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태 《정해진 미래》
세상에는 직접 겪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들이 있다. 먹어보지도 않은 취두부가 맛이 없을 것이라던가, 근처를 가본 적 없는 남극이 춥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덧붙이자면, 빼어난 미인에게 연락처를 물어봤을 때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들을 것도 물론 알고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자연스레 지식과 경험을 체득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있어 보이는 말로 ‘선험적’이라고 한다). 그렇게 직간접적으로 쌓인 수많은 경험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결과를 추론한다. 해서, 악명 높은 향의 취두부는 주문하지 않고, 남극에 갈 일이 있다면 만만의 준비를 하며, 절세미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척 한)다.
이것은 비단 일상에만 적용되는 얘기가 아니다. 얼마 전 조영태 교수의 『정해진 미래』를 읽었는데, 그동안 쌓아온 인구학적 통계로 (책이 집필된 2016년 기준) 10년 후 한국의 모습을 면밀하게 예측한 책이다. 인구학이라고 하니 갑자기 떠오른 기사가 있는데, 지금과 같은 인구절벽이 이어질 경우 2300년쯤에는 한국인이 멸종할 것이란 내용이었다. 어디서 읽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 기사를 읽고 나서 떠올렸던 단상만은 토시 하나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알려주자면 이런 내용이다.
나는 문화 산업 경쟁에 참여할 예비 창작자로서, 축소화될 영화 시장의 암울한 미래와, 소비층에 맞춰 변화할 시대적 패러다임과, 작가적 경쟁력을 갖기 위한 내면적 고찰은 분명하게 아니었고, 그저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음, 2300년이면 내가 죽었을 때니 상관없겠군.’ 하고 생각했다.
단순히 내가 태동하는 사회적 현상에 일말의 관심이 없어서 내린 결론은 아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는 흐름이라 생각한다.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공부 열심히 안 하면 나중에 고생한다.’라는 현실에 입각한 협박(?)을 수없이 들어왔다. 그렇다고 “어이쿠, 맞아 고생은 힘든 거지.” 하며 들고 있던 만화책을 놓고 수학책을 펼쳐 들지는 않았다.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서있는 지금에서 바라볼 때 미래는 수성과 해왕성만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이것이 내가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일하게 인구절벽을 대하는 자세와 같은 이치다. 물론, 수학책을 선택하는 아이도 왕왕 있겠지만.
2018년의 출산율은 약 32만 5천 명이었다. 2002년 이후로는 50만 명 이하의 부진한 출산율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를 베이비붐 세대(1955년에서 1964년생)에 비교하면 3분의 1 가까이로 줄어든 수치다. 통계를 하나하나 따지며 볼 필요 없이, 나만 해도 출산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다. 그저 아내와 오순도순 지내며, 각자의 일에 충실한 채 살아가는 상상만으로도 세로토닌이 몇 배는 향상되는 기분이다.
저도성장 시대의 각박한 현실이나, 경제적인 요인도 물론 기인했다. 당연한 말이다. 전후에 이례 없이 많은 아이들이 태어난 것은 미래를 향한 희망이 조금씩 보이기 때문이다. 이제는 희망조차 불씨를 잃어가고, 고도성장은 페달에서 발을 뗀 지 오래이다. 누구도 이 치열하고, 각박한 경쟁사회 속에 아이들을 밀어 넣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세로토닌이 몇 배는 저하되는 기분이다.
그렇지만 이런 현실에도 ‘아이가 있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일상의 모퉁이에서 녹슬지 않은 찰나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가령, 여행을 떠날 때가 그렇다. 과거의 기억을 끌고 오는 음악을 들을 때 그렇고, 누군가 내가 만든 창작물을 즐겁게 봐줄 때 그렇다.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범시대적 즐거움이다. 타지에서 겪는 낯선 설렘과, 사색 깊은 곳으로 나를 밀어 넣는 음악과, 그리고 누군가에게 녹슬지 않는 무언가를 건넸다는 사실은, 가끔씩 꺼내볼 수 있는 소중한 기억으로 가슴 안에 자리한다. 그럴 때면 세상에 대한 걱정은 동산의 뒤편으로 사라져 있다. 하여 수십억 원이 아니라면, 그런 찰나를 유산으로 남겨주고 싶다. “아빠가 느꼈던 세상이야.” 하며.
대관절 출산 인구는 줄어들고 있다. 재깍거리는 초침은 지금 이 순간에도 흐르고 ‘저출산’이라는 시한폭탄은 우리의 숨통을 죄여 온다. 명료한 해결책을 적으면 멋있어 보이겠지만, 그건 정부의 역할이고, 기업의 숙제이며, 수학책을 조금이라도 일찍 잡은 사람들의 몫이다. 안타깝지만 만화책을 오래 잡고 있던 나는 이런 말밖에 할 수 없다.
“시간이 흘러도 녹슬지 않는 것들을 즐기시기를!”
시간을 타지 않는 즐거움은 의외로 일상 곳곳에 숨어있다. 내가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기 시작할 때, 어쩌면 미래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갈지 모른다. 고약한 취두부가 은근히 입에 맞을 수도, 한파에 적응되어 남극은 의외로 버틸 만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미인은 역시 “죄송합니다.”라고 대답할 것 같군요.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