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인과 마스크팩, 홀로 심야를 가로지르는 비장의 무기
삼십 대 초반까지 인생에서 치열하게 살아본 적이 없다.
이 사실을 깨달은 시기는 어쩌다 보니 선행학습 없이 덥석 들어간 로스쿨에서 하얗게 날밤을 지새우던 시험기간이다. 당시 백지 답안을 낼 것 같은 두려움 속에서 꾸역꾸역 생경한 법조문을 더듬어 읽어 내려가는 동안, 다 포기하고 조금이라도 눈을 붙일지 수도 없이 고민했었다. 점차 시야가 밝아지면서 결국 침대는 애달프게 쳐다만 보다 커피를 한약처럼 들이켜고 시험장을 향할 때의 그 처절함을 기억한다.
그렇게 로스쿨이라는 암흑의 동굴을 무사히 지나고 나면 직종은 달라질지언정 사회인이라는 본질에서 기자일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으로 돌아갈 줄 알았다. 정해진 업무 시간이 있고, 일정한 업무량이 있으며 그날의 업무를 마치고 나면 홀가분하게 여가를 즐길 수 있는 삶 말이다.
그러나 관문을 지나 알게 된 것은, 로스쿨에서 카페인 섭취를 위해 마시기 시작한 커피라든지 열람실에서 자정 넘어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몰래 꺼내어 썼던 마스크팩 같은 아이템들이 그대로 유용하다는 것이다.
변호사로서의 삶은 로스쿨 수험생활의 연장선인 듯 초조하고 절절한 때가 많다.
야근을 작정하고 출근한 날이다.
중요한 증인신문을 앞둔 날이나 복잡한 법리적 쟁점을 정리하는 서면을 써야 하는 날이면 어김없이 '야근할 결심'을 굳게 하고 온다. 비효율적으로 녹초가 될 때까지 남아 있지 말고 제발 빠릿빠릿하게 써서 제 때 끝내고 사무실을 나서고픈 마음은 굴뚝같지만, 준비해야 하는 증인신문이나 서면이 중요하면 중요할수록 심적 부담이 더해져 기록을 정독하고 필요한 쟁점을 메모하는 등의 예열시간이 길어진다.
이전까지 10년 가까이 다른 직업군에 종사했지만, 일과 생활이 균형 잡힌, 이른바 '워라밸'이 상당히 좋은 직장에 주로 다닌 나는 순전히 서면을 쓰는 업무만으로 창밖의 깜깜한 밤하늘을 이따금씩 응시하며 정상적인 퇴근 시간을 훌쩍 넘겨 새벽까지 일하는 게 가능하다거나 필요하다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런데 로스쿨 시험기간에 근처 편의점에서 새벽 두세 시에 동기들을 마주치는 게 자연스러웠던 것처럼, 이 업계는 야근이 디폴트이고 적어도 송무를 하면서 철저히 워라밸을 지키며 사는 삶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머잖아 깨닫게 됐다. 그것은 누군가가 야근을 강요해서가 아니라 변호사가 하는 업무의 특성 때문이다.
그날은 이미 특정 사건 준비를 위해 야근을 계획하고 온 데다가, 예상하지 못한 업무가 아침에 추가된 날이었다.
보통은 오후 서너 시경의 나른함을 카페인으로 견뎌내고, 폰을 만지작만지작 하면서 산만하게 시간을 때우기도 하다가 다급해져서야 작성에 속도가 붙게 마련인데 추가로 주어진 서면의 마감시한을 보니 절로 효율이 높아졌다.
같은 날 2개의 비중 있는 서면을 반드시 완성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감에, 먼저 계획한 서면을 낮부터 숨도 쉬지 않고 써 내려갔다. 저녁 8시가 좀 넘어 클리어하고, 두 번째 서면 작성을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규모가 크지 않은 법률사무소에서 일하기에 그 시간까지 사무실에 남은 이는 나 하나뿐임을 어렵지 않게 확인했다.
