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군 도시재생지원센터 코디네이터, '밤골랜드' 운영자 박상언 님 인터뷰
박상언 님은 양양군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이다. 3년 전 서울에서 귀촌한 그는 아버지가 먼저 터를 잡은 양양으로 왔다. 도시재생지원센터 코디네이터로 일하면서 아버지와 함께 강현면 방축리에서 펜션 ‘밤골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상언 님은 올해 내가 가장 많이 만나고 대화한 사람이다. 그리고 고마운 사람 중 한 명이다. 센터 업무를 함께 하면서 좋은 호흡을 맞추었을 뿐 아니라 현지인이 자주 가는 양양 맛집이나 지역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뉴스를 공유해주는 소식통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상언 님을 보면서 청년이 귀촌을 해서 지역의 원주민과 더불어 살아가는 긍정적인 사례라는 생각을 했다. 도시재생지원센터는 중간 지원 조직의 특성상 주민을 만날 일이 많고 지역의 업체와 협력할 일이 잦다. 상언 님이 다양한 지역의 인맥과 업체 정보를 갖고 있어서 업무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상언 님의 이야기가 궁금했던 이유는 그가 28살에 서울을 떠난 점뿐 아니라 양양에서 태어나고 자란 청년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살아가고 있어서다. 그를 통해 지금 양양의 청년들은 무엇을 고민하고 있는지 엿볼 수 있길 바랐다. 양양은 여느 지역들처럼 젊은 사람이 귀한 곳이다. 최근 서핑 문화가 이식되면서 40대 이하의 귀촌인이 늘고 있지만, 여전히 그 수가 많지 않다. 나는 지역의 미래가 결국 청년에게 달렸다고 생각한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2020년 기준 강원도에서 출생한 인구 3명 중 1명만 도내에 살고 있다고 한다. 지역이 소멸하지 않기 위해서는 서울을 떠나 지역으로 오는 청년 못지않게 지역에서 나고 자란 청년이 서울로 유출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일과 삶에서 수많은 가능성을 눈앞에 두었던 청년은 어떤 마음으로 서울을 떠나 양양으로 왔고, 앞으로 이곳에서의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 계획인지 물었다. 상언 님의 이야기가 마찬가지로 수많은 미래의 기회를 눈앞에 두었지만 동시에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불확실한 현재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상언 님은 서울에서 태어나서 계속 살았고, 아버지가 퇴직 후 양양에 정착하시면서 여기로 오게 된 거죠?
박상언: 2016년도에 속초 경찰서에서 근무하시던 아버지가 퇴직을 하시면서 양양에 터를 잡고 집을 지으셨어요. 그때 저는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고 있었는데 한 달에 한 번 정도 양양에 다니러 왔었죠. 바람 쐴 겸 왔다가는 거였어요.
당시 서울에도 어머니를 비롯해서 다른 가족과 살고 있는 집이 있었으니까, 아버지가 양양에 귀촌했다고 해서 함께 양양에 정착해야 하는 건 아니었죠?
박상언: 네, 어머니가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고 계셔서 서울 집에서 저도 계속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아버지께서 제게 계속 권유를 하셨어요. 여기 와서 같이 살자고. 당시 제가 회사 다니는 걸 힘들어하니까 거기서 너무 애쓰지 말라고 하셨죠. 저희 아버지는 모든 사람이 회사를 다니면서 자기 능력을 갈아 넣으며 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세요. 제게도 일단 양양에 와서 농사든 뭐든 새로운 도전을 해보라고 하셨어요. 처음에는 굳이 양양에 가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러다가 점점 회사 다니는 게 너무 힘들어진 거예요. 그래서 퇴사 결정을 하고 2018년 3월에 양양으로 왔어요.
막상 퇴사하고 양양에 간다고 했을 때 어머니 반응은 어땠나요?
박상언: 어머니는 말리셨어요. 서울에서 월급 잘 받고 다니고 있는데 양양에 가면 아무런 소득도 없고, 새로운 시도라는 게 말처럼 쉽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당시에는 저도 뭔가 좀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서 선택했어요.
