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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석 Oct 28. 2019

그 누구도 아닌 마광수

장석주, 송희복 엮음 《마광수 시대를 성찰하다》

설리가 죽었다. 명백한 자살이었다. 주변인들은 그녀가 오랫동안 우울증을 앓았다고 했다.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다. 그녀는 그저 자신을 표출하고, 소신껏 소리를 내었을 뿐. 그것이 누군가를 비난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면, 세상은 한층 탁하고 음울해질 것이다. 타계 소식이 들려옴과 동시에 악플을 실은 배는 전복되었고, 언제나 그렇듯 추모의 물결이 위를 덮었다. 씁쓸한 반복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기사를 읽어 내리다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다름 아닌 故마광수 선생이 타계했을 2년 전, 당시와 무척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마광수 시대를 성찰하다》는 장석주, 송희복 외 6인의 교수와 평론가들이 모여 집필한 마광수에 관한 책이다. 인간 마광수에 관한 이야기부터 작가로서의 마광수, 작품들에 관한 비평까지 그를 둘러싼 거의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다. 기본적으로 마광수를 다시 보자는 취지에서 집필되었지만, 그를 향한 비판도 서슴지 않아(즉, 막연한 찬사를 하지 않아) 더욱 투명하게 책에 집중할 수 있었다.


단순히 그의 삶이 이러했다, 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작품들과 문학적 세계관을 분명히 짚고 간다. 이것이 이 책이 그를 투사나 비운의 천재가 아니라, 한 명의 문인으로서 바라보고 있음을 방증한다. 누군가 내게 마광수를 알고 싶다고 한다면, 그의 책을 추천하는 게 먼저일 것이다. 다만, 방대한 저서의 양의 반감을 느끼는 이가 있더라면, 이 책 또한 충분히 대안점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마광수를 조명하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 그는 항상 선구자적인 견해를 제시했다. 예컨대, 유튜브만 들어가도 일반인들이 나와 성(性)을 토론하고, 거리에는 성인용품점이 떳떳이 즐비하며, 국내에서 자체적인 합법 포르노가 제작되기도 했다(물론, 아직 갈 길이 멀다). AV배우들이 영상에 나와 성과 관련된 고민을 얘기하는 것은 젊은이들을 열광시킨 지 오래다. 식의 시대가 끝나고, 성의 시대가 올 것이라는 그의 말 그대로다.


그렇다고, 그의 견해가 모두 옳았다는 건 아니다. 그가 한국사회를 비판하며 강조한 것은 다원주의의 부재였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다. 외설 시비로 끌려간 법정에서, 10년 후면 코미디 될 것이라던 그의 주장은, 20여 년이 흐른 지금조차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 같다. 2019년 설리를 향한 악플들은 1992년 《즐거운 사라》로 마광수가 잡혀간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27년이라는 간극을 따라오지 못하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한평생 투쟁에 이바지한 마광수의 노고를 아는 까닭에, 이 사실이 더욱 안타깝게 다가왔다.

필화 사건 당시 마광수의 모습 (1992)

나도 한 때 마광수에 관한 책을 쓰려고 한 적이 있다. 평전의 형식을 갖춘 산문집이었다. 그를 알게 된 후 내 삶의 많은 부분들이 확실히 달라졌다. 책을 쓰고자 한 것도, 그를 조금이라도 더 알리고자 한 것이었고, 감사를 표하고자 한 나름의 다짐이었다. 내 또래들에게(현재 20대 초반들에게) 마광수는 논란의 중심도, 변태 작가도 아닌 그저 ‘모르는 사람’이다. 그럴 만하다. 당장 나조차도, 작고 소식을 접하기 전까지 그를 알지 못했으니까.


이후, 장르를 불문하고 그의 책을 읽었다. 중고서점에 갈 때면 절판된 그의 책을 찾았고, 시간을 들여 그와 관련된 기사와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마광수에 관해 얘기하려면 그를 아는 것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선생이 타계한 지 2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손에는 그의 책이 들려있고, 인터넷에 접속할 때면 이따금 ‘마광수’ 석자를 검색해본다. 그를 알리겠다는 마음 역시 변함없다. 다만, 그것이 책은 아닐 것이다. 이미 훌륭한 모습으로 출간되었고, 무엇보다 내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경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그를 순교자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우선 작품을 읽고,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여, 왜곡도 찬양도 아닌 공정한 평가를 진행해야 한다. 오직 그것만이 마광수에게 ‘작가’의 지위를 되돌려주는 방법이고, 그의 글들이 외설이란 족쇄에서 벗어나 ‘작품’으로 복귀할 수 있는 길이다.(106p) - 최승웅(단국대 교수)


필자로서 비겁한 선택이지만, 최승웅 교수의 생각을 빌려 얘기해야겠다. 당장은 그럴 수 없겠지만, 나 역시 마광수가 그 누구도 아닌 마광수이길 바란다. 외설 작가도, 시대를 앞서간 천재도 아닌 마광수. 그저 작가이자, 평론가였으며, 교수였던 마광수. 수식어 없이 한 사람을 바라볼 때, 비로소 설리와 마광수는 자신을 되찾을 것이고, 그것이 이 불필요한 반복의 굴레를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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