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성과는 잊히고 성찰은 남는다

16. 성과는 잊히고 성찰은 남는다

by 정연

16. 성과는 잊히고 성찰은 남는다

16. 성과는 잊히고 성찰은 남는다


증권사에 다니던 시절, 내 삶은 늘 성과로 가늠되었다.

이번 분기의 목표 달성률, 다음 분기의 실적, 성과급…. 성과가 곧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도장이었다. 성과가 좋으면 칭찬을 받았고, 그렇지 않으면 좌절했다. 그러나 그 순간의 기쁨과 좌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축하도 짧았고, 위로도 짧았다. 새로운 성과가 금세 이전의 성과를 덮었고, 또 그다음 성과가 덮어갔다. 내가 쌓아올린 시간과 노력이 결국 어디에 남았는지 되묻는다면, 선명히 떠오르는 것은 많지 않다.

성과란 결국 기록이었다. 숫자로 환산되고, 보고서에 적히고, 발표자료로 남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기록은 새로운 문서 속에 묻혔다. 어제의 성과는 오늘의 기준에 가려지고, 오늘의 성과는 내일의 과제에 의해 잊혔다. 그렇게 끝없이 달려가다 보니, 성과는 내 안에 남는 것이 아니라 바깥으로 흘러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일하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오래 남는 건 성과가 아니라는 것을.

한 번은 학생들에게 무료로 책을 나누어주는 나눔 행사를 준비한 적이 있었다. 처음 도서리스트를 확인했을 때, 솔직히 의문이 들었다. “컴퓨터 서적이 이렇게 많으면 누가 가져갈까?” 행사 당일, 책상 위에 쌓인 두꺼운 전공서적들을 보며 나조차도 회의적인 마음이 스쳤다.

그런데 한 학생이 다가왔다. 책 제목을 확인하는 순간, 눈빛이 반짝였다. 마치 금은보화를 찾은 듯한 얼굴이었다.


“진짜 이 책 가져가도 되나요?”

“그럼요. 가져가세요.”


학생은 책을 품에 안고 한쪽에서 미소를 지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오히려 부끄러워졌다. 내 시선으로만 판단했던 것이 틀렸음을 알았다. 나에게는 그저 무겁고 딱딱한 책이었지만, 그 학생에게는 간절히 원하던 보물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성과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도서관 입장에서는 책 몇 권이 나갔다는 단순한 기록일 뿐이었다. 하지만 나의 시선을 깨운 것은 성과가 아니라, 그 학생의 눈빛이 주는 울림이었다. 그것은 숫자가 아닌 마음에 남는 경험이었다.


비슷한 경험은 또 있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취업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그저 내가 경험한 것을 솔직하게 말해주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업무 능력보다 태도가 더 중요하더라. 열정과 성실함이 결국 기회를 가져온다.” 대단한 조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그 학생은 고맙다며 연신 인사를 했다. 그 순간 느꼈다. 누군가에게 남는 것은 거창한 성과가 아니라, 함께한 짧은 대화 속에서 건네는 진심이라는 것을.

도서관이라는 공간은 내게 수많은 작은 성찰을 안겨주었다. 서가를 정리하며 떠올린 지난날의 선택들, 학생들과 나눈 사소한 인사 속에서 돌아본 나의 태도, 조용히 책장을 넘기며 다시 마주한 내 마음. 성과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달린 기록이었지만, 성찰은 내 안을 채우는 힘이었다. 성과는 외부의 평가를 따라다녔지만, 성찰은 내 삶의 뿌리를 단단히 지켜주었다.


나는 이제 안다.

성과는 결국 잊히지만, 성찰은 남아 내 삶의 태도를 바꾼다는 것을.

혹시 지금 성과를 좇느라 지쳐 있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잠시 멈추어도 괜찮다고. 숫자는 사라져도 깨달음은 남는다. 성과는 평가와 함께 잊히지만, 성찰은 내 안에서 오래 머물며 방향을 바꿔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작은 성찰을 기록하려 한다. 누군가에게 건네는 인사 속에서, 책을 고르는 학생의 표정 속에서, 그리고 조용히 흐르는 도서관의 시간 속에서. 성과가 아닌 성찰이 내 길을 지켜줄 것을 알기에.


“성과는 잊히지만, 성찰은 내 길을 바꾼다.”


“다음 글: 〈느려서 다행인 순간들〉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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