아버지가 권유를 하면서 농사를 짓든 뭘 하든 하면 된다고 말씀은 하셨지만, 당시에는 농사 지을 땅이나 작물 같은 게 정해져 있는 상황도 아니었잖아요. 지금은 펜션도 운영하고 있지만 그때는 그런 계획이 없었죠?
박상언: 정말 계획이 하나도 없었어요. 어떻게 보면 되게 무모한데 그때는 아무 생각 없이 왔어요. 처음에는 진짜 농사를 지을 생각으로 오긴 했어요. 구체적인 준비를 했다기보다 ‘그래, 농사도 한번 해보지 뭐. 하려면 할 수 있지.’ 이 정도 생각이었어요.
서울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있었나요?
박상언: 컨벤션 센터에서 전시를 주최하는 회사에서 일했어요. 코엑스에서 와인/주류 박람회 같은 걸 하는 거죠. 제가 맡았던 게 주류 쪽이라 B2B성격의 전시를 했어요. 퇴사할 때는 4년 차가 되는 시점이었어요.
그 회사가 첫 회사였나요?
박상언: 네.
전공과 전혀 다른 곳에서 일을 시작했네요.
박상언: 전공은 보건 쪽이었어요. 보건관리사 자격증도 땄고. 환경 쪽에 관심이 많아서 보건 위생학이나 산업 보건 쪽으로 진로를 생각했어요. 그런데 대학교에서 공부를 하면 할수록 이게 내가 원하는 길이 맞나 하는 의문이 들더라고요.
전공과 다른 진로를 정할 때도 수많은 길이 있는데, 전시 기획 쪽을 택한 건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박상언: 막상 학교를 졸업하고 나니까 너무 막막한 거예요. 시간을 조금 더 벌어보자는 마음으로 영국 어학연수를 갔어요. 한 9개월 정도 있었는데, 돌아와서도 여전히 막막한 거예요. 그런데 그때가 이명박 정부 시절인데, 마이스(MICE) 산업이 지금의 도시재생 뉴딜사업처럼 국가 전략산업으로 주목받았어요. 국가 예산으로 인력 양성을 하는 아카데미가 있었는데 우연히 모집 공고를 봤어요. 제가 지금까지 봤던 수많은 전시회가 누군가가 아이디어로 기획을 하고 업체를 모집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걸 실감한 거죠. 그리고 당시에 제가 몽상가처럼 아이디어만 되게 많았던 시기였어요. 그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서 제대로 기획자로서 역량을 키우고 싶은데, 수많은 현장의 변수를 배우려면 ‘이거다!’ 싶더라고요. 전시 기획자를 하면 내가 원하는 역량을 키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퇴사를 할 때는 일 자체가 맞지 않거나 힘든 경우도 있고, 일은 괜찮은데 직장이 안 맞을 때가 있잖아요.
박상언: 일이 힘들었지만 감내할 만한 수준이었고, 직장에서도 딱히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일종의 매너리즘을 느꼈어요. 전시 기획이라는 게 정해진 루틴이 있거든요. 새로운 행사를 준비해서 개최하고, 다음 1년 동안 또 준비하고 개최하고. 전시의 주제나 품목이 크게 바뀌지 않아요. 물론 연차가 쌓이거나 팀장급이 되고 관리할 수 있는 상황이면 좀 달라지겠지만 제가 담당하는 영역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거든요. 실무를 3년 이상 하면서 몇 차례 같은 전시를 하다 보니까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되어서 또 다른 다양한 경험을 해보면 좋겠다 싶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아버지가 권유하셨을 때, 꼭 농사가 아니더라고 뭔가를 하다 보면 내 길이 보이겠지 하는 마음에 퇴사 결정을 했어요.
회사를 그만두고 양양으로 이주를 준비할 때 확정적인 게 별로 없었잖아요. 이십 대에 서울을 떠나 시골로 가는 건 큰 결정이었을 텐데, 마음가짐이든 뭘 새로 배우든 준비를 한 게 있어요?
박상언: 무모하다는 표현이 딱 맞는 게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아직도 기억이 나는 게 2018년 3월 말에 그냥 서울 집에 있던 제 짐을 다 싸 들고 양양으로 왔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뭘 할지 알아본 거예요.
