이다음 사랑은 보다 많은 언어를 담고 있을까? 그나마 진심을 전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말로 표현하는 것일 수도. 이런 사랑스러운 모양의 부자연스러움이 차고 넘치도록 나는 게으른 회피모드를 활동모드로 돌려야겠다. 처음이다. 어색하고 낯설고 서툰, 자연스럽지 못한 순간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