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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의 낯선 언어 Feb 28. 2021

월하(月下)의 강.

햇살과 달빛이 비치는 한강.

한강에 관한 시나리오를 3개월가량 준비하면서 몇 가지 발견한 사실이 있다.


1. 1960년대 산업화를 시작하면서 한강 개발을 착수하기 전에 사람들은 한강 인근에서 해수욕을 즐겼다.

- 2021년 현재는 공원으로 개발되어 사람들은 운동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고 레저 수상 스포츠를 즐긴다.


2. 한 해에 한강에서 자살하는 사람의 수는 수백 명이다.

- SBS 스페셜에 방영된 자료에 의하면 한 해에 발견된 시체가 2400명 정도고 3분의 1은 신원확인이 불가하다. (자료 출처 - 한강 나무 위키)


3. 한강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작은 고래가 찾아온다. 이름은 상괭이이며 먹이를 찾아 바다에서 올라와 한강에서 머물다 다시 바다로 떠나는데 현재는 산업화 개발로 인해 한강의 수질이 오염되어 대부분 부패되어 사체로 발견되고 있다. (신곡수중보라는 한강의 물을 가두어 놓고 기능적인 시설로 사용하기 위한 댐을 설치함으로 인해 장점과 단점이 공존하게 되고 현재까지의 자료로서는 장점보다는 한강 물의 본질적인 순환기능에 있어 장애를 발생시켜 수질 오염의 악화로 연결되고 있으며 이는 곧 생태계 위험으로 이어진다.)



자료를 보며 하나둘씩 정리를 하다 한강의 존재가 인간의 삶과 맞닿아 있음을 느꼈다.

아침이면 합정역에서 당산역으로 향하는 전철을 탄다. 지나치는 짧은 1분 동안 고개를 들어 바깥 풍경을 바라보면 햇살을 받아 찬란히 빛나는 한강을 볼 수 있다. 전날 밤의 어둠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또다시 밝게 빛나고 있는 강을 보면 황홀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표면을 제외한 물속 깊은 곳에는 고여지고 썩어진 한강의 진실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에 의해 더럽혀진 한강은 강으로서의 본질적 기능을 상실한 채 가장 깊은 곳부터 썩어가고 있다. 그 모습이 어찌 보면 인간의 변질된 내면과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인간 또한 타인과 사회에 의해 길들여지고 고여지고 썩어간다. 감정의 순환을 통한 환기와 휴식이 아닌 일종의 단죄와 욕망의 강렬한 이미지로 자신의 숨소리를 잃어간다. 강이 강으로서 흘러 순환하고 맑아지지 못하듯 인간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고 숨조차 쉬지 못한다. 그러나 강의 표면은 떠오르는 햇살을 받아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러 찾아온 인간에게도 한강이 전해주는 햇살의 위로는 지금껏 인간에게 가해졌던 삶의 어둠을 억누르고 한시적이나마 기쁨으로 솟아오르게 만든다. 하지만 모두가 잠든 월하의 밤, 달빛이 비치는 한강에서는 짙은 어둠 속에서 강물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사람들이 한 해에 2000명이 넘는다. 그들은 모두 햇살의 위로를 느낄 수 없는 자들이며 현대 사회의 외면된 존재들의 극적인 탈출 시도를 하고 있는 중이다. 사회는 이 탈출구를 본질적으로 봉쇄할 방법이 없기에 미미한 저항을 시도하지만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썩어버린 구조주의 현대화에서 구원을 가장한 미미한 시도는 그들의 탈출을 결국 막을 수 없게 된다. 표면상의 위기의 봉합은 실존할 수 없는 인간을 이분법적인 이미지화로 갈라놓고 공존과 상생이 아닌 극단의 완전함만을 강요한다. 인간의 삶은 이렇듯 치열하게 교차하며 존재하고 있음을 한강의 깊은 울림을 통해 우리는 느낄 수 있다. '누군가는 한강의 햇살을 느끼며 삶의 도약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차디찬 한강에 자신의 몸을 던져 삶의 마지막을 시도한다.' 상황은 다르지만 햄릿에 나오는 대사처럼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직결되는 이 현실 속에서 (인간은 결국 모두 죽겠지만.) - 나는 오늘도 말없이 한강을 바라본다. 어느덧 불완전하게 느껴지는 한강이 오히려 친숙하고 진실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불완전한 한강이기에 나는 나 자신을 한강의 햇살에 기대어 보고 때로는 한강의 어둠에 내면의 진실을 묻곤 한다. 인간은 완전함을 바라볼 때 자신을 상대적으로 더 부조리하게 느낀다. 그리나 불완전한 대상을 바라볼 때 결핍을 위로받고 상승시키며 이내 용기를 갖는다. 이것은 인간이 가진 실존을 위한 미화의 습관이다. 인간은 자신을 미화시키지 않고는 완전한 듯 보이는 세상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다. '어느 누가 자신을 완전하다 느낄 수 있을까?' - 완전하다 느낀 히틀러는 결국 유대인을 대학살로 이끌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완전함만을 강요하며 인간을 구별하고 제한하고 이미지화시키는데 주력하고 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상상하고 떠올리고 새겨야 한다. 유한한 존재의 숨소리를, 더 깊이 내쉬어야 한다. 월하의 밤, 한강에 울려 퍼지는 이름 모를 누군가의 숨소리를 기억하자.



삶은 빛을 향한 뜨거움이었다가,
 어둠을 갈망하는 허무의 그림자로 변모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만약 누군가 이 순간 뜨거움과 허무로 교차되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진실한 인간이기에 그렇다고 전하고 싶다. 우리는 이 진실이 교차되는 지점에서 만나 삶의 어둠과 빛으로 공존하고 있다. 어둠을 느낄 때 비로소 빛을 느낄 수 있고, 빛을 느낄 때 비로소 어둠을 느낄 수 있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으며 그 연결의 지점들이 우리의 불완전함을 상쇄시킨다. 누군가는 또 한강으로 향하여 햇살의 위로를 받을 것이며, 누군가는 또 월하의 강에 자신의 몸을 던져 탈출을 도모할 것이다. 이것은 허구가 아닌 하나의 진실이자 사건이며 이것을 우리는 ‘삶’이라 부른다.



"아 제우스여, 저는 왜 덧없는 것일까요?"
라고 아름다움이 신에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신이 대답했습니다.
"덧없는 것만 아름답게 했거든."
- 요한 볼프강 괴테-


덧없다 생각한 모든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잊지 말자.

어차피 세상은 변하지 않을 테지만 적어도 나의 내면은 진실 앞에 눈을 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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