당시 28살이었잖아요. 부산 같은 대도시도 아닌 양양에 간다고 결정할 때 고민은 없었어요?
박상언: 마냥 설렜어요. 걱정이 크고 두려움이 컸으면 아예 오지도 않았을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되게 많이 설렜던 기억이 나요. 그리고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뭘 해도 될 것 같다. 여기서 배추를 팔아도 잘 먹고 잘 살겠다.’ 같은 마음이요. 여기서 내 사업을 꾸리면 뭘 해도 지금 회사 다니는 것보다 환경이 좀 더 나아지겠다 싶었거든요. 실제로 지금 일하느라 바쁘고 제 시간이 없어도 일에서 얻는 성취감은 서울에서 회사 다닐 때보다 훨씬 커요. 회사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실망감은 내가 아무리 의견을 말하고 열심히 일을 해도 결국 윗사람 배만 불려주는 결과가 되는 거였어요. 제게 고생했다고 말하지만 성과는 리더가 다 가져가니까 그들만의 잔치가 되는 거죠. 그렇지 않은 회사가 어디 있겠나 싶기도 하고, 또 요즘은 안 그렇다고도 하지만 당시에 저는 실망감이 컸어요. 그래서 나만의 뭔가를 해보자, 실패해도 내가 온전히 느끼고 성공해도 희열을 모두 느낄 수 있는 그런 일을 해보자는 마음이 제일 컸어요.
서울에도 집이 있고 가족이 있었으니까, 양양에서의 삶이 생각과 다르면 서울로 돌아갈 수 있는 조건이었잖아요. 서울로 돌아가는 것도 염두에 두었나요?
박상언: 아니요. 그런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지금 제가 양양에서 직장을 다니고 있긴 하지만, 만약 직장이 없다고 해도 서울로 다시 갈 생각은 안 했을 거예요. 서울은 이미 너무나 치열한 경쟁이 있는 곳이잖아요. 굳이 거기서 치이며 사는 것보다 여기에서 제 할 일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요. 서울에서 용의 꼬리가 되는 것보다 여기서 뱀의 머리가 되는 게 낫다고 할까요? 양양이 규모 면에서 아직 시골 소리를 듣잖아요. 여기서 내가 잘 해내는 게 더 유리하다고 생각했어요.
2018년 초에 양양에 온 후 처음에는 무엇을 했어요?
박상언: 1년은 그냥 놀았어요. 그리고 2019년에 강원도 농업기술원 미래농업교육원에서 하는 교육을 들었어요. 청년 농업인을 육성하기 위한 교육이에요. 춘천에서 6~7개월 동안 숙식하면서 다양한 커리큘럼으로 교육을 받았어요.
올해(2021년)부터는 양양군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잖아요. 그전에 작년(2020년)에 강릉시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인턴으로 일을 한 거죠?
박상언: 네, 우연히 인터넷에서 도시재생 뉴딜사업 관련해서 청년 인턴을 뽑는다는 공고를 봤어요. 제가 양양에 정착하면서 로컬 생태계에 대한 관심이 많았거든요. 서울에서는 도시재생이라고 하면 성수동에서 폐창고를 리모델링하기도 하고 여러 사례들이 이슈가 되곤 했으니까, 그런 일을 해보면 재미있겠다 싶더라고요. 다행히 인턴에 합격을 해서 일을 시작했어요. 인턴 기간이 종료되면서 강릉시 센터에서 코디네이터로 계속 일을 할 생각도 있었는데, 그즈음에 양양군 도시재생지원센터가 생길 거라는 이야기가 돌았어요. 타이밍이 잘 맞은 거죠. 그래서 2021년 3월부터 양양군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코디네이터로 일하기 시작했어요.
강릉시 센터에서 인턴을 했지만 양양군 센터는 개소 첫 해라 일하는 사람으로서 어려움도 있잖아요. 생각하지 못했던 어려움이나 재미가 있다면 무엇이었어요?