순간 떠오르는 회심의 미소- 재빨리 서랍에서 화장솜을 꺼내어, 클렌징워터를 듬뿍 묻혀 얼굴을 닦는다. 화장실 세면대에 가서 클렌징 오일과 폼으로 마무리하고, 자리로 돌아와 마스크팩을 얹은 채 모니터를 응시하면 한결 피로가 풀리고 리프레시되는 기분이 든다. 로스쿨 열람실에서 밤이 깊어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 조용히 마스크팩을 얼굴에 올리고 공부하던 때와 같다.
두 번째 서면의 방대한 기록을 검토하는데 그만 하품이 쏟아진다. 아이스커피를 타서 벌컥벌컥 의무적으로 마시고, 본격적으로 서면 작성에 돌입하려는데 머릿속에 두부가 든 것처럼 뭉툭해진 느낌이 든다. 날카로운 법리적 쟁점을 고민할 시간에 도통 무념무상이 돼버린다. 긴급대책으로 섭취한 카페인도 더 힘을 못쓰고 심연의 나락으로 가라앉고 만다. 이 위기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밤 10시. 야근을 결심한 날이면 집에서 삶은 계란과 두유, 선식을 가져와 저녁 대신 먹곤 하는데 그 시간쯤 되자 효용이 다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주저 없이 평소 거의 이용하지 않는 배달 앱을 실행해 1인식도 배달 가능한 곳 중에서 메뉴를 골랐다. 야근할 때 사 먹는 메뉴는 버거, 샌드위치 또는 브리또가 적당하다. 그래야 식사를 하면서도 모니터를 보면서 업무를 계속할 수 있으니까.
주문한 버거 세트는 약 15분 만에 번개 같이 도착했다. 평소 세트를 시키면 배불러서 감자튀김은 다 먹지 못하고 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날은 하나하나 줄어드는 게 아쉬울 정도로 남김없이 흡입했다. 그러고 나니 서면이 술술 써지기 시작했다.
이 업의 특성상 야근이 거의 불가피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서면을 쓰거나 재판에 출석할 때마다, 해당 사건을 맡긴 의뢰인의 심경이 떠올라서다. 변호사로서 수임하고 담당하는 사건들의 면면은 의뢰인들의 삶과 맞닿아 있어서, 혹시라도 내가 뭔가를 잘못해서 의뢰인이 불이익을 입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그래서 늘 초조하고 절절하다.
이 스트레스가 견디기 어려워 작년 말 즈음 찾아온 몇 주 동안의 번아웃 기간에는, 법원 조정실에서 겪은 사소한 일을 계기로 별다른 이유 없이 삶이 불행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사직서를 내고 사직의사를 밝히면 적절한 시기에 모든 걸 접고 떠날 수 있는 직장인 -이라 쓰고 '그 어느 날 호주행 비행기 티켓을 결재하고 퇴사와 동시에 날아가버린 나'라고 읽는다- 과는 다르게, 변호사는 개개의 사건이 끝나지 않는 이상 의뢰인들을 저버리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기도 힘들다.
그렇게 묶여 있는 상황이 몸서리치도록 답답했던 적도 있지만, 어느덧 마음은 다시 평화를 찾았다.
그리고 중요한 서면 2건을 모두 끝내야만 했던 그날은, 마스크팩과 카페인, 야식의 도움을 차례차례 받아 새벽 세시가 넘어서야 마무리하고 콜택시를 부를 수 있었다. 자정 내지 새벽 한 시 정도가 이전까지의 기록이었는데 다시금 신기록을 돌파한 것이다.
고된 로스쿨 생활에 이어 만만치 않은 변호사 일을 하면서 주저앉고 싶을 때 주저앉지 않고 버티는 끈기를 배운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좀처럼 써지지 않던 서면이 술술 써지기도 하고,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성취감으로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하고, 어느 순간 죽을 것 같던 번아웃이 자연스레 지나가기도 한다.