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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석 Jun 05. 2019

여행과 하루키

무라카미 하루키 <장수 고양이의 비밀>

어쩐지 선반 위 고양이가 되어 하루키를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무인도에 한 사람을 데려가야 한다면?

이란 질문은 오래 고민해야겠지만 여행에 한 사람을 데려가야 한다면, 같은 질문은 훨씬 대답하기 쉽다. 그저 ‘음, 동남아는 역시 친구들이지.’, ‘삿포로의 눈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보고 싶다고.’하고 생각하면 된다. 즉시 떠오르는 상대와 연결 지으면 될 뿐이다. 하지만 무인도는 다르다. 무인도를 함께 간다는 것은 한 생애를 함께 가겠다는 말이며, 그곳에는 생존과 연관된 알 수 없는 중압감이 나를 짓누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무인도에 한 권의 책을 가져갈 수 있다면, 이란 질문은 상당히 대답하기 어렵지만, 여행에 가져갈 책 한 권쯤이라면 수월하게 대답할 수 있다.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장수 고양이의 비밀』뒤표지 (문학동네/2019)

그런데 마침 방학을 앞두고 하루키의 신작이 출간됐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이라는 에세이다. 집사의, 집사에 의한, 집사를 위한 도서이며, 사랑하는 반려묘와 오래도록 함께할 수 있는 하루키의 작은 팁은… 물론 아니고, 그만의 위트와 취향이 똑똑히 드러나는 일상적 에세이다. 1995년부터 1996년까지 <주간 아사히>에 연재한 에세이를 책으로 묶었다. 그가 오랫동안 기르던 반려묘 ‘뮤즈’에 관한 에피소드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쩐지 선반 위 고양이가 되어 하루키를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곧 있을 여름휴가를 위해 아껴두고 싶었으나, 결과부터 말하자면 실패하고 말았다. 참패였다. 애써 보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사흘은 굶은 사람 앞에 나타난 바게트처럼 나를 유혹했기 때문이다. 결국 ‘몇 에피소드만 읽어볼까?’하는 마음이 들었고, 첫 페이지를 펼친 나는… 결국 그 자리에서 후기까지 읽게 되었다. 역시 호기심은 위험하다. 오죽하면 호기심에 뒤를 돌아봤던 오르페우스조차 ‘그럴 수도 있겠군.’하며 이해해버렸으니까.     


읽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하루키의 에세이는 가볍다. 그리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단연코 아무 생각 없이 읽을 수 있는 가벼운 에세이다. 이는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시끄러운 카페나 러시아워(Rush Hour)의 지하철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같은 걸 읽기에는 몹시 난감하다). 술술 읽히는 쉬는 문장에 얇지도 두껍지도 않은 분량은, 언제 펼쳐 들어도 부담이 없다. 여행에 제격인 것이다. 더불어 이제는 클래식 반열에 오른 소설가의 일상을 합법적으로(?) 관음 할 수 있다. 이 말은 어째 변태같이 들릴 수 있지만, 무척이나 즐거운 일이다.     


물론, 나는 하루키의 소설과 에세이를 구분 없이 즐긴다. 다만 읽고 난 후에 느낌은 차이가 크다. 소설가로서의 하루키는 태양과 명왕성처럼 멀게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유니콘이나 유토피아를 생각할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하지만 에세이스트로서의 하루키는 다르다. 문지방 하나만 넘으면 만날 수 있을 것처럼 가깝게 느껴진다. 길을 걷다가 그를 만나다면 손이라도 흔들며 인사를 건넬 법한 친근함이다. 뭐, 하루키 입장에서는 몹시 난처하겠지만.     

하루키와 가깝기로 유명한 안자이 미즈마루가 삽화를 맡았다. 그에 관한 이야기도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놀라운 것은 그 친근함이 몹시 글을 쓰고 싶게 만든다는 것이다. 기묘한 힘이다. 어떤 문학적 영감에 압도당해 세상을 바꾸는 글을 쓰겠다, 같은 건 결코 아니다. 자칫 건방져 보일 수도 있지만 ‘칫, 이런 글이라면 나도 쓸 수 있다고.’하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정작 연필을 들면 생각보다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간결하고 단순한 이야기 속에 마음을 붙잡는 무언가가 있다.


만약 나에게 무인도에서 어떤 글을 쓰겠는가, 묻는다면 이런 글을 쓰겠노라 답할 것이다. 노벨문학상, 아니 이상문학상 조차 탈 수 없는 글이겠지만(애초에 무인도에 문학상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그런 글말이다. 눈앞에는 실명할 것처럼 반짝이는 윤슬과, 하늘과 구분되지 않는 푸른 바다가 있다. 나는 잎으로 가려진 그늘 아래서 육지에서의 기억을 회상하며 글을 쓴다. 어쩌면 이곳을 빠져나가 책으로 묶을 수도 있을 것이다. 유리병을 통해 바다 위에 띄울 수도 있고. 이런 생각만으로도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이 또한 하루키 소설에서는 느낄 수 없는 큰 차이 중 하나다.

     

그건 그렇고, 무인도 얘기를 하니 하루빨리 여행이 가고 싶다. 『장수 고양이의 비밀』 중 ⌜여행의 벗, 인생의 반려⌟란 에피소드에는 이런 문장이 나오는데, 그게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에게 ‘이거라면 언제 어떤 여행이든 오케이’라고 생각하는 만능 책이 한 권 있다면 인생이 편해질 확률이 상당히 높다.(238p)


이런 만능 책을 선물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루키.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그나저나 책을 다 읽어버렸다. 뭐, 걱정은 없다. 눈보다 손이 바쁠 것 같은 여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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