박상언: 인턴으로 일할 때는 실무를 많이 맡진 않았어요. 행사 준비물을 챙기거나 동네를 돌아보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지도의 루트를 짜보는 정도의 업무였죠. 보고서나 서류 작성과 결재 등은 코디네이터들이 다 했어요. 인턴들이 열악한 처우에서 일하는 걸 아니까 코디님들이 배려를 많이 해주셔서 마찰이 생길 일도 없고 행복했어요. 양양군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일하면서 좋은 점은 일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거예요. 다양한 일을 하면서 예상치 못한 변수도 생기는데 그걸 같이 풀어나가는 게 재미있어요. 아쉬운 점은 할 수 있는 사업이 좀 한정적이에요. 국가사업은 정해진 사업비 내에서 사전에 정해진 사업계획서의 내용으로만 해야 하는 게 있잖아요. 위탁 운영인 강릉시 도시재생지원센터와 달리 행정 직영이라는 점에서도 예산을 쓸 때 제약이 있고요. 서울이나 다른 곳 사례를 보면 도시재생이라는 주제로 되게 재미있는 것을 많이 하는데, 저희도 주민들과 함께 더 다양하고 재미있는 사업을 해보고 싶어요.
제가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이자 팀장의 입장에서 상언 님에게 고마운 부분이 있어요. 주민을 대할 때 스스럼이 없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는 점이요. 나이가 많은 어르신부터 중고등학생까지 편하게 대하는 부분이 보기 좋거든요. 굳이 애써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 성격이 그래 보였는데, 맞나요?
박상언: 저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새로운 사람 만나는 걸 되게 좋아해요. 어르신과 만나는 것도 재미있어요. 나이 많은 분들에게 부정적인 선입견도 없어요. 그 사람도 나름대로 인생철학이 있고, 그런 걸 듣는 게 재미있어요. 아이들은 순진무구한 모습이 있어서 그걸 보면서 순수함도 느끼게 되고요. 제 또래로부터는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나 정서를 공유할 수 있어서 좋고, 팀장님을 비롯해 저보다 나이가 많은 형님, 누님으로부터는 제가 곧 맞게 될 가까운 미래의 인생 조언을 들을 수 있어 좋고요. 제가 예전에 읽은 책에 어린아이한테도 배울 점이 많다는 부분이 있었는데, 진짜 공감해요.
지금 아버지와 함께 하고 있는 펜션 사업도 상언 님의 일상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죠?
박상언: 아버지가 지금 살고 있는 집 바로 옆에 펜션을 지으셨어요. 애초에 저와 함께 하는 걸 염두에 두고 시작하신 건데, 당시에 저는 막연하게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 그런 점에서 저희 아버지의 추진력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아버지가 펜션을 지었고 이후 운영 관리는 제가 전적으로 담당하게 된 거죠. 2020년 11월에 처음으로 손님을 받기 시작했어요.
펜션을 짓는 데 들어간 비용이나 추진력 등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시작할 수 없었다고 할 수 있네요. 한편으로는 본인이 하고 싶어서 시작한 게 아니라 부담도 컸을 텐데요. 생각했던 것보다 재미있는 부분도 있었을 거고요.
박상언: 펜션은 아버지가 양양에 정착하신 초창기부터 생각하신 일종의 빅 피처(Big Picture) 중 하나였어요. 집 옆에 공터가 있는데 키우는 개들을 묶어두는 자리로만 쓰고 있었거든요. 그 땅에 터를 닦아서 펜션을 짓자고 말씀하셨는데, 몇 억 단위의 큰돈이 들어가는 일이다 보니까 제가 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서 좀 미루려고 했죠.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이웃 분들이 펜션을 많이 하고 있더라고요. 본인 집으로 하시는 분들도 많고요. 그걸 보면서 우리도 한 번 해보자 생각한 거죠. 적성에 맞는지 아닌지는 해봐야 아는 거니까 일단 시작했는데, 다행히 잘 되고 있어요. 코로나 시기에 문을 열었는데 독채 펜션이다 보니까 호응이 꽤 있어요. 안심하고 쓸 수 있는 공간을 찾는 분들로부터 문의 전화도 꾸준히 오고요. 예약 상담을 하면서 손님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도 다행히 제 성격에 잘 맞아요. 손님이 갑자기 좀 까다로운 요구를 해도 유연하게 대처를 하다 보니까, 걱정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구나, 재미있다 싶어요.
주중에는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일하면서 주말에는 펜션 운영도 하는 거잖아요. 혼자 해내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박상언: 사실 펜션은 지금보다 더 제대로 운영하려면 홍보나 마케팅부터 인테리어 등 신경을 더 써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은 예약도 사이트 한 곳에만 올려놓은 상태예요. 그래도 신축이고 깔끔한 펜션이라는 점 때문에 손님들이 찾아주는 거죠. 낙산사에서 가깝기도 하고요. 아직은 주말에만 예약이 다 차는 정도라서 혼자 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닌데 힘들긴 하죠. 그리고 주말에는 제가 여자친구 만나러 서울에 다녀오거든요. 토요일 오전에 청소하고 손님 맞을 준비를 다 해놓죠. 방향제 잔량도 확인하고 여름에는 손님 오기 전에 에어컨을 미리 틀어 놔서 시원하게 해 둔다든지 하고요.
펜션 자랑 좀 해주세요.
박상언: 펜션 이용객만 다닐 수 있는 프라이빗 산책로가 있어요. 아버지가 길을 닦아 놓고 관리하세요. 그리고 제가 위생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라 깨끗해요. 다녀가신 손님들이 후기에서 하시는 이야기가 다 깨끗하다는 내용이에요. 신축 건물이라서 깨끗한 부분도 있지만, 부엌이나 화장실, 침구 청결에 신경을 많이 써요. 꼭 코로나 시국이라서가 아니라 제가 고객으로서 펜션을 이용할 때 실망했던 부분을 우리 펜션에서는 느끼지 않도록 하고 싶어서요. 요즘 인기 많은 감성 숙소처럼 인테리어가 특별한 게 아니라면 위생 관리는 기본이자 절대 타협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위생에 있어서는 자부심을 갖고 있어요.
깨끗함은 숙소의 기본인데, 실제로 그런 기본이 안 갖춰진 곳이 많으니까 오히려 차별화 포인트가 되기도 하죠.
박상언: 되게 사소한 부분일 수 있는 건데, 거울 물때나 수전에 남은 지문 같은 걸 늘 신경 써요. 물때가 있어도 큰 문제는 아니지만 없으면 더 좋죠. 독채 펜션에 나름 큰돈을 내면서 왔는데 앞서 사용한 사람의 흔적이 있으면 기분이 좀 좋지 않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위생에 정말 신경을 많이 써요.
감성 인테리어는 초기에 비용이나 노력은 많이 들어도 한 번 세팅을 하면 매번 유지하는 데 드는 노력은 상대적으로 덜할 텐데요. 반면에 위생은 운영자가 매번 몸을 써서 해야 하는 부분이죠.
박상언: 지금 상황에서는 청소 담당 인력을 따로 고용하는 것보다 제가 직접 하는 게 수지 타산이 맞아요. 그리고 요즘 N잡 시대잖아요. 평일에는 직장에서 일하고 주말에 3~4시간 정도 투자해서 제 용돈 벌이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펜션 이름이 밤골랜드잖아요. 어떤 의미를 담았어요?
박상언: 밤나무가 많은 지역이라 밤골랜드예요. 제 친구들은 이름이 유치하다고 해요. (웃음) ‘랜드’라는 게 좀 옛날 느낌이잖아요. 아버지와 제가 같이 짓긴 했는데, 딱히 더 나은 아이디어가 없었어요. ‘랜드’가 붙은 건 펜션이 아버지의 마스터플랜 중 하나라서예요. 지금 펜션 옆에 있는 임야도 개발해서 더 큰 농원을 만드실 계획을 갖고 계신 터라 펜션 이름을 좀 거창하게 지은 거죠. 체험이나 관광 콘텐츠를 더 추가하려고 하세요. 요즘 말하는 6차 산업을 생각하시는 거죠. 아버지는 먼 미래를 보고 있는 거고, 지금은 숙소 하나지만 밤골랜드의 시작인 거죠.
N잡을 하면서 바쁘게 살고 있는데, 퇴근하고 운동하러 체육센터도 다니잖아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도 반성을 좀 하게 돼요. (웃음)
박상언: 운동이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에요. 퇴근 후에 운동하러 가려고 생각하면 당연히 힘들지만, 막상 하고 나면 되게 개운해요. 운동을 마쳐야 뭔가 하루 일과가 종료가 된 것 같고요.
앞으로 여러 가지 일들이 안정적인 상태가 되면 조금 더 신경을 쓰거나 새롭게 해보고 싶은 게 있나요?
박상언: 일단 펜션을 좀 더 안정적으로 운영하고 싶어요. 지금 같은 비수기는 평일 손님이 거의 없거든요. 성수기든 비수기든 안정적으로 월 2~300만 원 수익을 내야 하는데, 그러려면 주말은 당연하고 평일에도 손님이 와야 해요. 이를 위해서 새로운 컨텐츠를 추가하든지 인테리어를 바꾸든지 변화가 필요한데, 그게 지금 저의 가장 큰 목표예요.
상언 님이 양양에서 활동하는 단체 중에 4-H회가 있잖아요? 어떤 곳인지 설명을 해주면 좋겠어요.
박상언: 4-H회는 우리 농업과 농촌사회를 이끌어갈 전문 농업인으로서 자질을 키우기 위해 조직한 단체예요. 지금은 예전만큼 활발하게 활동하지는 않지만, 지역에서 농업에 종사하거나 관심 있는 청년들이 모여서 함께 공부도 하고 친목을 다지기도 하고요. 중앙 본부에서 예산을 받아서 다양한 프로젝트도 진행해요. 양양군은 학습 과제포로 고구마 심기를 하는데 매년 직접 재배해서 판매까지 해요.
4-H 활동은 언제부터 하고 있어요?
박상언: 2018년도부터예요. 이것도 아버지가 권유하셨는데 처음에는 되게 가기 싫었어요. 아직 농사를 지을 건지 확신도 없던 때니까요.
기존 회원 중에는 양양에서 나고 자라서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람들이 많겠죠? 그런 모임에 선뜻 가입하기 쉽지 않았을 것 같네요.
박상언: 어릴 때부터 학교도 같이 다니고, 나이 차이가 있는 회원들이라고 해도 대부분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람들이죠. 그래서 처음에는 진짜 걱정을 많이 했어요. 귀촌하면 가장 힘든 게 기존 주민의 텃세라는 말도 많이 들었으니까요. 기존 4-H 회원들도 제가 몇 번 나오다가 말 거라고 생각했대요.
그분들 입장에서는 한두 번 나오다 곧 탈퇴하는 경우를 많이 본 거죠.
박상언: 네, 지금까지 엄청 많았던 거죠. 몇 번 모임에 나오다가 안 나오니까 외지인에 대한 기대가 없었던 거예요. 그런데 그때 저는 일단 남는 게 시간이었으니까 모든 교육이나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어요. 고구마 농사라든지 일손이 필요할 때도 진짜 열심히 나갔어요. 매번 나가서 인사하고 열심히 하니까 되게 좋아하시더라고요. 작년부터는 총무를 맡게 됐어요. 코로나로 인해 예년처럼 많이 활동은 못했지만 나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이전에는 회의를 해도 정식으로 회의록 작성하거나 공유하지 않았는데, 제가 그런 걸 하기 시작했어요. 회의에 못 와도 단톡방에서 내용을 공유하니까 다들 좋아하시더라고요. 열심히 한다고 예뻐해 주세요.
저는 지역의 삶 중에서도 청소년이나 청년에게 관심이 있는 편이에요. 저나 상언 님처럼 서울에서 살다가 양양으로 온 사람의 고민도 있지만,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서 어른이 된 이들이 갖는 답답함이나 막막함도 있을 것 같아서요. 여기서 만난 청년들은 어떤 고민을 갖고 있나요?
박상언: 농사를 짓거나 소를 키우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보면 가업이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인 거죠. 부모님 세대부터 계속해 온 일이니까 물려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다른 일을 하고 싶어서 부모님과 갈등을 겪으면서 다른 지역으로 갔다가 잘 안 돼서 다시 돌아오는 경우도 있고요. 청년 인구가 적다 보니까 연애나 결혼이 쉽지 않은 것도 고민이죠. 이성과의 만남 자체를 기대하기 어렵다 보니까 걱정할 수밖에 없나 봐요. 타지로 가지 않고 양양에 살고 있는 청년끼리는 한 다리 건너면 아는 사이다 보니까 조심스러워서 웬만하면 양양 사람을 연애 대상으로 만나고 싶어 하지 않고요.
연애, 결혼 다음에는 육아라는 과제가 자연스레 떠오를 수 있는데요. 양양에서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에 대해 생각해본 적 있나요?
박상언: 저는 여기도 사람이 태어나는 곳이고 자라는 곳이라 걱정을 크게 하지는 않아요. 쉽진 않겠지만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큰 병원은 없지만 구급차가 안 오는 것도 아니고 섬도 아니고요. 제가 아이를 직접 낳는 사람이 아니라서 다소 무책임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부족한 환경이나 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있어서 무작정 걱정을 하지는 않아요. 아이가 특별한 재능을 갖고 있어서 좀 더 나은 교육 환경이 필요하다면,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지원할 거고요.
상언 님은 부모님과 함께 귀촌을 한 경우인데요. 부부가 함께 혹은 비혼의 청년이 혼자 귀촌하는 것과 차이가 있을 것 같아요. 아버님의 도움이 있어서 초반에 기반을 잡거나 적응을 하는 것이 덜 힘들었을 수 있지만 한편으론 부모님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 한 부분도 있지 않나요?
박상언: 아버지와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는 게 아주 어릴 때 말고는 없었어요. 아버지가 경찰이셨는데 다른 지역에 발령이 나서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거든요. 성인이 돼서 아버지와 함께 지내다 보니 당연히 갈등할 때도 있어요. 그럴 때는 독립해서 살고 싶어요. 그런데 지금 제가 독립하면 돈이 안 모여요. (웃음) 그게 저한테는 제일 컸어요. 제가 아버지에게 필요한 부분은 도와드리면서 아버지 집에서 편안하게 따뜻한 밥 먹으면서 저축을 할 수 있는 거죠. 어머니가 서울에서 주말마다 오셔서 반찬을 해주시는 것도 감사하죠. 무엇보다 아버지가 양양에 계시지 않았으면 저 혼자 올 생각은 안 했겠죠. 빨리 결혼하라고 재촉하시는 것 외에는 아버지가 제게 강요하는 것도 별로 없어요. 오히려 감사한 부분이 많죠. 펜션만 해도 아버지의 큰 계획 중 일부였다고 해도, 지금 펜션을 운영하면서 제가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요.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죠.
28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서울을 떠났는데요. 지금 20대 후반에 서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중에 서울이 아닌 곳에서 살고 싶은 사람도 많을 거예요. 생활 물가가 비싼데 취업난이다 보니 안정적인 수입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양양을 비롯한 지역은 생활 물가는 낮아도 일자리가 더 없어요. 먼저 경험한 사람으로서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요?
박상언: 저는 지역에서 사는 걸 적극 권장해요. 제 경험에 한정한다면 여기에서 사는 게 너무 힘들기만 한 게 아니었으니까요. 물론 아버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아무 연고도 없이 혼자 와서 사는 건 쉽지 않을 거예요. 한 달 살기처럼 일시적인 게 아니라 평생 지낼 거라면. 하지만 함께 올 배우자나 가족이 있다면 저는 적극 권장하고 싶어요.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 육체적으로 건강한 걸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면 좋겠어요. 저는 건강한 정신이 건강한 육체에서 나온다고 생각해요. 돈을 벌기 위해서도 쓰기 위해서도 건강이 가장 먼저예요. 어떤 선택을 하든 몸과 마음이 피폐해지는 건 피해야 해요. 내 몸이 썩어가는 걸 알면서도 그걸 감내하면서까지 할 가치가 있을까요? 청춘을, 인생을 불합리한 환경에서 썩게 두지 말고 신체를 단련하면서 많은 사람과 교류를 하고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가지면 새로운 기회가 생길 거라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